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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많은 것은 부드러워졌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진심으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는 사라졌고, 목숨을 걸기보다는 목숨을 유지함 그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는 시대다. 더욱이 종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런데, 그런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애초에 기독교 전통이 상당히 짧은 나라의 무신론자로서, 내가 이 책을 읽는 데에는 사실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저자 본인이 책 전체에서 말하듯이 믿음은 그런 이성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도 없고, 오성의 싼 값에 후려칠 수도 없는 무언가 훨씬 중요하면서도 불안한 것이니까.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최초의 예시로 늘 언급되는 아브라함의 일화를 지적하며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섬기는 믿음이라는 말이 경전 속의 실제 믿음과 얼마나 괴리되는 것인지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하나의 정전으로서 섬기고 있는 만큼, 우리는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의 예시를 무시하고 윤리적이고 근대적인 신앙을 논하거나, 아니면, 아브라함의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역설을 확실하게 마주해야만 한다고.
아브라함은 분명히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다. 독실한 신앙으로 제 가장 사랑하는 자식까지도 서스럼없이 바치려 한 인물이다. 하느님은 물론 그가 정말로 자식을 바치게까지 하지는 않았고, 그의 자식 이삭과 함께 다시 돌아가도록 하였다. 목사의 설교는 적당히 이 정도의 선에서 끝난다. 하지만 이런 설교는 그 일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일어났을지를 너무나 간과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까지 걸렸던 그 시간과 여정 속에서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렸고, 내려야만 했는지.
이것은 누구에게도 공감 받을 수 없는 개인적인 행동이다. 그 어떤 윤리 체계도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 영웅들의 이야기에서도 한 나라를 위해 대가로 아들을 바쳐야만 하는 비극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이 그저 신앙을 위해 아들을 바친다는 행위를 설명할 길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설명하려고 든다면 오히려 그는 보편적으로 그의 상태를 서술하는 말에 붙잡히게 된다. 분명히 부도덕한 유혹에 사로잡힌 것에 분명하다고. 이것은 신앙이니 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기에 신앙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실상 단언하고 있다.
약간 아이러니한 것은 성경에 대한 연구가 점차 진행되면서 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자 한 행위가, 사실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주변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만한 행위였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구태여 이에 대한 이유를 변명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오히려 어째서 자식을 바치지 않고 돌아왔는지 주변에서 의아해 했을 것이며, 이 일화의 '의미'는 당대에 만연했던 장자 희생의 의식을 멈추기 위함이라는 것이라고. 이를 감안하면 사실 신앙은 키에르케고르가 생각한 것처럼 늘 불안에 떨며 자신을 '부조리' 이외에는 보호해주지 못할 절벽으로 몸을 던지는 행위는 아닐지도 모른다.
허나 그럼에도 키에르케고르의 이 무시무시한 결론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무신론자인 나에게까지 이렇게 닿았다. 그의 주장에는 덧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반드시 꺾이기 위해서 살아가면서도 그 꺾임을 원하지는 않고 오히려 꺾이지 않기를 계속해서 바라며 살아가는 삶. 신경쇠약과 불안으로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긍정하며 오히려 자신을 단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늘 고삐를 붙잡고 있는 삶. 그 고삐를 붙잡고 있는 것이 꼭 기독교의 신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https://m.seoul.co.kr/news/newsView.php?cp=seoul&id=20060512027003
모든 것이 너무도 명백하게 무너지고 있음이 분명할 때,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믿음이지
번역이 외국어 읽는 느낌이알서 읽다 놨음
마침 이거 관련해서 쓰고 있었는데 감상을 보니 반갑네요
아니 왜 쇠렌이 아니고 쇠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