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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포칼립스

세계 최강 제국과의 60여년에 걸친 처절한 사투는 고려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고려의 인구는 건국 초기 이전으로 후퇴했다. 사망자는 물론이고 끌려간 유민 또한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한 번의 침입에 20만이 넘는 백성들이 끌려간 적도 있다. 수차례의 침입 동안 사회 기반시설은 완전히 파괴되고 농지는 황폐화되었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며 지켜낸 자주국의 칭호이건만, 민중들에게는 차라리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몽골은 살인적인 공물과 부역을 요구한다. 완전 자주국도, 완전한 속국도 아닌 비정상적인 체제는 기형적이고 뒤틀린 지배 구조를 낳는다.
정부 안에는 어떻게든 권력자에게 빌붙으려는 소인배들이 대량 생산되며 출세의 기본 소양은 아첨과 몽골어 능력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의 가치관 또한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조국가에서 왕을 제치고 정권을 장악하던 군벌 세력은 끝까지 외적에 맞서 싸웠고
정통성 있는 왕은 몽골의 힘을 빌려 권력을 되찾았다.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려나 하던 차에 삼별초가 반기를 든다.
왕은 이들이 역적들의 친위대로 반국가세력이라 규정하고 삼별초는 스스로를 몽골에 항쟁하는 전사라 말한다.


나라의 주인이 둘이니 나라 꼴 또한 웃기게 돌아간다. 몽골에서 자라고 몽골 공주와 결혼한 왕 밑에는 이중국적자 신하들이 득실댄다.
녹봉을 받을 때는 고려의 관직을 내세우고 벌을 받아야 할 때는 몽골의 관직을 내세우며 은근슬쩍 피해버린다.
농토는 황폐화되고 인구는 줄었지만 그래도 세금은 내야 한다. 나라의 주인은 둘이고 땅의 주인은 넷 다섯으로 늘어난다. 밭을 가는 자는
한명인데 그 밭에서 세금을 받는 자는 다섯이 넘는다. 악몽같은 몽골의 침입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더니 돌아오는 것은 세금과 끝없는 부역뿐이다.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권력자에게 몸을 의탁한다.


세금을 거두는 관리들도 죽을 맛이다. 한놈은 재상의 노비로, 한놈은 귀족의 소작농으로, 한놈은 죽고 한놈은 도망치고
한놈은 왕실과 연줄이 닿아 세금을 면제받는다. 장부상으로는 다섯이 있는데 실제로 돈을 내는 놈은 한명도 없다.
간신히 거둔 세금도 안전하지 않다. 예성강 부근에까지 출몰하는 왜구는 피땀이 담긴 세금 수송선을 예사로 털어간다.
세금이 막히면 곤란한 것은 귀족 권세가들이 아니라 하급관리들이다. 얼마 안되는 녹봉으로 간간히 살아가는 그들은
하루 봉급이 밀리면 하루를 굶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도 어쨌든 나라는 굴러가야 하기에 오늘도 낡은 장부를 들추어 세금을 낼 사람을 찾는다.


장수들 또한 알고 있다. 고려의 군제는 이미 몽골의 침입 이후 파탄이 나버렸다. 간신히 남은 장수들도 대몽항쟁과
삼별초 투쟁으로 거의 사라졌다. 무신정권이 숙청되며 휘하의 수많은 정예병 또한 사라진다.
왜구의 규모와 기세가 심상찮다는 보고가 속속들히 올라오지만 마땅히 신경을 써 줄 수가 없다.
원나라는 내부의 반란으로 흔들리고 있다. 한족 반란군이 준동하고 군대가 움직인다. 조만간 피바람이 불 것이다.
늙은 왕조 고려가 파탄난 체제와 반신불수의 몸을 이끌고 이 시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모르는 일이다. 고려도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사라지고 먼 훗날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이름만 작게 남기는, 그런 나라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 사람이 죽었어도, 가혹한 수탈이 있어도, 기형적인 제도가 나라를 썩게 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세상이 온통 잿빛이다.

(2) 전쟁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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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쌍성총관부, 아래는 동녕부의 세력권이다)
세계에 악몽을 선사한 거대한 제국 몽골은 그 무렵 내부의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 남부지방의 한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할 능력마저 상실한 원나라는 고려에 지원을 요청한다.
젊은 공민왕은 모든 장수와 무사를 긁어모아 약 2만 5천의 대군을 파견한다.
반란군과 치열한 전투를 거치며 베테랑이 된 군인들은 직접 중국 땅을 누비며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 또한 키워간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자들은 실제로 이후에 고려를 이끌어갈 차세대 인재들이 된다. 이 때 발굴된 인물이 바로 최영이다.
공민왕은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군사를 그대로 국경지역에 배치한다.
얼마 후 몽골과 끈이 닿아있던 권력자들이 모조리 숙청당한다. 몽골의 황후인 기황후의 세력을 믿고 권세를 휘두르던
기씨 일족도 이때 완전히 숙청당한다.

 
공민왕이 정계에 피보라를 일으키고 있을 무렵, 국경의 군대는 평안도와 함경도로 이동해 순식간에 동녕부와 쌍성 총관부를 탈환한다.
동녕부와 쌍성 총관부는 모두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투항한 지역으로, 고려는 이 회복을 통해 식물인간 상태에서 벗어난다.
서북면(동녕부)은 북방의 적을 상대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전략지역으로,북방민족으로부터 수도 개경을 방어하는
1,2차 방어선 역할 뿐만 아니라 반격의 기회 또한 제공하는 소중한 땅이다. 거란전쟁때의 귀주대첩이나 흥화진전투가
어디서 일어났는지 상기해보자. 고려 제 2의 도시 평양의 방어력 또한 만만치 않다.

 
동북면을 회복하면서 고려는 새로운 피를 수혈받게 된다. 당시 쌍성총관부는 3개의 가문이 통치권을 뒤고 엎치락 뒤치락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이 중 한 가문이 고려에게 투항하며 쌍성총관부 탈환에 적극 협력한다. 이 가문의 후계자이자 고려인과
여진족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기병부대를 이끄는 만호장이 고려의 장수로 후에 활약하게 되는데, 이 자가 바로 이성계이다.
이성계와 그 형제들을 포함한 우수한 장수라인과 여진족이 포함된 실전경험 풍부한 기병부대는 고려가 이 험난한 세기를
헤쳐나가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원나라의 침입을 막을 서북면 방어선도 다시 회복했고, 동북면 회복을 통해 새로운 인재들도 유입했으며
국내 정치를 기형적으로 만들던 부원배들도 숙청했고 중국땅을 누비며 실전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사들까지 보유하게 된 공민왕은
 이제 남방의 왜구에게로 관심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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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홍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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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 침입도, 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안우/이방실/김득배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런데 중국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수많은 반란 세력은 서서히 몇 개의 거대 세력으로 나뉜다.
중국의 절반을 반란군에게 내준 원나라는 중국 북부의 지방정권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반란군들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튄다. 통일된 세력이 아니니 더욱 예측이 어렵다.
옛 송나라의 수도이자 강남지방의 중심인 카이펑을 점령한 반란세력은 스스로를 송나라를 잇는 나라, 대송국이라고 이름한다.
대송국은 중국 전역의 회복을 위해 세 갈래의 군대를 준비한다. 동로/중로/서로군이 그것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군은 서쪽, 중로군은 북쪽 지방으로, 동로군은 동쪽 지방으로 출진한다.
중로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원나라의 상도, 즉 지금의 내몽골 지방을 탈환한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시들어가던 원나라는 회심의 반격으로 내몽골을 다시 탈환한다.
원나라에게 쫓겨난 중로군은 자신들과 본대 사이를 원나라가 가로막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리장성 바깥,
내몽골의 밖 먼 땅에서 중국의 본대와 완전히 단절되버린 것이다. 중국 남부의 본대가 구원하러 온다면 다행이겠건만,
본대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원나라 군에게 수도 개봉을 뺐긴 대송국은 무너지고 대송국의 황제는 주원장에게 망명해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다.

 
 중로군은 이역 만리에서 그야말로 소속이 없는 군대가 된다. 본진이 있던 곳에는 명나라, 바로 옆에는 원나라,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다. 근거지 없이 떠돌던 중로군은 중국 바깥에서 재기의 가능성을 잡는다. 바로 고려 땅이다.
국경을 넘어온 중로군(이후 홍건적)은 순식간에 의주성과 정주성을 함락시킨다.
서북면 도지휘사 이암이 평양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나 변변한 전투도 없이 평양을 포기한다. 순식간에 고려는 서북면을 다시 상실한다.
이전에 고려가 겪어본 전쟁을 생각한다면, 홍건적이 서북면을 순식간에 함락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고려의 서북면, 평안도는 예로부터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는 방어선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었다.
 거란전쟁때 강동 6주의 활약이나, 귀주대첩, 흥화진 전투가 모두 서북면에서 이루어졌으며, 몽골의 1차 침입때 몽골군을 끝까지
 막아낸 곳도 바로 서북면의 귀주성이다. 평양 자체도 훌륭한 요새다.
 그런데 그런 서북면이 피난민을 이끌고 온 홍건적에게 너무나 어이없게 함락된다. 어떻게 된 것일까.
서북면의 상실은 바로 고려의 행정력이 붕괴되어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황폐화된 농토는 전쟁물자를 뒷받침할 경제력을 내지 못한다. 인구 자체도 줄어버린데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노비가 되어 군역을 면제받는다. 부족하나마 징집병을 모아보지만 수준은 형편이 없다.
2군 6위로 대표되는 왕실의 중앙군은 이미 해체되었고, 밉살스럽지만 가장 강력한 무장세력이던 무신정권의
군인들과 삼별초는 대몽항쟁때 이미 씨가 말랐다. 이암이 서경을 포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암이 끌고 온 병력의 수나 수준
으로는 도저히 서경을 방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고려의 향촌사회가 붕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몽골의 침입이란 외부적 요인 외에도 고려사회 내부의 성장이라는 내부적 요인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적은 막아야 한다. 거대한 조직체는 마치 생명체와 같아서 스스로의 죽음을 거부한다.
무너져가는 왕조 고려도 스스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짜낼 수 있는 힘과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
다행히도 고려에게는 중국원정을 다녀온 베테랑 용사들과 회복한 영토에서 수혈받은 젊은 피들이 있다.
고려는 소수의 정예 병사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펼친다.

 
생각해보면 홍건적의 침입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북방민족이 아닌 한족이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온데다가,
고려의 전통적인 방어책은 거점방어 수성전은 무너지고 게릴라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더 특이한 점은 침략군의 성격이다. 이번 침략군은 북방민족과 다르다. 고려를 쳐서 배후를 안정시키거나,
중원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려의 씨를 말리는 것이 목적도 아니다.
그들은 근거지를 찾으러 온 것이다. 고려인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적이 다르고 적의 목적이 다르니 대응하는 전략 또한 달라진다. 다행히 고려의 장수들은 우수했다.
아마 무너져가는 고려를 한 세기 더 지탱한 것은 실전경험 풍부한 군인들의 눈부신 활약 덕택이 아닌가 한다.
이 때 고려는 군사를 제외하면 경제,정치 모든 부문에서 파탄이 나 있었기에.

 
서북면 지휘사 이암이 평양을 버리려 할 때, 그는 평양의 모든 집과 식량을 태우려고 했다. 고려가 전통적으로 쓰던 청야전술이다.
하지만 이 때 김선치(김득배의 동생)가 반대를 한다.
적군은 근거지 없이 떠도는 유민이니 식량이 없다고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식량을 찾기 위해 더 안쪽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이암은 이를 받아들여 서경에 식량을 남겨두고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다행히 모험은 성공해 홍건적은 서경에 머무르며
태세를 정비했다. 이전의 전쟁에서 전통적으로 서경이 뚫리면 개경도 순식간에 뚫렸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고려는 그야말로 코앞까지 날아온 칼을 간신히 피한 것이다.

 

홍건적은 서경 점령 이후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점령지역의 고려인을 평양에 모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하는 작업에 바빴던 것도 있겠지만, 역시 고려의 소규모 유격대가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며 서경 주변에서
홍건적을 요격했던 것도 분명히 그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유격대가 벌어준 시간을 고려는 낭비하지 않았다.
전국의 군대를 긁어모아 2만의 병사를 만든 고려는 서경을 마침내 탈환한다. 당황한 홍건적은 서경에 모아둔
고려인 1만명을 전부 살해하고 도망친다.

 
그 뒤로 홍건적과 고려군은 평안도지방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홍건적 또한 중국 전역을 누빈 경험 많은 군대라 만만치가 않았다.
국력의 부족에 허덕이던 고려는 결국 홍건적 몰살에서 홍건적 내보내기로 전략을 바꾼다.
주력군과 동북면의 천호장들이 합세해 홍건적을 압록강 너머로 몰아내면서 홍건적의 1차 침입은 끝이 난다.

 
고려의 거센 반격에 주춤한 홍건적은 원나라 내몽골 지방을 공격하나 실패한다.
결국 다시 고려로 타겟을 돌린 홍건적은 이번엔 10만 가량의 전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아마 민간인과 군인의 가족까지 전부 포함한 숫자일 것이다. 중국인의 주특기인 알박기 전략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번에도 고려는 평안도 지방을 어이없이 상실한다. 황해도에서 간신히 방어선을 구축한 고려군은 군대를 이곳으로 집결시킨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다시 유격대가 나서야 한다. 고려 유격대의 활약은 그야말로 처절하면서도 영웅적이었다.
천명이 안되는 소규모 부대를 이끄는 것은 종 2품의 큼직큼직한 벼슬을 단 장수들이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안우,이방실,김득배이다. 이들은 부족한 병력, 형편없는 물자, 한심한 신병의 수준에도 불구하고 활약을 펼쳤다.
10만이라면 1차 침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다. 황해도 방어선에 도착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힘을 빼기 위해 고려의
최고지휘관들은 최전선에서 목숨을 내걸며 유격활동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안도는 완전히 홍건적의 손에 떨어진다. 상장군이 전사하고, 서북면 도지휘사이암의 아들이
죽었으며 지휘사 또한 전사했다.안우와 이방실, 김득배는 이를 갈며 황해도로 후퇴한다.
황해도에 집결한 고려 주력군은 홍건적을 상대로 대패한다. 사실 뭐라고 패배요인을 딱 집어낼 수도 없다.
상대는 중국 전역을 누비던 베테랑 전사에 우리보다 숫자도 많다. 고려의 군제는 파탄났고 신병들의 수준은 낮다.
몽골 침입기에 태어난 그들의 영양 상태는 북한군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지금까지 싸워온 것이 대단할 정도다.

 
어쨌든 이 패배로 고려가 힘겹게 긁어모은 남도의 병력이 한번에 날아간다.
2차 거란전쟁 때 강조의 패배만큼이나 충격적인 패배였다. 고려는 결국 수도를 포기하게 된다.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고 개경은 홍건적의 손에 떨어진다. 하지만 고려는 포기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국가의 집념은 무섭다. 수도를 뺐기고 남부의 지방정권으로 몰락했지만 그 와중에도 고려는 남은 영토에
 미치는 행정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려군은 전국에 흩어져있던 부대들을 안동으로 집결시킨다.

 

 최영,이성계,안우,이방실,김득배 등. 고려 최고의 용장들이 모두 모였다.
그런데 문제는 부대의 인선이다. 총 사령관 정세운은 전공보다는 정치력으로 최고 지휘관이 된 케이스다.
중국 원정을 다니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긴 하나, 그보다 뛰어난 자들이 많았고, 그런 자들을 제치고 총사령관에 올랐으면서
그들과 화합하지 못했다. 정세운의 결정적인 실책은 모두가 출전하는 개경 탈환전에서 임진강 남쪽으로 건너가 혼자만 
몸을 뺐다는 데 있다. 전쟁에서 최고지휘관이 안전한 장소에 있는 것이야 이상할 게 없지만,
상장군이 500 남짓한 유격대를 이끌고 최전선에 출전하는 고려의 상황에서 정세운의 이런 행동은 나머지 장군들의 불만을 키운다.
 
 

 홍건적이 통일된 체제가 아닌 각 두령들이 이끄는 여러 무리의 집합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안 고려는 양동작전을 사용해 
홍건적이 숭인문 방어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고려군 본진을 보정문을 통해 개경 안으로 진입시키는데 성공한다.
개경 탈환의 여세를 몰아 고려군은 홍건적을 압록강까지 몰아붙힌다.
만주로 몰린 홍건적은 이후 원나라 군에 의해 완전히 토벌되면서 소멸한다.
이것으로 고려를 괴롭혀 온 홍건적의 난은 끝이 난다.
하지만 대송국의 중로군이 섬멸되고 나서도 고려는 한동안 전란을 겪는다.
 


홍건적 토벌 얼마 후에 이제는 군벌이 된 몽골 장수 나하추가 함경도로 쳐들어온다.
본래 함경도는 조씨/탁씨/이씨 가문이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고려로 귀의하며 고려의 힘을 빌어 실권을 잡자
불만을 품은 나머지 두 가문이 나하추를 끌어들인 것이다.
나하추의 침입 후에는 몽골로 망명 가 있던 고려의 왕자 덕흥군이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명분은 공민왕은 적합하지 않은 왕이며 왕위계승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이 두 번의 침략에서 이성계는 화려한 실적을 거둔다.


자신을 따르는 동북면의 군사들을 이끌고 나하추와 덕흥군의 군대를 모두 몰아내며 고려 군사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고려는 기적같은 승리를 거두어 냈다. 멸망의 위기를 넘긴 고려는 전쟁을 거치며 다음 세대를 담당할
인재들 또한 얻었다. 군대라는 확실한 조직 안에서 전쟁영웅으로 성장한 그들은 유능하며 경험이 풍부하다.

(4)사후의 숙청

 
그런데 진짜 문제는 침입 이후에 발생한다.
이 당시 고려 정계의 스타들은 단연 군인들이었다. 모든 체제가 붕괴한 가운데서 그나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라를 지켰다는 혁혁한 전공도 있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최영/이성계/안우/이방실/김득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안우는 그 공로가 대단했다.


그런데 개경 탈환전에서 공민왕은 안우 대신 정세운을 총사령관으로 앉힌다.
정세운도 공이 있는 사람이지만, 안우를 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전 병력의 지휘를 맡긴다는 불안감 때문에 공민왕이
군부의 실력자인 안우 대신 측근세력에 가까운 정세운에게 지휘권을 주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정세운의 인품이었다. 이전부터 안우와 갈등이 있었던 정세운은 다른 장수들이 왕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 까지 금지하며
이 기회에 상하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안우는 안우대로 정세운이 고까왔는데다 개경 수복전 당시 정세운이
몸을 뺀 것에 대해 경멸하고 있었다.


이런 분란 와중에 김용이 일을 친다.
김용은 공민왕의 최측근 중 한명으로 공민왕이 고려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수행하던 사람이며
부원배 처단에 앞장선 사람이기도 하다. 늘 정세운보다 앞서 있던 그는 자신이 총사령관을 맡은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고려군의 주력을 박살내 공민왕의 신임을 잃는다.정세운이 총사령관으로 개경을 수복한 다음에는 더욱 더 입지가 좁아졌다.
무너져가던 고려에서 간신히 제 기능을 수행하던 군부에 정치싸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김용은 정세운 제거를 위해 안우를 이용한다. 안우가 가지는 증오심을 잘 알고 있었던 김용은
안우,이방실,김득배(세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에게 정세운을 죽이라는 날조된 명령서를 보낸다.


무언가 수상하다는 김득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우는 그날 밤 정세운을 때려 죽인다.
그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사면령을 선포하고 안우에게 시중 유탁을 파견한다.
유탁은 옛날 중국 원정군을 이끌던 총사령관이며 안우와도 관계가 막역했고 주변에 평판도 좋은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었다.
이 강직한 인물은 안우를 만나자 눈물을 흘리며 안우의 공을 칭찬한다.
한 나라의재상이 무릎을 꿇고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 감격한 안우는 자신이 받은 위조명령서를 들고 공민왕에게 간다.


그러나 안우가 문을 넘어서자 마자 문지기가 안우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친다.
안우는 몽둥이를 피하며 ‘왕께 명령서를 보인 뒤 죄를 달게 받겠다’ 라고 세 번 소리친다.
그러나 공민왕은 반응이 없다. 결국 안우는 문지기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안우가 살해되기 직전까지 공민왕이 작성하고 있던 “안우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조서는 안우가 살해되자마자
“이방실과 김득배를 체포하는 자는 3계급을 승진시킨다” 로 바뀐다.
안우의 살해 소식을 모르던 이방실은 왕의 사신을 엎드려 맞았다가 칼에 맞아 죽는다.
간신히 도망친 김득배는 사위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사망한다.
이 사위는 조선 건국 이후까지 살아남아 5개 주의 수령을 역임한다.
 

공민왕의 장수 살해는 처음이 아니다. 홍건적의 침입 이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탈환하자 원나라에서 항의가 들어온다.
공민왕은 총 지휘관인 인당의 목을 잘라 원나라로 보낸다.
막강한 실력과 튼튼한 기반 세력을 지닌 군부의 득세는 공민왕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일지도 모른다.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전쟁영웅들은 이렇게 사라진다.
나하추의 침입 때 서른이 되지 않았던 이성계는 정적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
얼마 후에 공민왕을 노린 암살 사건의 배후로 홍언박이 지목되어 사형당한다.
이로서 귀족과 외척 세력의 대표마저 사라진 공민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넣는다.
자제위라는 친위부대를 만들고, 기존 세력과 접점이 없는 정치신인 신돈을 등용한 공민왕은
얼마 후 자제위 홍륜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는 홍언박의 손자였다.

 
전 세계가 요동치던 시대였다. 악몽같던 제국이 저물어가고 중국은 수십개의 반란이 준동한다.


근거지를 상실한 반란세력과 원나라에서 독립한 군벌들은 고려를 호시탐탐 노린다.
남방에서는 왜구가 출몰하고 있다. 이런 잿빛 시대에 고려는 전쟁영웅들을 모조리 상실했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와 낡은 체제를 이끌고 고려는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아직도 14세기는 절반이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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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터넷으로 본 고려사 관련 포스팅중 원탑.

2부 곧 올리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