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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나치”라는 말이 들어간 책을 서점에서 찾으면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수기, 히틀러 및 나치 고관들의 개인적 생애, 나치즘에 대한 철학적 혹은 정치학적 분석 등, 어찌됐던 실존한 나치당과 그 후속 운동을 다룬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라면..

아마도 2차대전 종전 이후 남아메리카에 거처를 찾은 나치 전범들에 대한 책일까요? 그것은 아니고, 나치즘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는 ‘아메리카 작가’들에 대한 열전 정도라고 볼 수 있겠네요. 목차부터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각 챕터는 해당 작가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실제 나치와 관련된 서술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한다 해도 ‘작가’들이 어렸을 때 히틀러와 만난 적이 있다, 그 놈은 히틀러주의의 상징물을 자랑스럽게 내거는 놈이었다, 이 정도의 수준입니다. 그마저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제 나치가 표방한 이념과는 상관 없는 삶을 사는, 나치의 이미지만을 표방하는 가짜 나치에 불과합니다.

이 책의 ‘작가’들은 가짜 나치일 뿐만 아니라 가짜 작가이기도 합니다. 맨 처음 소개되는 에델미라 톰슨 데 멘델루세부터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까지, 책에 나오는 모든 작가들의 생애 그리고 그들이 써낸 작품들, 책의 내용과 연도까지도 전부 한 사람이 지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백과사전이 아니라 문학전집의 일부분으로 나왔을 때부터 눈치채실 분들은 눈치를 챘겠지만요.)

설령 실재하는 작가였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만 휘갈겨 내는 무명작가이거나, 작가보다는 훌리건이나 범죄자같은 이름으로 더 유명할 사람들만 등재되어 있습니다. 몇 명은 낮은 저명도 때문에 스페인어 위키피디아에도 올라가지 못할 테죠. 그렇다면 가짜 전기를, 그것도 실존하지도 않는 수십명의 ‘나치 아메리카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쓴 로베르토 볼라뇨는 상상에만 의존해서 가짜 작가들의 열전을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책 속에는 기본 테마가 되는 나치즘뿐만 아니라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아르헨티나 축구의 훌리거니즘, 귀족들처럼 가만히 앉아서 별볼일 없는 평전이나 쓰는 지주들, 나치 의용병으로 참가한 작가를 추모하는 극우 단체 등 ‘실제 당시 라틴아메리카에 존재했을 수 있을 법한’ 일이 들어가 있습니다.

볼라뇨는 사실적인 필치로 이를 기록하기 위해 가짜 작가뿐만 아니라 가짜 주변인물, 가짜 출판사, 가짜 단체, 가짜 작가가 쓴 가짜 책까지 동원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환상과 사실의 경계선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 치밀함 덕분일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라틴아메리카가 겪어온 험난한 역사적 여정과 그 과정에서 생겨난 유사 파시즘, 앵글로아메리카 및 유럽 지역으로의 경제적 이민, 훌리거니즘으로 분출되는 일상의 폭력 등 모든 ‘사실’들이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다소 따분할 수도 있을법한 허구 작가들의 이름과 행적의 나열에도 책을 덮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이유도 허구 사이에 철저한 ‘사실’을 집어넣었기 때문이 아닐지?

이 작품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모든 라틴아메리카인(그리고 어쩌면 모든 인류)의 삶을 ‘유사 파시즘 문학가’라는 한 인간의 부류로 묶어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게 진짜 재미있는 책이 맞냐고 물어보면 솔직히 아니라고 하겠습니다만, 읽다가 가끔 씁쓸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작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