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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개인적인 기억인가, 역사적인 기록인가? 나는 치열한 고민 끝에 전자를 택했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블라덱의 개인적인 기억에서 시작되어 나치의 전쟁범죄인 홀로코스트를 다루면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변한다. 그러나 아티와 블라덱,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위치한 아냐의 가족사로부터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끄집어내어진다는 점에서 이 만화는 끝내 개인적인 작품으로 되돌아온다.
블라덱이 아티에게 들려주는 생존기는 처절하고 슬프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이 만화가 홀로코스트에서의 생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앤딩에서 블라덱은 아티에게 종전 이후 아냐와의 재회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잠에 들며 아티의 이름이 아닌 한참 전에 죽은 아들인 리슈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그 다음 컷에서 블라덱 슈피겔만과 아냐 슈피겔만의 이름이 적힌 묘비가 등장하며 위대한 만화는 끝을 맺는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 중 가장 위대한 만화’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선뜻 찬성할 수 없을 것 같다. <쥐>는 분명 위대한 만화다. 개인적인 기억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만드는 스토리부터, 칸을 활용한 혁신적인 연출까지 전부 대단하다. 하지만 이 스토리와 연출이 모두 블라덱과 아냐, 그리고 아티의 가족사를 비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너무 슬펐다.
아티는 부모님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아버지는 이기적이어서 살아남았고, 어머니는 서로 돕고 의지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이기적인 아버지와 이타적인 어머니, 그리고 어려서는 엇나갔고 나이 들어서는 기계적으로 중립을 지킨 아들이라니. 아티가 이 만화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홀로코스트의 잔혹함일까, 아니면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일까?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아티의 가족사는 홀로코스트보다 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이를 확대해석하면 <쥐>는 아티가 아냐의 자살로 인한 죄악감을 묘사한 단편 만화인 <지옥 혹성의 죄수>를 장편 만화로 개수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 만화에서 블라덱은 피해자이지만 피해자가 아니며, 가해자다. 아티는 피해자가 아니지만 피해자이며, 가해자다. 아냐는 어느 쪽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좋네요 - dc App
이런 감상문... 예술적이어서 좋아.
요즘 쥐 감상문 많네 명작추
쥐가 명작이긴 하지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