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번역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음.
1. 정역 : 원문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방법을 추구한 번역. 정원기, 리동혁, 김구용, 황석영 등이 이 범주에 속함.
2. 번안 : 이야기의 큰 틀속에서 작가가 임의로 문장을 만들어넣거나 이야기를 더 하는 방식을 추구한 판본. 요시카와 에이지, 정비석, 이문열이 이 범주에 속함.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 같은 경우엔, 유비가 어머니한테 드릴 차를 어렵사리 구한 것을 황건적한테 빼앗겼다가 장비의 도움으로 돌려받아내는 도입부가 창작되어 있음. 우리가 어렸을 때 본 만화 삼국지 중에서도 저런 도입부를 지닌 것이 여러 개 있는데, 모두 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영향으로 보면 된다. 개인적으로 재미만 있으면 저런 장면을 마음대로 지어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지만, 간혹 도서갤이든 독서갤이든 간에 '이문열 삼국지는 재밌던데 딴 건 왜 이리 노잼임?'하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걍 간단히 말해서 정역본과 번안본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추구하기 때문에 번안본의 재미가 정역본엔 없는 거임. 그래서 번안본의 기준으로 정역본의 재미를 평가하는 것은 좀 부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삼국지를 정역으로 번역한 중문학자로 정원기 교수가 있다. 이 사람은 과거에 황석영 삼국지의 오역을 두고 지면에서 논쟁을 펼친 적도 있을 만큼 삼국지 정역에 큰 열의를 둔 사람인데, 이 사람이 국내의 삼국지 번역본을 두고 일장일단에 대한 평가를 한 바 있음. http://www.samgookji.com/bbs/view.php?id=sugyoung&desc=asc&no=25
하여튼 정원기 교수의 저 글 + 삼국지 갤러리 등지를 눈팅했던 짬밥 + 내가 직접 읽으면서 느낀 것을 총합해서 개인적으로 삼국지 번역본에 대한 평가를 해보자면...
1. 정비석 삼국지 : 요시카와 에이지의 창작을 빌려서 만들어낸 번안본. 재밌고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문열 삼국지와 투 톱. 다만 내용이 짧은 편이고 현대적인 독자들이 보기엔 멋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유비가 작중에서 계속 우는 모습을 보여주데, 과거에 중국에서는 '울면서 감정을 표출하는 것' 역시 '사내다운 의기'로 봤다는 그런 얘기를 본 적이 있음. 그래서 저렇게 많이 우는 거 같은데, 요즘 독자들이 보기엔 글쎄...
2. 이문열 삼국지 : 요시카와 에이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적인 도입부가 만들어진 삼국지. 초반부엔 독자적인 창작이 많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냥 번역 + 논설만 하는 식이다. 일단 번역의 문제점을 보자면, 재중 동포 리동혁이 지적한대로 자잘한 오역이 많은 편이며, 이문열 본인도 이 점을 겸허히 인정하고 리동혁의 피드백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원전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는 장수를 사로 잡기 위해서 바닥에 밧줄을 팽팽하게 매어놔서 말이 지나가다가 걸려 넘어지게 함정을 짜놨는데, 이문열 작가가 저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밧줄을 던져 말 위에 있는 장수를 사로잡았다'는 식으로 오역했다는 게 그 한 예다. 이건 이문열이 걍 한자를 못 알아먹어서 낸 기술적인 오류.) 그리고 이문열이 정사를 계속해서 논하는데 이 부분에 오류도 있다. 마초가 서량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조조와 대결을 하다가 패하는 것이, 연의(나관중)에서는 '조조가 마등을 죽이자 이에 분노한 마초가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고 정사(실제 역사)에서는 '마등은 허도에 있는데 마초가 군사를 일으켜서 조조에 도전하고, 조조는 마초의 난을 진압한 다음에 마등을 죽인다' 는 식으로 이뤄진다. 공통적인 것은 마등이 조조에 의해서 죽는다는 부분인데, 이문열 삼국지에서는 '정사를 살펴보자면 조조는 마등을 죽인 적이 없다'고 얘기하는 식으로, 정사를 논할 때 자잘한 오류가 있음.
이문열 삼국지의 장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잘 읽히는 유려한 문체로 쓰였으며, 독자적인 번안을 시도한 부분이 이문열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문열 삼국지 초반부에서 젊은 시절 조조와 하후돈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는데, 젊은 시절에 의기가 남아 있던 조조가 십상시 때문에 썩어들어가는 나라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고 하후돈이 '그러면 불알 없는 내시들 그냥 쓸어내버리자'고 큰 소리를 치고, 조조는 그런 하후돈한테 '사람은 근본을 배반해서는 못 쓰는 법이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라고 하는 장면이 있음. 조조 자신이 환관이 조등의 양자이기 때문에 저런 얘기가 나온 것임. 여기에서 조조는 '나라에 충성을 바치자면 불효를 하게 되고(자신의 집안이 한 조정을 좀 먹고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를 바치자면 불충하게 되는' 처지에 빠져 있음. 이문열의 애독자라면 눈치채겠지만, 저렇게 '충'과 '효'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시인>에서 김병연이 갖고 있던 테마임. 김병연이 반역자 아버지를 뒀기 때문에. 조금 더 전기적으로 파고들자면 이문열 본인도 월북한 아버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였고.
하나 더 더해서, 계속해서 정사를 예로 들면서 두 가지 이야기를 비교하는 이문열 삼국지의 전개 방식은 <황제를 위하여>와도 닮았다. <황제를 위하여>에서도 서술자는 '황제의 입장에서 쓰인 실록'을 얘기하다가도 종종 실제 역사를 들어서 그 내용을 스스로 뒤집는 이야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문열 삼국지에서 정사 타령하는 부분도 그렇게 쓰여 있으며 이는 지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음. (원전 삼국지의 직선적인 간결한 서사에도 분명히 매력이 있겠고, 그런 것이 일정 부분 깎여나갔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정리하자면 장단점이 명백하게 갈리는데, 오역 + 부정확한 내용을 걸러듣는다면 그럭저럭 재밌게 볼 수 있는 현대적인 판본이라고 볼 수 있다.
3. 황석영 삼국지.
황석영이 감옥에 있을 때 창작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삼국지 번역을 했는데, 그 번역본이 출간된 것. 나관중본을 번역하되 문장의 순서를 바꾸는 식으로 자잘한 윤문만을 거쳤다는 점에서 1과 2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저렇게 정역의 방식을 취할 거면 황석영보다는 당연히 중문학자들이 훨씬 더 잘할 텐데 굳이 황 작가의 번역본을 읽을 필요가 있나? 싶다.
이문열 삼국지는 이문열의 작품 세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반면에 황석영 삼국지는 전혀 그렇지 않다. 황석영이라는 사람 자체가 애초에 70년대에 노동 문제, 분단 문제 등을 주제로 깔끔한 단편을 쓰며 존경 받게 된 작가일 뿐더러, 황석영의 대하 소설인 <장길산> 역시 작가 본인이 '원래는 중편이나 1권짜리 장편을 쓰려고 했는데 한국 일보에 연재하게 되면서 길어진 것', '장길산을 출간할 때는 연재를 하다가 잡다하게 들어간 음담패설이나 잡 싸움을 다 빼려고 하려다가 말았다'고 말할 만큼 본인이 원래 짧고 단정한 글을 추구한다. 황석영의 작품 세계와도 상관 없고, 정역의 기준으로 보자면 중문학자들보다 번역의 정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황석영 삼국지를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읽다면 말리진 않겠는데 가끔 가다가 '황석영 작품 읽고 싶은데 황석영 삼국지 읽으면 되나요?'라는 글을 보면 안타깝긴 하다.
이밖에 정역본은 위에 있는 정원기 교수의 비교글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거 같다. (http://www.samgookji.com/bbs/view.php?id=sugyoung&desc=asc&no=25 ) 정역본의 기준으로 보자면 원문을 최대한 존중해서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옮기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구 고전 번역에 요구하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삼국지가 한국 독서 사회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삼국지가 많이 읽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1. 만화처럼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 글이라서.
2. 명작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애들이 만화를 읽고 있으면 지랄해대는 어른들이 삼국지 만화엔 눈 감아줌.
저래서 보편적으로 읽히는 것인데(책 아예 안 읽는 애들도 삼국지 만화는 읽어봤을 만큼), 삼국지가 그렇게 큰 가치가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아이들한테 삼국지의 전근대적 폭력성은 오히려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난 차라리 만화나 게임으로 삼국지를 접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굳이 삼국지를 읽을 번역본을 추천하자면
1. 원전을 접하고 싶다면 중문학자들이 번역한 정역본. (정역에 대한 신념과 원칙을 꾸준히 개진해 왔다는 점에서 정원기 교수의 번역본을 개인적으로 추천.)
2. 이야기 글의 자극적인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정비석과 이문열. 더 정통적인 삼국지의 모습에 충실한 쪽은 정비석. 본인이 아예 자기 스타일대로 바꿔먹은 건 이문열. 취향에 맞게 읽으면 됨.
재밌네
정원기는 진짜 삼국지 관련해서 연구는 많이 하션는디 어쩌다 자기가 쓴 현암사 정역삼국지는 묻힌건지..
제법 힘이 들어간 좋은 글이다... 그치만 삼국지 자체에 정나미가 떨어짐. 중국새리들 왜캐 천하통일에 집착하는겨? 유럽은 통일 안하고도 잘살잔어... 저 당시 중국 인구가 삼천만? 오천만? ... 천하통일 하느라고 이거저거 따지면 이천만명은 뒈진듯. 자세한 통계는 모르지만 지금으로 환산하면 5억명 죽은 꼴... 관우 장비 유비 조조 제갈량 사마의 등등은 히틀러 만큼 나쁜 개새들임
나도 정원기 교수의 정역삼국지 가지고 있는데 정말 간결하게 번역되어 있어서 마음에 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