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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지만, 확실히 지금의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싸구려(크랩)' 이전의 삶을 상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물건이든, 무언가 살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지 않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 한두 개를 산다고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충분히 많이. 하다못해, 목 부분이 늘어난 티셔츠를 가볍게 버리는 것조차 사실 과거에는(그리고 어쩌면 미래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다. (어쩌면 현재도.)


크랩은 실제 물질과 더불어 그 물질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과 관련한 개념에 가깝다. 대체로 대량생산되고, 값이 싸고, 질이 낮지만 꼭 그런 것만 포함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이런 물질적인 특성들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들은 크랩이 아닐 수 있다. 소유자에 의해 남용되지 않고, 나름대로 소중한 물건으로 받아들여져 꾸준히 잘 사용하거나 애착이 있는 물건(유품이라거나)으로 남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탈-크랩화 되지 않은 모든 크랩들은, 확실히 일회용 쓰레기에 가깝다.


예전에 <판타지랜드> 같은 책을 읽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 책의 저자도 크랩의 시작과 발달을 이야기하며 애초에 미국인들은 유독 새로운 것과 놀라운 것에 환장하던 사람들이라 말한다. (국민성 이야기를 할 때면 외부인으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지만, 뭐, 자기들이 그렇다는데 그렇다는 게 아니겠나?) 마침 넘쳐나는 자원과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기술 발전 덕에 그 기질이 양성 피드백을 거치며 매우 빠르게 크랩들이 양산되었고, 마치 그레샴의 법칙처럼 악품이 양품을 구축했다.


긍정적인 부분으로는 이 크랩들 덕에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가 민주화되며, 중산층이라는 계층이 비로소 시장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개인들의 취향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만족시킬 수 있게 되며 문화적 발전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들이 있다. 허나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정말 미국 같은 부유한 나라에서만의 배부른 소리에 가깝고, 실제로는 세상의 자원과 노동을 헐값으로 착취하는 과정을 저 머나먼 거리로 돌림으로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고 이 헐값의 크랩들로 기존의 양품들의 가격 및 가치까지 갉아먹으며 결국 이 '민주화'된 시장에서조차 착취의 굴레가 돌아왔다.


이런 크랩들은 당연히 물건 자체로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에, 물건 위에 덮어 씌우는 일종의 서사가 필요했다. 세일즈맨이 물건을 꺼내며 길게 늘어놓는 신비한 내력부터 시작해서, 균일가 상점의 수상쩍을 정도로 싸지만 순식간에 동이 날 예정이라 빨리 와서 사야 하는 물건들에 대한 전단지, 그리고 TV 광고까지. 당연하게도 크랩의 발전은 마케팅의 발전과 발을 맞췄다. 이런 마케팅 측면은 꼭 저가 크랩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보다 부유한 사람들 역시 불필요하고 출신지가 불분명하지만 신비롭게 이국적이거나 복고적인 각종 크랩에 눈이 돌아갔다. 이 시점에서 크랩은 이미 온 사회에 통용되고 있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수집을 위해 만들어진 크랩이다. 이것들은 '한정적'으로 '대량생산'되었으며,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과시함으로서 구매자들에게 이후 '판매할 때의 값'을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이러나 저러나 이런 부류의 크랩들은 그래도 수십 년 동안 꽤나 흥하여 상당한 고가로 팔려나가기도 했지만, 거품은 너무나 빠르게 꺼졌다. 제조 회사의 자의적인 생산 중단 및 퇴출을 통한 가격대 형성은 내재적 가치를 따지기에는 너무나 가볍고도 무가치했다.


이 부분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현대의 TCG와 이 수집용 크랩 사이에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리처드 가필드는 이 수집용 크랩의 무의미함과 아이러니를 살려 아무리 게임을 위해서라지만 사람들이 제작 회사의 자의적인 발매만으로 가치가 극심하게 결정되는 카드 게임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게임을 만들었고, 이 <매직 더 개더링>은 반대로 사람들의 엄청난 호응과 함께 TCG 게임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심지어 더욱 더 회사의 자의적인 판단 및 퇴출에 좌우하는 금지 제한 및 재록으로 인해 '카드'의 가격은 버블 투자 상품 마냥 엄청난 폭의 변동을 겪는다. 그리고 이는 TCG 게임들의 표준이 되었다. (방치형 게임과 같은 씁쓸하면서도 아이러니한 일화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마무리도 이로 하자면, 저자는 우리가 이 크랩들을 싼 값에 사며 지불한 대가가 과연 어떤 것일지 한 번 생각해보자며 자원 및 노동 착취, 그리고 쓰레기 문제 같은 직접적인 문제와 그보다는 훨씬 더 미묘한 포스트-크랩 시대의 사회적인 변화를 논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현재 게임 업계도(게임이라는 컨텐츠 자체가 시작부터 크랩과 꽤나 맞닿아 있었다는 점을 제한다면) 사실상 포스트-크랩의 시대를 살고 있고, 우리는 수많은 싼값의 미완성 게임들, 계속해서 돈을 불확실한 액수로 쏟아부어야 하는 게임들을 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라면 그 가치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