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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 ㅇㅂ의 배후 세계를 동물화하라.


  과거 인터넷 문화와 이질적인 점은 그것이 국가와 사회로부터의 '인정'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바깥으로 향한 인정투쟁과 그것에 기반을 둔 정치적 기획을 경멸하는 데서 성립한다.

  과거에는 인터넷에서 아무리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도 어찌되었던 국가와 시민사회의 연장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입각하여 자유와 책임이 논의되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담론투쟁은 현실의 정치적 투쟁, 이데올로기 대립과 어느 정도는 조응했다. 사이버 공간이 현실의 공간과 아무리 달라도 기본적으로 인터넷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바깥 사회와 국가에게 들리기를 바라는 인정 욕구에 입각하여 집단적 행동을 만들어냈다.(주체의 차이)

  현실 사회에서 소회된 목소리가 반영되길 원하는 욕구에 입각해 있는 한 인터넷의 담론은 진보적 의제와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의 외연이 무제약적으로 확장된 만큼 바깥과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 자신의 자율적 논리 속에 갇히게 되었다.

  이 책의 기본 목적은 ㅇㅂ 유저들의 심리적 동기나 사회학적 배경을 분석하는 데 있기 보다는 행동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 형태'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인터넷 역시도 언뜻 보면 몰사상적인 공간처럼 보인다. 동시에 인터넷은 몰상식성이 역으로 하나의 사상적 의지로 뒤바뀌는 뒤틀린 공간이다. 내 관심은 왜 그러한 뒤틀림이 초래되었는지를 파헤치는 데 있다.

  사실은 고백하자면 필자는 ㅇㅂ의 유머 코드 배후에 있는 사고방식을 나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필자와 같은 좌파들의 자기모순을 공격하는 부분에서 은밀한 연대의식마져 느꼈다. 

  ㅇㅂ 유저들도 그들이 비판하는 좌파들의 관념적 급진성을 반전된 형태로 철저히 구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좌파의 거울상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ㅇㅂ의 사상은 인터넷을 그들만의 자율적인 공론장으로 전유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진보좌파에 대한 반동에서 연유한다.

  ㅇㅂ는 본질적으로 진보와 좌파의 증상이다. 둘의 존재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ㅇㅂ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보여준 급진성, 욕망의 정치, 자족적인 언설의 공간,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않은 윤리적 이상주의라는 바로 그 '촛불정신' 은 오늘날 ㅇㅂ에 반전된 형태로 계승되었다.

  당위적으로 비판하기 이전에 그들을 내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2. ㅇㅂ가 영향력을 가지는 까닭


  그들은 과거 인터넷에서 진보적인 '논객'의 말빨이 가졌던 권위와 도덕적인 힘을 이제는 '익명의 네티즌' 들에게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첫번째는 잉여 문화와 막장 문화이다.

  잉여인간으로서 자신의 한심함과 막장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은 다른 인터넷 잉여들과 차별화되는 동시에 '이만 하면 나는 정상이야' 라는 안도감을 주어 묘한 호혜적 동류의식을 얻는다.

  둘째는 병맛 문화이다.

  한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넘어서 의식적으로 일상적인 도덕적 관념과 미적 감각에 위배되는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을 '병맛' 코드라고 말할 수 있다.

  비평용어로 슐리겔, 노발라스와 같은 낭만파에 의해 주창된 낭만적 아이러니와 비슷하다.

  자신 스스로 통상적인 관습과 상식 그리고 의미지평을 넘어선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짐짓 모르는 척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병맛 문화는 게시판 내부에서 익명의 이용자들 상호 간의 예의와 존중을 중요시했던 pc통신 시절의 미덕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버린다.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 어이가 없고 웃기다고 말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더 좋은 인정방식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관심병 문화이다. 

  일부러 위악적인 '컨셉'을 잡으며 상대를 도발하는 것도 조롱조로 희화화하는 짤방을 만들어내는 것도 관심병 문화의 연장선에 있다.

  사람들은 '관심병 종자'를 싫어하지만 사실은 이른바 잠재적인 '관심병 종자'인 것이다.

  유저들은 '차별화된 컨텐츠'를 위해 점점 더 자극적인 소재와 방법을 찾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코갤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의 계기가 되었다.

  분명한건 사회적인 논란들을 계기로 디사인디드 유저들이 점차 자신의 위악적이고 반골적인 병맛 문화를 하나의 '자율적인 언설 공간'으로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허세와 가식' 에서 자유롭다는 나름의 자의식은 다른 커뮤니티보다 '특별' 하다고 생각하는 차별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오늘날의 인터넷은 디지털 공론장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터넷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기록하고 저장하며 절대로 그것을 잊지 않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이다.

  특히 과거 인터넷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면 거기에 대해 빠삭하게 잘 정리하여 알려주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채팅방으로 이동하고. 삭제식 소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3. 짤방(밈)을 주고받는 문화인류학
 

  문화인류학 연구자 이길호는 논문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증여의 논리)에서 인터넷을 특정 선물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산, 증여되고, 각각의 계열들을 가로질러 이동되며 공유되는 공간으로 특정짓는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다. 모스는 증여와 담례의 호수성을 통해 원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교류하고 관계를 맺었는지를 분석한다 거기에서 

  '증여와 답례'라는 교환형식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의 평등하고 수평적인 사회질서를 만들어냈다고 분석한다.

  교환을 통해 각 부족 공동체는 상위의 권력집단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도 서로 평등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서해한의 인디언들은 '포틀래치' 라는 의식을 통해 타인에게 선물을 증여함으로서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

  여기서 증여를 통해 가장 많은 재산을 탕진한 자가 '권위'를 얻지만 재산을 탕진한 이상 그러한 권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평등이 단지 선의가 아니라 남들보다 우월해지고자 하는 경쟁의식에 의해서도 확보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짤방(밈)의 증여와 답례이다.

  원래의 짤방이나 인터넷 콘텐츠를 재창작하거나 반응들을 올리는 것은 바로 그러한 증여에 대한 관계와 같다.

  하지만 모두가 참여하고 글을 올릴 수 있다고 해서 그 공간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누군가(논객)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발언권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 속에서 상호 간에 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주고받는 행위가 확보되어야한다.

  인터넷에서 그러한 가치 있는 무언가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재미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짤방들이다. 

  인터넷이 평등주의적인 이유는 그러한 짤방들이 상호 증여와 답례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교환되며 향휴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유머러스한 짤방을 만들고(증여) 다른 누군가가 재미있다고 반응(답례) 해주면 원래의 창작자는 '권위'를 얻게 된다. 그러나 권위와 명성은 오래 가지 않는데 다른 누군가에 의해 경쟁적으로 2차 창작되면서 원본의 아우라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가 원본에 대한 2차 창작이나 기발한 반응을 만들어냄으로서 최초의 원본을 만든 창작자가 역으로 새로운 컨텐츠를 증여받게 된다.

  즐길 거리를 증여하고 답례하며 주고받는 나름의 '경제' 속에서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관계가 실현된다.

  과거 ㅇㅁㅂ 정부의 경제 정책을 인터넷상에서 예리하게 비판했던 의문의 경제전문과 미네르바가 결국에는 관련 분야에서 종사한 이력조차 없는 백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 인터넷 논객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모두가 좆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전문가로 누구의 권위도 희화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 대한 비판이 '재미가 있어야' 주목받기 때문에 논객들은 예전보다 더욱더 위악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한다.

  "재미가 있으면 누구라도 주목받을 수 있다." 는 인터넷 특유의 평등주의는 이성적인 공론장이든 감성적인 공론장이든 어느 쪽으로도 실현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감성적 공론장이 타인에 대한 조롱 섞인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단 논쟁이 붙으면 '진지하게 토론해보자'라는 묘한 열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 (상호 희화화)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 명성을 얻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다. 또한 특정 집단을 싸잡아 비하하는 짤방이나 콘텐츠가 만들어진 다음 누군가 거기에 악플을 달거나 되갚는 방식으로 '부정적인 호수성'이 실현될 수도 있다.

  커뮤니티나 개인 간에 서로를 조롱하고 비방하는 짤방이나 콘텐츠가 오고가는 '항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은 2012년 12월 13일에 일어난 'ㅇㅂ대첩'이다.

  서로를 희화화하거나 예를 들어 특정 유저들을 조롱하는 짤방과 콘텐츠를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따돌림과는 조금 다르다. 서로를 희화화하고 조롱하고 그것을 모두와 공유하는 것이 오히려 조롱의 당사자를 포함한 유저들 사이에서 전반적인 유대감을 형성한다.

  만일 심각한 따돌림이 발생하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거나 다른 커뮤니티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부정적인 호수성은 특정 유저가 '컨셉을 잡고' 사람들의 신경을 긁거나 일부러 도발하는 행위를 함으로서 성립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악명을 얻는 이 자신의 '이름'을 얻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 조롱과 비하를 되돌려주는 것도 일종의 평등한 호수성의 형태라 볼 수 있다.


  4. 논객다운 글쓰기의 모험 강준만 정신
 

  공론장에서 요구되는 규범들 의사소통 행위의 진실성, 사실성, 타당성에 관한 규범들은 "좋은 의도로 무언가를 한다면 마찬가지로 좋은 의도를 띤 행위로 보답을 받는다" 는 '기대' 와 '신뢰'에 입각해있다.

  그러한 신뢰가 호수적으로 보장될 때 공론장이(커뮤니티가)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공간이 반드시 평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 참여자 사이에서 가장 탁월한 몇몇 사람 (예를 들면 논객)(고닉)이 명성과 평판을 얻고 논의를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이라는 담론 공간에서 상호간의 평등은 역으로 타인의 선의를 불신하고 의심하는 악의에 의해 성립된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인터넷 글쓰기' 를 선도했던 논객들은 무엇보다 그러한 '악의' 에서 출발했다.

  '세 줄 요약'이 각광받는 지금에는 옛말이 되어버렸지만 인터넷이 새로운 담론 공간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에 '인터넷 글쓰기' 란 '논객의 글쓰기와 같은 것이었다.'

  논객다운 글쓰기란 공격적이고 우상 파괴적인 스타일로, 감성과 논리 그리고 정치적/학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뒤섞어가며, 상대의 허점을 명쾨하게 논파하는 글쓰기를 의미했다. 그것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 사이에서 각광받았다. 저자 역시 그러한 논객들은 동경하는 분위기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당시의 논객들은 항상 단수가 아닌 복수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 유시민은 진중권, 진중권은 다시 강준만, 그리고 지만원, 복거일과 더불어 한 묶음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 사람들은 '누구와 논쟁을 벌였는가?' 를 통해 논객들을 인지했던 것이다.

  한명의 논객이 권위를 독점하는 일은 없었다. 이는 그들 사이의 공격적인 문화 때문이었다. 여기서 '강준만'이라는 고유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95년 김대중 죽이기를 필두로 정치인과 선기, 지역감정의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시했다.

  신문의 독자란부터 사설까지 텍스트를 낱낱이 까발리는 특유의 '문헌 조사 방법'론 을 선보인것도 그였다.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을 '극우 언론'으로 규정하고 '이념적 반동성'을 지적하며 안티조선 운동을 촉발시킨 주인공도 그였다.

  "조선일보는 정치 혐오를 상품화하는 신문으로. 3류 찌라시 취급을 받아야 마땅하다" 라는 말에서 그의 글쓰기는 논리적 비판과 생리적 혐오를 뒤섞는 논객 스타일의 전형처럼 받아들여졌다.

  가장 큰 영향은 1998년 인물과 사상이 아닐까 한다. 그는 거기서 "우리에겐 오직 '싸잡아' 비판하는 문화만이 발달해 있을 뿐 좀처럼 실명이 거론되지는 않는다." 라고 말하며 '실명 비판'이라는 우상 파괴적인 방법론을 내세웠다.

  그런데 인물과 사상에 실린 진보와 보수 논객들 간에 이뤄진 논쟁을 보면 상대를 '토론의 규칙을 모르는' 혹은 '수준 이하'의 사람으로 격하시키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가 과거에 했던 발언을 '인용' 해서 상대의 모순을 지적하는 수법도 즐겨 사용했다. 물론 독자들 입장에서 그들끼리 치고받는 싸움을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인물과 사상이 구현한 이러한 '난장'은 하버마스가 규범화했던 공론장의 모델과는 다르다. 

  논쟁은 의견을 교환하는 차원을 넘어서, "나의 정의는 당신의 불의이고, 당신의 정의는 나의 불의일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강준만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답이 없다. 그냥 싸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명을 거론하고 업치락뒤치락하며 서로의 체면을 깍아내리는 논쟁에 '좋은 점' 이 있다면 역으로 논객들 사이의 '평등'과 묘한 '연대감'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난장에 진입한 이상 자신의 체면이나 공적 지위를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노정태는 글쓰기가 점차 자신의 논거를 세우기 위해 타인의 글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인용' 하는 방식에 주로 의존하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서로의 발언을 인용하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사실상 서로의 글을 부지불식간에 하이퍼텍스트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자신의 글이 예기치 못한 허점에 의해 논리 구성과 설득력이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물론 이후의 논객 자신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일관된 내적 주체성을 유지하는 데 연연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상대를 까서 명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기모순을 범해도 상관없다.' 는 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강준만 정신은 모두가 1인 미디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인터넷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다.

  실제로 인물과 사상 이후 백낙청이나 리영희와 같은 유형의 보편적 지식인이 권위를 얻는 일은 없어졌다.

  강준만은 내심 그러한 유형의 지식인이 지닌 권위를 경멸했다.

  실제로 인물과 사상에서 "같은 식구는 키워주고 식구가 아닌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식의 비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비판이 있지만 감히 그 누구도 그걸 공개적으로 발설하지는 않는다." 며 백낙청 왕국이 된 창비를 우회적으로 바판한 바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상 파괴적인 방법조차 불필요해지게 되었다. 강준만이 목적의식적으로 '위악'이라는 수단을 도입하지 않아도 인터넷은 자연스럽게 그가 지향한 일종의 '부정적인 호수성'을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인터넷 공론장의 긍정적인 측면은 예찬하면서도 '악플'을 조심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어중간한 도덕적 설교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ㅇㅂ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그 내부의 과격한 악플 문화 때문만이 아니라 인터넷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호수성을 인터넷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는 데 있다.

  오늘날 인터넷 문화는 언어의 수사적이고 상징적인 측면 내면적인 진실성보다는 언어의 논리적인 정합성과 외면적인 사실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논객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경향과도 잇닿아 있다.

  논객이 공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수행성(이념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호소력)에 있는데 그것이 인터넷에서 점점 발붙일 곳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노정태의 말대로 오늘날 네티즌은 모두가 마치 아마추어 논리실증주의자들 처럼 행동하고는 하는데 이는 ㅇㅂ의 등장 이후 더 두드러지게 된 현상이다.

  ㅇㅂ 유저들은 커뮤니티 '바깥' 에서 논쟁할 때 흔히 회의론적인 상대주의자의 입장을 취한다. 물론 이러한 회의주의적인 태도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만ㅡ 가령 자신이 해야 할 사실 검증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든지, 자신은 신념을 말하면서 타인이 신념을 밝히는 걸 가로막는다든지'ㅡ 등이다.

  ㅇㅂ 유저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검증을 초월한 이념과 이상이 사람들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겠다는 결의에 가깝다. 하지만 어찌 보면 '몰이상' 역시 이념적이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야말로 어떤 이상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속아서는 안된다 감성적인 이상주의에 또 한번 휘둘리느니 철저하게 몰이상성을 유지하겠다라는 것이 ㅇㅂ의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위악적이고 공격적인 행태는 그들의 몰이상, 아니 몰이상의 이상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5. ㅇㅂ는 미학 공동체


   ㅇㅂ는 이러한 인터넷 미학을 더욱 극단화시킨다. 낭만주의자들이 '나는 내가 생각하는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실을 미리 반성적으로 고려하는 미학적 자의식을 출현시켰다면 ㅇㅂ의 미학은 '나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방식대로 인터넷에서 행동하지 않는다.' 라는 방식을 역설적으로 주조해낸다.

  ㅇㅂ 유저들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터넷의 나'가 사회적 예의범절에 통합된 '현실의 자아'와 다르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여성에 대한 혐오발언을 늘어놓으면서 여성에 대한 소개팅한 사실을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 예다. 

  '인생은 실전이야 X만아는' 인터넷에서 제아무리 방약무인하게 행동해도, 결국 현실의 사정은 다르다. 자신만의 실력을 가지고 그러한 자기 자신을 위에서 냉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미학은 저속한 일상과 일상으로부터 자립한 이상 사이의 구분을 철폐하고 그 둘을 끊임없이 연결시키는 '운동' 이다. 

  이러한 미학적 기획이이야말로 '몰이상의 이상'을 고수하는 독특한 형태의 '자율적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학적 공동체는 어떤 목적을 향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무목적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의 관건은 다른 곳에서라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데 있다.

  ㅇㅂ에도 그리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사상은 앞서 말한 의미에서 미학적이다. 그들 특유의 병맛 문화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의미에서 ㅇㅂ의 사상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다.

  그들의 논쟁은 항상 불모로 끝나는데 그들의 정치적 이상 자체가 몰이상적인 형태로 추락해 있고. 또한 역으로 그런한 몰이상이 자율적인 공동의 이상으로 '육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ㅇㅂ 유저에게 '그렇다면 너의 이상은 무엇이냐?' 라고 물어도 명확한 대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논쟁을 해봤자. 상대는 당신의 이상을 반박하기 보다는 당신의 지역 출신, 과거의 발언과 행적, 정치적 발언을 시비조로 해석하고 거기서 웃음거리를 찾아 내려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어긋남 속에서도 ㅇㅂ 유저들은 묘하게 달뜬 분위기 속에서 상대와 '정치적 이상'을 둘러싼 시비와 논쟁을 지속하려 할 것이다.

  진보 좌파들이 '너도 나도 같은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 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상호적이고 평등한 인정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려 한다면 ㅇㅂ 정 반대로 '너도 나도 병신이다' 는 상호인정에서 시작한다.

  한편으로 ㅇㅂ의 '이상'과는 다른 '이상주의' 에 기초해서 현실의 국가와 사회를 넘어서겠다는 의지야 말로 ㅇㅂ 유저들이 궁극적으로 경멸하는 대상이다.


  6. 개인 감상 


  현실 정치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발췌독했다. 8년이 지난 지금 ㅇㅂ가 남긴 유산은 '유입'을 늘어나게 만드는 '평등'의 상호인정 문화에 있다. ㅇㅂ는 혐오받았지만. 이들의 포섭방식과 문화 거창하게 말해 헤게모니는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극단에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다수 취미 커뮤니티의 마니아들은 한국 내에서의 활동을 줄이고. 외국 커뮤니티에 정착하거나 눈팅하는 방식으로 변한듯 하다.

  책을 읽고 좋든 싫든 ㅇㅂ가 사용한 '위악'과 전략 전술을 모든 커뮤니티에 사용했다는 것을 깨닳았다. 사실 ㅇㅂ 문화가 아니라 디시 문화같다는 생각도 든다. 

  정치적인 지점이나 ㅇㅂ에 대한 이야기로 보기 보다는 요즘 주류화된 인터넷 문화의 한 갈래의 분석을 본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이 그렇듯이.  대다수 아는 내용이거나 어렴풋이 느끼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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