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19세기 제정 러시아. 정치적 격변기에 여러 정치사상이 꽃피기 좋은 시절이였으나 야비한 전제정권은 마치 마갤 완장들이 차단 남발하는 것처럼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거기에 우회로로서 문학을 통해 사상을 표출하였다. 19세기 러시아 문학도 그런 연유에서 발전하였다고 들었다.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들은 사상가이기도 한데, 마치 18세기 루소, 볼테르, 디드로가 소설가인 동시에 계몽사상가이기도 한것 처럼 아니면 16세기 몽테뉴 에라스뮈스, 모어 처럼 말이다. 반면에 19세기 영국소설 제인오스틴, 찰스디킨스를 누가 사상가로 치부하는 가?


환경적으로 갑갑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짱구를 굴려서 풀어야하고, 문제풀이에서 서로 의견을 피력하는 과정도 하나의 체제 변혁의 과도기에 가까울 것이다. 이미 문제는 공론화 되었고, 문제를 풀고자하는 흥분과 도전욕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야비한 정권이라면 문제제기 자체를 은폐하고, 비판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여 계속 미몽에 잠겨 있길 바랄테지만 이미 너무 때가 늦었고, 자유주의의 바람은 북한처럼 폐쇄된 국가로 국가간의 교류를 끊어버리고 경쟁에서 도태될게 아니라면 문물이 들어올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사상을 전달하고 유세를 하고 싶다는 충동은 하나의 이념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도스토예프스키는 특별한 이념을 가지고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해석한다. 젊은 시절 자유주의운동에 가담한 전적을 뒤집어서 중년 이후로 민족주의, 국뽕, 종교주의자, 보수주의자로 변모한 것 답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렇게 극적으로 변화한데는 너무 낭만적인 기질에 잇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가 정교함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낭만적 기질 덕분에 젊었을 때 툭튀는 행동을 했던것 같다.


사회규범에 어긋나는 이념을 갖는다고 무조건 낭만적인게 아니라, 오랫동안 문명권의 억명단위로 이상한 미신이나 악습에 젖고 미몽에 빠져 살았던 것을 고려하면 그 벌레 같은 바보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미몽이 낭만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 쪽이 더 낭만적인지라 순종의 낭만으로 빠져든것 같다. 제일 간편하게 자부심을 성취할 수 있는 게 진영논리이다. 거기에 태어나기만 하면 그 세력에 힘을 믿고 편승하여 자부심을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 후진국에 나치즘이나 극우세력이 날뛴다. 오랜 투옥생활에 부서져버린 자부심은 진영논리를 통해 보충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민주주의식 진영논리도 민주주의 근본에 대한 비판과 도전은 허용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접근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것 가히 혁명적이다. 어느 체제든가 혁명을 용인하는 정부는 없다. 혁명을 애초부터 막을려면 근본적인 접근부터 차단할 가능성이 높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반은 방항아이면서 반은 순종아이다. 반항아적 기질에서 본질을 꿰뚫어보는 깊이가 있었던것 같다. 난 그게 더 맘에 든다.


19세기 후진적인 정치체제를 지녔던 러시아는 뒤늦게 까지 결투가 용인되고 있었는데, 문학 작품에서도 결투를 소재로 엄청 흔하게 써먹는다. 정권 차원에서도 언제든 결투를 응낙 받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근본이 생명에 있다면 정치도 근본적인 생명을 담보로 내걸고 공평한 조건에서 도전을 감수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도전을 안받는 것 그것은 왕 밖에 없다. 왕은 다른 의미로 비합리적인 우상이자 높은 확률로 압제자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