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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작가가 천재인 이유는 그거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세계관을 시에 정말 잘 녹여내렸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관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것.
1.근대 시기의 환상
타자의 외압에 의해 도래한 근대는 당시 다수의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진보된 시대로 나아갈 것처럼 보였으니까.
조선 사회에 만연한 유교는 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지 못 했다.
호부호형하지 못했던 홍길동이 그랬던 것처럼, 당대 조선에서 '나'라는 존재는 가족 공동체 단위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예를 들어, "김민수"라는 아이는 사람들에게 '김씨 집안 몇 째 아들'이라고 불렸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자유와 평등을 표방한 근대는 그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간에 독립된 개체로 인지될 수 있었다.
가족을, 공동체를, 민족을 떠나서 나 그 자체로 주체성을 정립할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조선에 염증을 느낀 지식인들은 이러한 근대를 지향했었다.
「바다와 나비」로 유명한 김기림도
"
태양일수가 없는 설어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새어가며 기다린다
"
(「태양의 풍속」)
며 새 시대가 도래하여 어두운 현실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난해함으로 유명한 이상 시인도 마찬가지다. 오감도 시제 2호에서 화자는 졸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자신이 과거 조상대대로 물려내려오던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것을 인지한다. 허나 그것에 대해서
"
나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냐
"
(「오감도 시제 2호」)
며 가부장제 사회 내에서 장자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유교 사상의 발상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2. 근대 시기의 모순
하지만 '근대 시기'는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조선인들에게 맞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외압에 의해 주입되었기에 그 부작용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소일거리까지도 나눠가며 정을 돈독히 하던 농촌 공동체 중심의 문화는 자본주의로 대체되었고, 파편화된 개개인들은 일제에 의한 억압에 무너져갔다. 이렇게 근대는 천천히 개개인의 숨통을 조여왔다.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이상 시인은, 새롭게 도래한 시대의 모순에 대해서도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근대의 모순에 대한 인식은 익히 들어봤을 법한 오감도 시제 1호, 달리고 있는 아해들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
13인의 아해가 질주하오
(길은 막달은 곳이 적절하오.)
"
(「오감도 시제 1호」)
13인의 아이들은 막다른 골목을 향해 질주한다. 그들은 질주하는 이유를 모른 채 그저 질주한다. 무엇을 위해 질주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 까마귀(烏)가 골목을 무작정 달리고만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 아이들은 달린다. 질주하며 경쟁한다. 목적없는 질주는 반복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이들의 질주는 무엇으로 부터 비롯되었는가?
"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오감도 시제 1호」)
달리고 있는 아이들은 마음에 무서움을 품은 채로 달린다. 무서움의 원인은 알 수 없고, 공포의 근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공포의 생산자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목격하고 있는 까마귀의 말에 따르면, 무서운 아이든 무서워하는 아이든 숫자는 중요치 않은 것 같다. 무서움을 느낀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무서워해야만 하는가?
두 질문은 근대의 모순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자본주의로 인해 식민지 조선인들은 갑작스럽게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적어도 생계를 위해서 경쟁을 통해 자본을 축척해야 한다. 하지만 제한된 자원과 일제의 수탈로 인해 자본의 축척은, 생계 유지는 쉽지 않다. 따라서 더 달려야만 한다. 아니 그것은 질주의 형태로만 발현되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근대 식민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감시와 처벌(도태 혹은 억압)의 매커니즘은 분명 사회 시스템이 야기했다. 하지만 이 매커니즘은 내면화된다. 파놉티콘의 죄수들이 감시자가 없이도 내면에 감시자의 대리인을 세워 스스로를 감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 하는 아해는 구별되지 않는다. 그 둘은 개인의 내면에 동시에 내재된 채로 번갈아 가면서 나타난다. 내면화된 매커니즘은 반복적으로 개인에게 공포감을 야기한다.
3. 현재...그리고 이상
2022년. 대한민국이 독립한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이 지적했던 감시와 처벌의 매커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더 심화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생기는 이 불안감. 그것을 해소할 절대적인 방법은 감히 우리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확실하다. 이상은 식민지 시기 이미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었다는 것. 이렇게 시대를 넘나드는 통찰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상은 진정한 의미의 천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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