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하다. 세상은 온갖 대립항들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대립항들 중 하나를 붕괴시키거나 다른 하나를 떠 받듦으로써 구원받으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언제나 비논리적이다(카뮈는 이를 도약한다고 표현한다). 모든 판단의 저울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추측이며 받들어지는 것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종교는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발명품이다. 철학과 종교가 다른 점은 철학은 의심의 끝에 믿음에 이르는 것이고 종교는 처음부터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뒷받침할 정보들을 선별한다는 활동이다. 물론 이 둘은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게 아니다. 철학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종교적이고 종교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철학적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점은 철학자들이 논리와 의심에서 출발해서 결국은 종교적 도약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도약이란 부정할 수 없다고 해서 참이라고 추측하는 것을 말한다.
혹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건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섣부른 결론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뮈는 부조리를 가지고 철학하기보다 그저 명확히 존재하는 부조리를 관찰했다고 하는 게 맞다. 카뮈는 그의 저서 「시시포스 신화」에서 진리를 찾기보다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둔다. 세상이 그렇게 부조리하다면 그 부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가? 우리가 평생토록 노력해 무엇을 이뤄도 결국에는 죽을 것인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쌓아 올리고 무너지고 다시 쌓아 올리는 짓들을 반복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으니 결국에는 자살만이 답이 아닌가? 이것이 카뮈가 한 질문이다.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를 예로 들며 부조리를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에게, 어떤 가치를 확고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할 수 없는 자에게는 부조리의 대립항 중 한쪽을 믿거나 다른 한쪽을 부수는 건 불가능 하다. 의심하는 자에게는 부조리는 삶 그 자체이며 그에겐 가치판단이란 불가능하기에 경험의 질은 논할 수 없다. 그러니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니라 많은 경험만이 있을 것이며 많은 부조리를 경험해야 한다고 카뮈는 말한다.
삶을 많은 경험으로 채운다고 해서 무엇이 되는가? 어차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한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카뮈는 말한다. 그가 명시적으로 어떤 것을 아름답다 혹은 진정 가치 있다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부조리를 많이 겪을수록 삶은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자살할 필요는 없다는 삼단논법을 펼친다. 만약 누군가 자살을 택한다면 그는 부조리의 항 중 한쪽을 붕괴시키는 셈이므로 섣부른 사람들(또는 의심에 지친 사람들)처럼 순진한 믿음을 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즉 카뮈가 한 주장의 가장 근본에는 ‘부조리를 깨서는 안 된다‘ 혹은 ’부조리를 깰 수는 없다‘ 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카뮈 또한 순진한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정말로 카뮈가 말한 대로 부조리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자살을 피할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살한 후엔 타살 혹은 자연적으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가 부조리 자체, 허무주의 자체에서 생긴다고 본다.
허무주의자들은 사람이 죽은 이후에 살아있던 동안에 이룬 모든 것들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이제는 굳이 영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인간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정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육체야말로 인간 정신의 근원이며 정신이 육체를 초월할 수 있는(혹은 초월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일부분이 정신임은 더 이상 논란 거리도 아니다.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건 전적으로 육체가 하는 일이며 육체가 없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실제로 뇌의 일부를 제거하거나 변형했을 때 인간이 완전히 변한 일은 과거에 많이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물리적인 변형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호르몬을 주입하는 것 만으로도 우울한 사람을 열광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봤을 때 인간은 정교한 생물학적 기계이거나 그것에 가깝다. 거북이가 독수리에게 죽임을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듯이 인간도 마찬가지다.
허무주의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관찰한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저울 삼기 시작했다. 사는 동안 온갖 물질을 소유하고 가치를 신봉해왔다 한들 죽은 후에 그것들을 인식할 수 없으므로 허무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TV프로그램 보듯이 상상해볼 수 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반추해보면 그 사람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쭉 펼쳐질 것이다. 그러고선 그 사람의 삶이 결국 죽음으로 끝났으므로 허무주의자들은 그의 삶이 허무하다고 말하며 그와 같이 우리들의 삶도 허무할 것이라 말한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결론이다. 죽음을 저울로 놓고 세상의 온갖 것들을 비교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에 가까이 붙어서 매 순간을 인식하고 사는 게 아니라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한 사람의 삶을 그려보고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상 속 인물의 삶을 다 봤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 자신의 삶은 아직 다 보지 못했다. 우리가 우리 삶을 바라보기에 상상 속 어떤 인물을 보는 것처럼 하려거든 인생을 한 번 다 살고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 영혼이 떠돌아다니며 지나간 삶을 돌이켜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육체, 즉 뇌를 통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에 대해 논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과학적 사실과 실제 주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죽음을 맞이하는 걸 관찰하는 것과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들을 통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들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그러나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게는 삶은 현재진행중이다. 현재진행중인 사람은 물론 죽음을 맞이할 것이지만 마치 죽음을 미리 경험한 양 이것저것 가져다가 죽음에 견줘 ‘역시 삶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살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삶을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초원을 거니는 한 마리 사자가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도 살아가듯이 나도 조금은 고민을 덜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고민한 끝에 행복이 어떤 조건을 갖췄을 때 나타나며 어떤 효과가 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정보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닌 것처럼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같은 건 아닐까. 오히려 삶에 대해 고민할 수록 실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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