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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이 시스템에 속해있다는 확신을 얻고자 시스템에 편입되기를 갈망한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내가 언제까지나 똑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의든 타의든 간에 기꺼이 추방된다. 편입되고 다시 추방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 후 우리는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강한 확신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편하게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확신은 저주에 가깝다. 유사-아버지, 유사-어머니로 대표되는 두 인간형은, 우리가 그곳에 있음을 확인해 줌으로써, 우리에게 잠깐의 안락함을 선사하겠지만 그 안락함은 미완의 형태로 결코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것이며, 그들은 믿음을 잔인하게 짓밟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사진의 형태로 있을 때 사랑의 징표로서 가장 안정적이다. 오래된 사진을 보며 우리는 그들을 그리워할 것이고 그 사진을 지니고 있는 한 시스템에 편입되고자 하는 희망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진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사진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사진이 존재했음을 잊어버릴 것이고 사진 속 그들이 존재했음을, 그들이 줬던 편안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릴 것이고 우리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아무도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나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실종될 것이다. 실종자의 형태로서의 인간은 실종 당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며 존재를 확인한다. 거기에는 내가 있을 것이고 종이에 적힌 나를, 적어도 나로부터, 외부의 것이며 내부의 것을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카프카가 하던 문학적 셀카는 굳이 인스타에 사진을 포스팅하지 않더라도 제1감상자인 그 자신이 셀카를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충분히 위안이 됐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원고는 미완성이어도 상관이 없으며 죽은 후에 누군가가 원고를 불태워도,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상관이 없지 않았을까?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