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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의 <유예>를 읽고


오상원의 <유예>는 한국전쟁의 참담함을 개인의 실존으로 기록한 기념비적인 소설로 한국 실존주의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소설이다.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그’의 총살이 한 시간 유예된 시점의 심리 상태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서술하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실존에 대한 자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유예>는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본다. 인터넷 검색 한 번으로 전문을 구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기법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지금 봐도 탁월한 현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직후 쓰인 소설이지만 전쟁 당시의 공간과 배경, 인물과 사건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목소리에 주목하여 전쟁이 아니라 질병의 한복판에 있는 현재 판데믹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와닿는 느낌이 있다. 또한 한국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휴전’의 상황이기에 당장 군사 접경 지역인 파주에만 가도 나는 이 소설이 떠오른다. 비단 한국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내전, 중동의 전쟁 등 여전히 수많은 전쟁을 치루고 있는 현대에서 오상원의 <유예>는 실존하는 인간의 심리를 처절하고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의가 유효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고 의식과 아득한 기억이 혼재하며 남과 북의 공간이 혼재하며 적군과 아군이 혼재하고 질문과 대답이 혼재하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 총살을 한 시간 앞둔 ‘그’의 독백은 매우 현재現在적이다. 과거의 기억조차 현재와 매우 긴밀하게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현재를 보는 듯하다. 포로로 잡힌 아군을 구하기 위해 총살하는 인민군을 쏘아 버리고 도리어 자신도 포로가 되어 총살을 앞둔다는 단순한 설정이지만 그 단순한 타인과 나의 죽음에 대한 교차, 타인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죽음, 이 죽음에 분투하는 의식이 이처럼 아름답게 샘솟는 소설을 나는 많이 알지 못한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에서 “너는 실존주의에 빠져있어”라는 대사가 현실에서 도피한 이상주의자들을 조롱하는 밈meme으로 쓰이고 있지만 내게 실존주의란, 언제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화두였다. 내게 실존주의란 쓸모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존재하는 나, 잉여처럼 멍하게 앉아 있는 의식의 덩어리, 이런 의식을 의식하는 어떤 예리하고 활발한 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언제나 ‘현재’를 의미한다. 이제는 화석이 되어버린 실존주의를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내가 까뮈나 샤르트르나 장용학이나 오상원의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늘 지금 이유도 없이 ‘존재’하는 의식의 활동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와 도구와는 다른 것이오. 내 이상 더 무엇을 말하고 싶겠소? 나는 포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확실히 호흡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나는 기쁘오. 내가 한 개의 기계나 도구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으로서 살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죽어 간다는 것, 이것이 한없이 기쁠 뿐입니다.”


의식이 표표히 떠돈다. qwerty가 아닌 독수리 타법으로 지금, 나는 기록한다. 의식을 담은 그릇은 내 의지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던져지듯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의식을 담은 그릇 속에서 나는, 나를, 의식하면서 나와 타인의 경계를 내 의식 속에서 섞어버리면서 시간, 시간조차 아득한 어떤 절대적인 공간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그 라디오 잡음 같은 소리에 집중한다. 지지직,...일 초, 십 초, 한 시간... 두 시간, 가끔은 그렇게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잠이 든다. 죽음 같은 잠을 잔다. 깨어 있을 때는 의식 속에서 현재를 생각한다. 내몰린 사람들, 내몰린 기분이 드는 사람들, 사람들 속의 나, 사실은 사람들이 아닌 ‘나’는 언제나 전쟁통인 현재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