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성향과 독서의 관계에 관한 말이 나와서 말한다.
연필을 깎을 때 돌려 깎아야 균형있게 잘 깎인다.
전후좌우 편향을 두면 연필 쓰다가 심이 부러지고 만다.
어떤 이들은 왼쪽만을 무던히 깎고 어떤 이들은 오른쪽만 깎아댄다.
연필을 잘못 쥐고 잘못된 방향으로 힘을 주면 금방 부러진다.
나는 부러지고 싶지 않았다.
내 서가에는 진중권의 책과 전원책의 책이 모두 꽂혀있다.
물론 진중권과 전원책은 극단주의자들이거나 자기편의 허물을 감싸기만 하는 자들은 아니기에,
그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데, 한국식으로 나누자면 뭐 그렇다는 거다.
진중권과 전원책, 좀더 나가면 마르크스와 히틀러도 꽂혀있다.
공산당 선언과 나의 투쟁은 자신들의 동지들을 끌어모으며,
그들만의 혁명을 위한 양극단의 자기 PR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책조차도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이 동시에 꽂혀있고,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루소의 사회계약론 역시 함께 꽂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겨레에서 출간한 이완용 평전과 안중근 평전이 동시에 꽂혀있으며,
포스트모던 철학의 민낯을 까발린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와
포스트모던의 대표 철학자 리오타르의 지식인의 종언 역시 나란히 꽂혀 있다.
좌파와 우파 양극단을 오가고 중도에서 방황하며 애국자와 매국노에 이르기까지.
나는 골고루 읽었다.
나는 결국 꼴보수에서 탈피했고 멍청한 좌파가 되지도 않았다.
박정희란 우상은 일찌감치 내 손으로 쥔 망치로 부순지 오래였다.
악을 멸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히틀러의 말은 더이상의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궤변과 트로츠키가 말한 바 있던,
우선 적을 만들어라, 라는 명령에 구토감 역시 느낀다.
나는 내 우상과 기존의 가치관을 철저히 깨부수고도 여전히 망치를 들고 있다.
남의 우상은 파괴하려고 들면서 자신들의 우상은 온건히 남기려는 자들의,
그 우상마저도 철저히 남김없이 모조리 파괴하려고 여전히 망치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나는 좌와 우를 모두 아울러 그 사이에 길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절대 한쪽의 입장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독재와 가난 속에 패망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가?
공산주의의 홍역을 치루며 자본주의는 기존의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거쳤나.
자본주의는 결국 변했다. 둘 사이에서 길이 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치와 사상이라는 것은 과학과는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칼로 자르듯 정립되지 않는다. 여전히 진흙탕 속에서 싸움하는 중이다.
그럭저럭 맞춰가면서.
어느 누구도 진보라 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자신이 앞선 자라고 외칠 수 있나?
미래라도 내다본 것인가?
진보라는 단어에는 독단이 깃들어 있다.
자기만이 진리라는, 이미 결론과 전제를 깔고 들어간,
오만한 발상이다.
자신을 진보라 일컫는 자에 반대하는 자는 퇴보이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보수주의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보도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그때그때의 주어진 것들을 통해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균형감을 찾아 독서를 한다.
설령 그 책이 나를 아프게 하고 화나게 할지라도,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보여준다하더라도,
나는 진중권의 책을 읽고 이완용 평전을 읽으며 어느 정도 면역이 됐다.
그들의 주장에 처음은 격렬히 반박했으나 이내 받아들여야할 지점을 찾았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우파는 좌파의 책을 수용할 수 있나?
좌파는 우파의 책을 수용할 수 있나?
애국자는 매국노를 이해할 수 있나?
강자는 약자를, 약자는 강자를,
그것이 내 신념과 가치관에 위배된다하더라도,
그들의 논리와 입장이 분명 존재하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흰 느낄 수 있나?
이것이 나의 중립적 책 읽기.
연필을 날카롭고 부러지지 않게 깎아 예리한 필체를 살리는,
독서법이다.
이상.
연필을 버리면 되는거 아닌가
나는 만년필을 쓴다
요약 : 좌파책 우파책 균형있게 읽어라
인증이나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