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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에서는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원과 중요성, 자료 및 연구사 검토 등을 진행하고 있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반(反)역사적 흐름에 대항하여 실학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이러한 흐름은 지식인층뿐 아니라 민중에게도 영향을 미쳐, 『정감록』 등이 유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천주교는 지식인층과 민중에게 모두 신사상으로 주목받았다.
천주교사 연구의 자료로는 관찬사료와 심문 자료,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등이 폭넓게 사용될 수 있다.
이 책이 저술되기 이전의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사 연구 흐름은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문화사적 측면’과 ‘종교사적 측면’ ‘사회사상사적 측면’이 존재한다.
박종홍과 금장태 금장태,
등은 천주교 신앙이 조선 사회에 도입되면서 생긴 변화에 주목하였고, 이는 이원순도 마찬가지였으며, 최석우 역시 천주교의 조선전래와 관계를 연구하였다.
종교사적 측면에서는 최석우와 최석우,
유홍렬의 연구가 주목된다. 유홍렬,
사회사상사적 측면의 연구는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특성을 밝히고, 천주교 신앙공동체와 사회운동의 성격을 밝히는 차원의 연구이다. 대표적으로는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初期 韓國天主敎會의 몇 가지 問題」가 있다.
2장에서는 조선 천주교회의 성립에 대해 다루고 있다. 18세기에 한역서학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이후, 성호좌파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승훈, 이벽, 권일신, 정약ㅇ용 형제 등은 ‘신문화수용운동’의 일환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김범우 등의 중인에게까지 이어져나갔다.
1785년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천주교도들의 신앙집회가 적발된 이후,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이단사상으로 규정하고 소극적인 규제를 이어 나가며 하지만 1791년의 ‘진산사건’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금령을 반포하였다. 경계하였다. 이승훈이 1784년 영세를 받고 돌아온 후 설립된 한국천주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였으며, 신유박해 당시에는 최소 수천명에서 최대 1만명의 신자 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신자의 지역적 분포로는 서울·경기·충청·전라 이 네 지방에 가장 많았다.
서울의 신자 분포는 상대적으로 중인 이하의 신분이 많았으며, 모두가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인층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췄으며, 양반 신도의 경우, 가문이나 지역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서울로 이주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서울의 경우 시장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모여들며, 시정인(市井人)들이 주로 신도가 되었고, 경기지방의 경우, 양반층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는 양인(良人)들이 주가 된 신앙공동체가 출현하였다.
3장에서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지도층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1785년부터 1791년까지의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경우 양반 계층이 적지 않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인층과 일부의 양인층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진산사건 이후 양반층의 신앙공동체 지도자들은 이탈하거나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중인, 양인 여성 등의 신분/성별을 가진 지도층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도 진산사건 이전까지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인물들이 많았지만, 이후에는 정부의 탄압이 심해진 탓인지 이전보다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인물들이 줄어들었다.
이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기의 ‘신문화수용운동’에서 ‘민중종교운동’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장의 경우 현세구복적 성격을 가진 신도들, 실제 종교적 의미로 천주 신앙에 깊게 빠진 신도들, 보유론적 입장에서 주자학 일변도의 당시 사상체계를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이들 중 신앙공동체를 이룬 이들은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매료되어 천주교의 교리를 생활이념으로 여겼고, 이는 조선정부의 천주교 박해에도 이들이 죽음까지 무릅써 가며 신앙을 지킨 이유가 되기도 했다.
5장은 초기 신도들의 행동의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조선후기에 전래된 천주교는 기존 성리학 윤리와는 다른 행동강령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는 초기신도들의 행동 및 전도에도 반영되었다.
조선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천주교에 대해 금령을 내렸기에 천주교 신앙 조직은 비밀결사화 되었으며, 특히 주문모 신부의 명도회는 5~6명으로 구성된 말단 조직을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맡아가며 명목상의 회장은 정약종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주문모가 관리하였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상대화시키고 천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점은 당시 양반지배층에게 천주교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부부관계와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들이 비밀결사화하면서 산적이나 황건, 백련교처럼 정부에 반기를 들 가능성에 대해 중앙정부는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6장은 조선 정부의 당시 천주교 인식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1784년 교회 창설 이전에도 천주교에 대한 지식은 유학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천주교를 민중불교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이단시했다.
이는 조선 천주교회 창설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금령을 선포하였다. 특히 천주교의 교리와 윤리가 기존 성리학 윤리와 크게 충돌하는 점을 우려했다. 천주교는 천주를 절대시하고, 왕권을 상대화했으며, 기존의 신분질서나 남녀차별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또한 지배층은 천주교가 신분과 성별, 당색을 막론하고 매우 결속력이 강함을 우려하고 있었다. 기존의 민중신앙과는 달리 천주교는 양반이나 중인 등, 조선 사회의 지배층들에게도 수용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은 그들이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反) 성리학적 윤리는 천주교 신도들의 향촌공동체 이탈과 더불어, 이들이 전근대적 왕조국가를 뒤엎으려는, 황건적이나 백련교도같은 반란 세력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 조선의 지배층은 큰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7장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을 다루고 있다. 6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주교는 반(反) 성리학적 가치를 설파하고 있었고, 조선 정부는 이에 대응해야 했다. 정조 대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댕응이 이루어졌다. 을사추조적발사건에서도 중인 김범우의 유배 외에 다른 양반은 석방하였다. 이는 정학이 밝혀지면 사학인 천주교는 자물 것이라고 생각한 정조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산사건으로 양반이 성리학적 규범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지르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심해졌다. 특히 향촌사회지배가 점점 약화되는 당시의 상황과 더불어 향약을 통한 교화와 오가작통법을 강화하는 등 천주교로 인해 약화되는 향촌의 전통 질서를 다시 강화하고자 했다.
이후 천주교의 교세가 강화되면서 조선 정부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늘려갔고, 법외형(法外刑)까지 동원하여 천주교도를 처벌했다. 또한 양반 신도에게는 더욱 강경한 처벌을 통해 천주교의 확산을 막고자 했다.
저자는 당시 정부 당국자들이 기존의 체제와 전통적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해 변혁의 논리로 인식한 천주교를 탄압했고, 조선 후기의 민들은 전근대적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의 수용에 나섰고, 양자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고 있다.
8장은 채제공의 천주교 인식에 관해 다루고 있다. 정조 시기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은 정조 시기 천주교 관련 사건의 처리를 담당했다.
채제공 역시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채제공은 직접 서학서를 읽어보며 천주교에 대한 평가를 내렸고, 천주교의 장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천주교가 유교적 질서에 반하는 이단이라는 점은 분명히 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안은 ‘정학을 밝혀 사학을 잠재운다’.라는 온건한 것이었다.
이는 채제공 주변에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 많았기에 이것이 노론의 정치 공세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남인계열 유학자들도 척사론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으며, 진산사건 이후 노론의 정치공세로 남인계열 인물이 좌천당하거나 유배당하는 도중에도, 사건을 크게 키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정리하자면 채제공 역시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와 마찬가지로 첝교를 이단으로 인식하였으나,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은 온건하였다. 이는 정치적으로 남인에 대한 노론 등의 공세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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