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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너무나도 가볍다.
이 소설이 목표하는 바는 '내면의 창출' 단 한 가지다. 인간의 내면을 창출하려면 우선 표면을 만들어 내고, 그 표면이 표면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이 소설이 그 표면의 상징으로 삼은 건 쇼코의 미소다. "예의바른 미소"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미소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사회적 기능만을 지닌다. 그래서 소유는 처음에 그 미소로부터 섬뜩함을 느끼는 것이다. 표면에 의미가 없다면 자연스레 그 표면 아래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
(그리고 이 지점에서 왜 미소의 주인공이 쇼코여야했는가도 알 수 있다. 코제브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인은 내면이 존재하지 않는 세련된 형식에 모든 것을 거는 인종들이기 때문. 이것은 인종차별인가? 그럴지도.)
쇼코의 부드러운 연음발음이 기억에 났다고 하는 서술 등도 오로지 내면의 깊이감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 남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쇼코의 발음)이 자기 자신에게는 의미를 지닌다고 함으로써 한 인간의 내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5쪽의 서술에서 이러한 '내면 만들기'는 극에 달한다. 소유에게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존재에게 나 자신이 어떤 의미이기를 바랄 수 있는가? 이는 위에서 말한 바(남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의미를 지닌다)와 양립불가능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소유는 인물이면서 서술자다. '소유(서술자)'는 '자기 자신(인물)'에게 의미를 지닌 것들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 이는 소유 자신의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여러 번 할아버지답지 않다는 말을 썼다."(36쪽)
자신이 서술자임을 드러내고, 나아가 스스로의 서술에 대한 자각적 서술 즉, 메타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내면 만들기가 전부인 소설이다. 말하자면 내용 면에서(쇼코의 연음발음 타령), 그리고 형식 면에서(메타서술) 내면의 깊이감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중반부에 소유가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알게 되며 자신이 실은 어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었다고 말하는 부분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표면(소유가 타인에 대해 가졌던 일면적 이해)을 만들어냈으니 이제 내면의 구체적 내용(소유가 알지 못했던 가족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읽으면서 가장 역겹고 한심했던 부분은 소유라는 서술자가 주제넘게 쇼코와 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해 단언하는 장면들이었다.
"만약 내가 일본인이었고, 쇼코의 주변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쇼코는 내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17쪽)
"할아버지는 병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다.//늙는 것에 대해서도 할아버지는 좀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43쪽)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 위와 같은 앎의 계기를 넣은 듯한데, 이는 표면과 내면의 원근감을 통해 인간 심리의 깊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소설의 목적과 배치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설 자신의 정신착란이 일어나는가? 이는 인물과 서술자가 같은 존재라는 데서 비롯된다. 더 정확히는 작가(최은영)가 인물과 서술자를 다른 존재로 둔 데서, 서술자에게 월권을 준 데서 비롯된다. 존재들의 표면(쇼코의 미소)들 속에서 혼란과 공포를 느끼는 존재는 소유인데, 그런 소유에게 위안을 주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인물도 소유 자신이다.
"반면 영화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늘 그들의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영감은 고갈되었고 매일매일 괴물 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지 오래였다."(33쪽)
"문법을 정리하고 하루에 단어랑 백개씩 외웠다. 그러자 뜨개질을 하듯이 마음이 정돈되고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56쪽)
혼란스러워하는 과거의 소유(인물)를 바라보는 현재의 안정된 소유(서술자). 이 둘 사이의 혼란이 곧 소설 자신의 혼란이다.
여기서 인물의 경험과 감정은 헛된 제스쳐와 포즈에 머무르게 된다. 서술들은 무게감을 잃고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다. <쇼코의 미소>는 영원한 2류 소설이 되어버렸다.
이 소설이 목표하는 바는 '내면의 창출' 단 한 가지다. 인간의 내면을 창출하려면 우선 표면을 만들어 내고, 그 표면이 표면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이 소설이 그 표면의 상징으로 삼은 건 쇼코의 미소다. "예의바른 미소"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미소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사회적 기능만을 지닌다. 그래서 소유는 처음에 그 미소로부터 섬뜩함을 느끼는 것이다. 표면에 의미가 없다면 자연스레 그 표면 아래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
(그리고 이 지점에서 왜 미소의 주인공이 쇼코여야했는가도 알 수 있다. 코제브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인은 내면이 존재하지 않는 세련된 형식에 모든 것을 거는 인종들이기 때문. 이것은 인종차별인가? 그럴지도.)
쇼코의 부드러운 연음발음이 기억에 났다고 하는 서술 등도 오로지 내면의 깊이감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 남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쇼코의 발음)이 자기 자신에게는 의미를 지닌다고 함으로써 한 인간의 내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5쪽의 서술에서 이러한 '내면 만들기'는 극에 달한다. 소유에게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존재에게 나 자신이 어떤 의미이기를 바랄 수 있는가? 이는 위에서 말한 바(남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의미를 지닌다)와 양립불가능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소유는 인물이면서 서술자다. '소유(서술자)'는 '자기 자신(인물)'에게 의미를 지닌 것들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 이는 소유 자신의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여러 번 할아버지답지 않다는 말을 썼다."(36쪽)
자신이 서술자임을 드러내고, 나아가 스스로의 서술에 대한 자각적 서술 즉, 메타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내면 만들기가 전부인 소설이다. 말하자면 내용 면에서(쇼코의 연음발음 타령), 그리고 형식 면에서(메타서술) 내면의 깊이감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중반부에 소유가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알게 되며 자신이 실은 어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었다고 말하는 부분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표면(소유가 타인에 대해 가졌던 일면적 이해)을 만들어냈으니 이제 내면의 구체적 내용(소유가 알지 못했던 가족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읽으면서 가장 역겹고 한심했던 부분은 소유라는 서술자가 주제넘게 쇼코와 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해 단언하는 장면들이었다.
"만약 내가 일본인이었고, 쇼코의 주변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쇼코는 내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17쪽)
"할아버지는 병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다.//늙는 것에 대해서도 할아버지는 좀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43쪽)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 위와 같은 앎의 계기를 넣은 듯한데, 이는 표면과 내면의 원근감을 통해 인간 심리의 깊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소설의 목적과 배치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설 자신의 정신착란이 일어나는가? 이는 인물과 서술자가 같은 존재라는 데서 비롯된다. 더 정확히는 작가(최은영)가 인물과 서술자를 다른 존재로 둔 데서, 서술자에게 월권을 준 데서 비롯된다. 존재들의 표면(쇼코의 미소)들 속에서 혼란과 공포를 느끼는 존재는 소유인데, 그런 소유에게 위안을 주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인물도 소유 자신이다.
"반면 영화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늘 그들의 재능과 나의 재능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휩싸였다. 영감은 고갈되었고 매일매일 괴물 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지 오래였다."(33쪽)
"문법을 정리하고 하루에 단어랑 백개씩 외웠다. 그러자 뜨개질을 하듯이 마음이 정돈되고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56쪽)
혼란스러워하는 과거의 소유(인물)를 바라보는 현재의 안정된 소유(서술자). 이 둘 사이의 혼란이 곧 소설 자신의 혼란이다.
여기서 인물의 경험과 감정은 헛된 제스쳐와 포즈에 머무르게 된다. 서술들은 무게감을 잃고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다. <쇼코의 미소>는 영원한 2류 소설이 되어버렸다.
폰으로 쓰다보니 매끄럽지가 않네. 앎의 계기가 이 소설의 목적과 배치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바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쇼코의 미소(표면)'를 뚫고 내려갈 수 없다는 개인적 인식의 한계이기 때문. 누군가는 이 소설을 성장소설로 볼 수 없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장소설로 볼 경우 적절한 문체나 내용 면에서 지나치게 개인적 차원만 강조되고
인물이 부딪혀야 할 공적 차원이 거의 부재한다는 점을 들어서 수준미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