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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 독후감대회 참여글입니다.

글자제한을 초과하여 부득이하게 2개로 나눠서 올림.


읽은 책 : 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이주희, EBS MEDIA)

 

이 책은 EBS 다큐프라임을 통해 방송된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이 약소국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그간 기적적인 발전을 이루어 냈지만 저는 아직도 철저한 약자의 입장이라고 봅니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외교적인 위기들이 숱하게 찾아옵니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 하는 일이 우리에겐 위기가 됩니다. 어느 독재 국가의 지도자의 정신상태가 어떠한지에 따라서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한 위기는 지금만 있었게 아니었을겁니다. 100년전에도 1000년 전에도 있었을테고 그들이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는지 배우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란 그저 옛날 일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역사 속에 살아 숨쉬고 있지 않습니까?

 

이 책은 먼저 신라에게 배울 점을 찾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신라는 7세기 초강대국 당나라와 전쟁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국토를 지켜냅니다. 생각해보면 새삼 놀랍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삼국시대를 배우던 때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구려가 통일을 했으면 좋았을텐데 왜 하필 신라가 통일을 한거지?’ 라고 말이죠. 당시의 저는 어리석게도 신라가 통수와 운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2022년이 된 지금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러시아가 간단하게 우크라이나를 제압해버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죠. 우크라이나가 굳건히 버텨내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군사력을 따져보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도무지 미스테리입니다. 어쩌면 약소국의 역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시는대로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치게 됩니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 사비성에서 있었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신라군과 당군이 처음 합류했던 사비성에서 총사령관인 소정방이 신라군 선봉장이었던 김문영을 참수하라고 명령합니다. 합류하기로 약속한 날짜보다 신라군이 하루 늦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러한 조치에는 당나라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김문영이 소정방의 명령으로 참수형에 처해지면 신라군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당군이 가지게 되는겁니다. 자연스럽게 신라군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권을 소정방이 가지게 되는 것이죠. 김유신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만약 소정방이 김문영 처형을 강행한다면 백제군과 싸우기 전에 당군과 먼저 싸우겠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전시작전권이 완전히 당군에게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군과의 전투도 불사하겠다는 강수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결국 소정방은 김유신의 서슬에 굴복합니다. 이 일화는 현재 한미군사동맹의 전시작전권 이양 문제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믿겨지시나요? 현재 대한민국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신라가 해낸 것입니다.

 

학생이던 시절은 물론 지금까지도 제가 믿기 힘든 것은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중 최약체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였습니다.

 

신라가 승리하게 된 경위를 따라가보자면 그 시작은 사죄사파견입니다. 말 그대로 잘못을 빌러 온 사신이라는 뜻으로, 문무왕의 서한을 보면 저희의 죄를 고하나이다로 시작하는 그야말로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던진 눈물 나는 굴욕의 외교였습니다. 단지 입으로만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았던 당의 병사들과 금, , 포목, 우황 등 엄청난 양의 뇌물도 바쳤습니다. 당은 신라의 사죄를 받아들였고 가까스로 휴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죄사는 여러번 파견 되었는데 그 중 6695월 파견되는 사죄사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6699월에 티베트고원에 자리 잡은 토번이 당나라 영토인 천산산맥 남쪽을 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나라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토번의 군사행동을 그대로 두면 실크로드가 단절됩니다. 그러므로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겁니다. 신라는 그 정보를 토대로 지금이 당나라를 공격할 적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당은 670년이 되자마자 설인귀의 요동 주둔군을 토번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전쟁 초반의 기선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675년에 칠중선 전투를 패배한 신라는 다시 사죄사를 보내 전력을 재정비한 끝에 매소성 전투를 통해 나당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로 보여지겠지만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가장 적절한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상황은 현대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중국의 압박과 사드배치의 문제, 우리나라에게 불리한 한미FTA 조약 등을 보며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바보같이 양보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교를 대중들은 단지 불쾌하다는 감정만을 앞세워 정부를 쉽게 비난합니다. 강대국을 맞서야하는 우리의 상황을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굴욕적이고 저자세라고 생각되어도 훗날 돌이켜보면 아주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평가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현재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냉정한 눈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EBS다큐팀이 다음으로 주목한 시기는 고려시대입니다. 현종 이후 한 세기 동안 고려는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누립니다. 고려는 분명 거란이라는 떠오르는 강대국과 전면전을 치렀던 역사가 있습니다. 고려가 신라나 조선보다 압도적인 국력을 가졌던 걸까요? 아닙니다. 비슷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손녕의 1차 침입 때 첫 전투에서 패배한 고려 조정은 놀랍게도 항복을 논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대책 회의에서 논의하던 내용은 그냥 항복할 것인가 영토를 떼어주고 항복할 것인가 였습니다. 어이없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학자들은 고려는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을 맞았고 첫 전투에서 주력군을 대부분 소비했기에 고려 조정은 패닉상태였을 거라고 말합니다. 절령 이북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고려 조정은 서경에 비축해 놓은 군량미를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등 스스로 망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보충부대를 이끌고 북상하다가 되돌아온 후 뒤늦게 참석한 서희가 항복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전선에서 돌아온 그는 거란군이 자신들만큼이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분석했습니다.

우선 거란군의 침입 경로 자체가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거란과 직접 영토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 후 여진족의 영토를 통과해서 고려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따라서 거란군이 고려와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은 배후에 여진이라는 잠재적인 적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적과 싸운다는 것입니다. 첫 전투 이후 거란군의 움직임도 이상했습니다. 봉산성에서 고려군을 대파했음에도 남하하지 않고 두 달이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기동성이 강점인 유목민족 부대가 이렇게까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거란군은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하고 쳐들어 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병력도 생각보다 적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번 세게 나가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서희의 결론이었습니다. 서희의 끈질긴 설득으로 고려 조정은 강화 협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고려사>에서는 당시 협상 회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다. 어찌 너희가 함부로 차지하려 하는가?”

 

그렇지 않소. 우리 고려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중략) 어찌 우리가 침범했다 말을 하시오?”

 

서희의 담판에 대한 역사 서술에는 명분싸움에서 이겨 강동 6주를 얻어냈다는 식으로 평가하지만 그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거란은 당시 송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혹시 모를 여진과 고려의 협공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서희는 고려와 거란이 협공하여 여진 치자고 제안하며 평화협정이 이루어지고 강동 6주에 대한 권리까지도 얻어내는 기막힌 반전을 이루어 냅니다. 소손녕은 무려 7일동안 잔치를 베풀고 서희에게 선물을 잔뜩 안겨줍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낙타 10마리, 100,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거란의 1차 침입이 끝이 납니다.

 

프랑스의 근대외교를 창시한 깔리에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외교는 현란한 입이 아니고 정확한 눈이다.” 서희는 절대 세 치의 혀로 말을 잘해서 담판에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통찰로 상대의 의중을 날카롭게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영원한게 있을까요? 영원할 것 같던 패권국도 언제가 왕관을 내려놓아야 할 시기가 반드시 오기 마련입니다. 세계사에서 패권교체기는 숱하게 일어났습니다. 강대국끼리 패권다툼은 그렇다 쳐도, 고래 싸움에 낀 새우는 어떡해야할까요? 이번엔 병자호란으로 거슬러갑니다.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절 명에게 참전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아실겁니다. 보통 광해군을 높이 평가할 때 중립외교를 칭찬하고는 하죠. 하지만 그건 중립을 지키려는 시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161921, 강홍립을 도원수로 조총병 5천명을 포함한 1만의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명과 후금의 전쟁에 참전합니다.

 

누르하치 토벌에 임하는 양호의 작전은 일종의 포위 섬멸전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병력을 기반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동시에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공격해 함락시킨다는 작전이었죠. 하지만 4개의 군간이 각자 진군 속도가 제각각이라 유기적인 협력전투를 벌이는데 차질을 빚었고 결국 각개격파를 당하게 됩니다.

 

두송의 군대와 누르하치의 본대가 충돌했을 때는 단 하루의 전투로 사령관 두송이 전사라고 25천의 서로군은 몰살당합니다. 다음날인 북로군도 격파당한 뒤 다음 타겟은 동로군이었습니다. 동로군에는 강홍립의 조선군이 참여하고 있었죠.

 

불과 3~4일만에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명나라는 전군 후퇴를 명령합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후퇴하지 못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군하던 유정을 뒤따르던 터라 후퇴하기도 전에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 선봉대를 만난 것입니다. 조선군은 황급히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이미 명나라의 4개 군단중 3개 군단이 전명했고 남은 군단 마저 후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구원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애꿎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와서 몰살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도 후금은 조선군을 회유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장에 종군했던 조선 장수 이민환의 책중일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거의 몰살당한 좌영의 한 군졸이 달려와 적이 좌영에 와서 거듭 역관을 찾았으나 역관이 없어 답하지 못했다라고 보고하자 강홍립이 역관 황연해를 보냈다. 적이 우리가 명과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러 왔느냐?’라고 힐문하자, 황연해가 두 나라 사이에는 원한이 없었다. 이번 출병을 부득이한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황연해가 두세 차례 왕복한 뒤 적이 다시 사람을 보내와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

 

몰살이냐 항복이냐의 갈림길에서 강홍립은 항복을 선택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죠. 그런데 이 항복에 대해서도 엉뚱한 신화가 존재합니다. 광해군이 참전하는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유리한 쪽에 붙으라는 밀지를 내렸고 이에 따라 강홍립이 후금과 연락하여 조선군을 보존하고 항복했다는 신화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말이 안됩니다. 우선 당시 조선은 중립을 고려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비록 쇠락의 기운이 있다 하더라도 300년을 이어 온 초강대국과 건국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다는 건 생각하기 힘듭니다. 또 전투에 임했던 강홍립 부대의 자세를 보아도 눈치껏 항복할 기회는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강홍립은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을 때까지 정말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런 행동의 어디에 눈치를 보고 적과 내통하는 기미가 보인다는 걸까요? 더구나 이때 포로가 된 조선의 병사들 중 돌아온 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후금군에 편입되거나 노역에 동원되다가 타향에서 죽었으니 만약 내통을 하고도 이 꼴을 당했다면 정말 어이없는 거래를 한 셈입니다. 광해군의 밀지는 없었다는 것이 상식해 부합하는 해석일겁니다.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광해군 밀지설은 오히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인조 정권의 날조로 해석됩니다. 광해군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던 인목대비가 내린 광해군 폐위교서에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평쳐지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광해군 밀지와 관련된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결국 현대의 광해군 밀지설은 인조 정권이 광해군을 음해하기 위해 사용한 유언비어를 가지고 오히려 광해군을 옹호하고 있는 셈입니다.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에서 첫 패배로 홍타이지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유목민의 경제력이란 뻔한 것이어서 반드시 농경지대를 점령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단단히 버티고 있는 영원성을 잠시 뒤로하고 조선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였는데 인조 정권은 후금과 교섭을 담당하던 박엽, 정준 등의 관료들을 처형시켜버리는 대악수를 둡니다. 여기서 교섭이란 외교적인 것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대비도 포함됩니다. 이들이 처형되자 후금에 대한 경험과 정보가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북면 방어 태세는 이완되기 시작했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서북면의 방어태세는 더욱 약화됩니다. 이괄의 휘하 부대였던 서북면의 병사들과 장수들이 다수 희생된 점이 향후 후금과의 대결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16271월 홍차이지는 조선을 침략했고 이것이 정묘호란입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서북면의 방어능력으로 후금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3일만에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은 열흘 만에 안주와 평양을 함락시키고 황해도로 진출합니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진출하던 후금군은 잠시 진군을 멈추고 평안 감사인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강화협상을 제의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조선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약탈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후금의 강화조건도 당시 전황을 고려하면 매우 온건한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후금과 화친하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동생이 되는 형식을 취하자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인조는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조선은 평화를 되찾습니다. 홍타이지는 당분간 조선 문제에 손을 떼고 진정한 강적들인 명나라와 몽골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러던 와중 기가막힌 사건이 발생합니다.

 

공유덕과 경중명의 반란 사건이 그것인데 그들은 본디 모문룡의 부하장수들이었습니다. 군량이나 착복하고 전투를 회피한 채 변명이나 늘어 놓는 것이 재주의 전부인 자들이었죠. 1631,이들은 후금이 요서지방의 대릉하성을 공격하자 구원군으로 차출됩니다. 이들은 무시무시한 후금군과 싸우기 싫어 역풍이 분다는 핑계를 대며 빠른 해로를 포기하고 느린 육로를 통해 대릉하성으로 가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육로로 이동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군량이 떨어지자 이들은 도적떼로 변했고 뒷감당을 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반란군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어이없이 시작된 반란은 명나라 조정이 토벌에 나서자 금방 수세에 몰립니다. 그런데 공유덕은 궁지에 몰리자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자신의 수군을 이용해 바다로 탈출을 감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때 홍타이지의 관료 범문정이 찾아와 후금으로 귀순할 것을 권유합니다.

 

공유덕이 후금으로 방향을 돌린 사실이 알려지자 명나라 조정은 그냐말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명나라 최대 수군 중 하나를 후금에 그대로 갖다 바치게 생긴 겁니다. 후금에게 수군이 생기게 되면 육로에서의 철옹성이던 산해관을 우회할 수 있습니다. 압록강을 타고 천진이나 산동성의 등주 쪽을 상륙해 북경을 공략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