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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직업작가' 의 단편집에 상처받고 돌아와 또 다른 K문학 김혜진의 단편집을 도서관에서 찾았다.
물론 '중앙역에서'도 있었지만 아직은 읽을 때가 아니다.....
그리고 본인은 다시 울었다. 그래, 이런게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문학이지.
솔직히 글 잘 쓰는 편은 아니었다. 아직 작가로서의 능력이 다듬어지지 못한 초기 작품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른 '사회적 약자' 묘사에서 탈피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는 성공했다.
김헤진의 소설이 다른 소설가들과 다른 점은 '특징 속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 속의 특징'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그녀의 등단작은 치킨 런의 주인공은 치킨집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요즘은 있을 수가 없다. 배달의 게르만족같은 놈들이 다 헤쳐먹었다.)
통상적인, 그러니까 SF를 좋아하는 저널리즘 작가라면 어떨까? 그의 하루 소득과 치킨집 풍경 그리고 그가 하룻동안 겪었던 일을 이야기 할 것이다.
하지만 김혜진은 그딴거 집어치우고 집 안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살해야만 하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한다. 없을 법한데 왠지 그럴법한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어떠한 인간을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화하고픈 욕망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대화의 실패다. 관찰자는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기묘한 중심인물을 이해하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그것이 가능할려면 그 사람과의 동질성이 있어야하지만 단편 소설에서 그런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빨랑 마감하고 넘겨야지....
이런 슬픔을 겪고서 화자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 사람의 직업과 성격만을 살펴보는 '어린 왕자'의 세계로.
그럼에도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 하나, 하나. 무한한 작성의 반복을 통해서 세상이 바라봐주지 않았던, 그리고 자신이 바라보고픈 그 사람의 마음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루키가 이렇게 말했다 카더라.
"엣헴, 나님은 벽에 알이 깨질 때 알의 편에 설꺼예요."
그럴듯해보이지만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자신은 알이 깨질때 껍질 하나, 흰자 한 방울 튀지 않는 위치에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킹혜진은 아니다. 깨지는 알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이미 부숴져버려 흔적조차 남지 않는 알에게로 달려가 왜 이렇게 되었냐,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어주었냐 물어봐주는 사람이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 있다면.... 아직 겉절이들에게도 희망은 있는 것이야..........
김혜진 좋아 <중앙역> 띵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