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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소, 「茶山 經世論의 人文學的 基盤」
저자는 다산의 인문학적 기반을 수기와 치인에서 찾는다. 결국 수기와 치인은 성리학자에게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산은 방대한 경학 연구를 통해 수기를 이루고자 했고, 1표 2사로 대표되는 경세학 서적 저술을 통해 치인을 이루고자 했다.
특히 그는 조종지법에 대해 변법적 방법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왕안석에 대해서도 극렬히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변법에 대한 인식은 율곡 이이와도 통한다. 그러나 저자는 김태영 교수의 평가를 인용하여(25쪽) 이를 ‘성리학자 이이’와 ‘실학자 다산’의 차이로 평가한다.
다산은 당시 조선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며, 단순히 수기만을 중요시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실천을 통해 국가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심성론, 사단칠정론 등에서 주자의 학설과 다른 학설을 제기하였고, 당시 산림 등이 현실 정치를 멀리하는 것을 비판하며, 1표 2서를 통한 국가개혁론을 저술하였다.
이는 결국 기존 성리학의 학설과 다른 정약용만의 경학 연구가 경세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봉규, 「經學的 脈絡에서 본 茶山의 政治論」
이 글에서 저자는 경학적 관점에서 정약용의 정치론을 바라보고, 중국의 황종희하 고염무와 경학, 경세학과 비교하여 정약용의 정치론을 분석라고자 하는 것이 해당 글의 목표이다.
다산은 경학적 측면의 탐구를 경세학으로 연결시키고자 했고, 따라서 실천적인 방향으로 성리학 이념을 해석하여 독자적인 정치론을 펼쳤다.
또한 왕정론의 재해석을 통해 주자학적 통치론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고, 국왕권이 아닌 공권력을 높이고자 『경세유표』에서 규장각 등의 국왕의 사적 기구 등을 금지하고 고적법을 강화하여 관리의 근무행태를 개선하여 공적인 정치를 펼치고 이러한 환경 하에서 재상(삼공)역시 재상권을 부여받는다.
황종희와 고염무 역시 중국 당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개혁론을 제시하였으나, 황종희는 환관정치의 대안으로 적극적 재상정치를 제안하였고, 고염무는 사욕을 인정하면서 수령직 등의 가산화를 용인하지만, 정약용은 수령에 대한 공권력의 관리 강화를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황종희와 고염무에게는 경학에 따른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정약용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저자는 평하고 있다.
김태영, 「다산의 정전제론」
저자는 다산의 정전제론에 대하여 해당 글에서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우선 김용섭은 다산의 정전제론에 대해 독립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한 개혁론으로 평가하였고, 박찬승은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고 지주전호제의 타파가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위의 목적은 기존 실학자들의 균전론이나 한전론으로도 가능하다고 평하고 있다.또한 이영훈은 사적 소유와 병작제를 전제하여 다산의 정전제가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정약용의 정전제론이 ‘유학의 실학적 측면의 극진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252쪽) 사전 8구에 공동 경작용 공전 1구를 놓고 공전에서 나온 수확은 국가가 수취하도록 했다. 이는 중간층의 농단을 배제하고 국가가 직접 수취함으로써 백성과 국가 모두 이득을 얻는 구조였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국왕이 왕정의 확립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전 구획을 윌한 어린도 사용, 이를 통한 9직의 편성 등은 유학의 근본 목적인 백성 교화와도 연결되며, 각 가정마다 효제를 습득하도록 하는 경지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닥산의 정전제는 기존 유학의 국가개혁론을 정약용이 두루 살핀 후 정전론과 그에 기초한 부공제와 균직론(均職論)을 고안함으로써 중세 후기에 새로운 국가론을 구상하였다는 의의가 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258~259쪽)
안병직, 「茶山의 田賦改革論」
저자는 다산의 전부론개혁론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백성의 부세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부세개혁이다. 알려져 있듯 조선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부담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또한 이는 국가의 재정개혁과도 연결되는 문제였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재정개혁이 어떻게 국가개혁과 연결되는지도 이 글의 주요 논점 중 하나이다.
정약용은 부세제 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우선 정전을 통해 전세와 9부를 개혁함으로써 국가재정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동시에 도모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다산은 그의 수리적 능력을 발휘하여 세세하게 저넝전제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계산하고 있다. 그러나 상공업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9부를 수취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에 현실적으로는 어염선세와 환곡을 통해 국가재정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방재정에 대해서도 수령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약용이라면 그에 대한 충분한 재정적 분배가 있어야 하지만, 당시 군현재정이 사실상 별도로 존재하지 않던 조선에서는 지방에 충분한 재정을 분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저자는 다산이 지방재정의 확보 측면에서의 부세개혁에 눈을 돌려야 했다고 지적한다.(394쪽)
종합적으로 다산의 전부개혁론은 조선후기의 문란한 정치사회적 현실과 그 속에서도 상업이 발달하고 외래문물이 도입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다산은 이에 자극을 받아 분업을 촉진시키고 이를 통해 상공업을 진흥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부세에서 전제와 부공을 ㅍ쌍립시키고자 한 것은 적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하고 있다.따라서 다산이 부세론의 정립에 실패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현실과 그 탈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395쪽)
조성을, 「流配 以後 茶山의 利用厚生學」
정약용은 이미 유배 이전에도 이용후생학에 관심이 있었고, 이는 남인계 이용후생학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이 글의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다산의 이용후생학이 후기에 『경세유표』에서 이용감의 설치와 같이 국가제도론으로 발전하였다. (402쪽)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단순히 중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이를 국가개혁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전반적인 관제개혁과 함께 앞서 살펴본 농업과 부세 개혁에 더불어 기술발전과 상공업 발전에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저자의 vidrk를 빌리자면 제도개혁론(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의 결합으로 『주례』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산은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19세기의 조선 현실 속에서 『주례』의 제도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이에 저자는 『주례』의 21세기적 해석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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