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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인의 왜구
14세기 일본 내부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몽골의 침입을 힘겹게 막아낸 가마쿠라 막부는 그 여파로 붕괴하고 만다.
막부 붕괴  이후 일본을 내란상황에 돌입한다.  중앙정부가 여럿으로 쪼개져 서로 싸우고 지방은 준 독립세력이 되어 서로를 정복하려든다.
그렇게 갈라져 전쟁을 하는 와중에 전술은 발전하고 군대는 잘 훈련된다. 지방영주와 하급무사층의 역량 또한 급속도로 성장한다.
여러 갈래로 쪼개진 일본은 경쟁을 통해 발전을 거듭한다.  분열기에는 보통 외적이 쳐들어 오지만, 다행히도 유일한 이웃 고려는 홍건적을 막아내기에도 바쁘다.
상업과 무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우수한 무사들이 양성된다. 농업기술도 혁신적으로 발전해  1년에 3모작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등장한다. 

더 이상 일본은 굶주린 도적떼가 아니다.
발달된 사회 체계.  팽창하는 산업. 일본은 내란 속에서 꾸준히 국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언제나 넘치는 힘은 바깥을 향한다. 제어할 자가 없으며,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들은 가까이 있는 고려에게 탐욕스러운 눈길을 돌린다.
이전의 소규모 해적과는 다른,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왜구. 14c 동아시아의 바다를 휩쓴 이들을 '경인의 왜구' 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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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쟁의 서막
 
고려사에서 가장 못난 군주를 꼽자면 아마 충정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몽골 세력을 등에 엎은 기씨 가문의 농간으로 십대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이고
무능했으며 여자를 밝혔다. 어린 왕을 세워둔 조정에서는 왕의 섭정 자리를 두고 권력다툼을 벌였으며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불행히도 경인의 왜구는 이 최악의 군주가 다스리던 때에 일어났다.
충정왕 2년, 한 무리의 왜구가 경상도에 침입했다가 고려군의 공격으로 격퇴되었다.
 
이 때 고려군이 노획한 수급만 약 300여개다. 고려 조정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획득한 목이 300여 개라면 본대는 1000명이 넘어간다는 말이다. 고려군의 최고 편제 단위가 1000명이다.
고려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충정왕 3년, 왜구는 130척의 함대를 동원해 인천으로 들어왔다.
고려 정부는 이 믿기 힘든 규모에 경악했다. 당시 고려군의 함대를 전부 합쳐야 100척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30척이라면 일개 해적의 약탈으로 볼 수 없었다. 명백한 전쟁의 징조였다.
 
비상사태에 돌입한 고려는 무능한 지도부를 갈아치우며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원나라에 탄원한 결과, 원나라는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잡아뒀던 강릉대군 왕기를 고려의 왕으로 세운다.
영리하고 강단 있던 왕기는 고려의 국경을 넘자 마자 입고 있던 몽골의 옷을 벗어던진다.
이후에 공민왕으로 불리게 되는 그는 몽골에게 빌붙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기씨 일파를 숙청하고
폐위된 충정왕을 독살한다. 고려는 전쟁 발발 직전에 무능한 수뇌부를 교체함으로서 스스로의 생명을 연장했다.
과오도 많은 공민왕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영리하고 개혁 의지에 넘쳤으며 나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최소한 나라의 위기에 충정왕보다는 적합한 왕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왜구가 입히는 피해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고려가 세금을 배로 운반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들은 조운선(세금수송선)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 약탈은 정도가 심해져 나중에는 중앙정부 관료의 녹봉이 일년 가까이 미납된 적도 있다. 지방의 관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세금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가장 강력한 행정력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단순한 납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국에서 세금으로 곡물을 징발한 정부는 다시 녹봉이란 이름으로 관리들에게 쌀을 나누어준다.
그 쌀은 다시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그 쌀이 돌고 돌면서 고려의 경제가 순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녹봉이 나오지 않으니 시장 또한 멈춘다. 시중에 쌀이 풀리지 않으니 쌀값이 폭등해 민생은 더욱 흉흉해진다.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첫 단추가 막히니 이후의 산업들도 줄줄이 쓰러진다. 왜구는 경제적 마비라는 형태로 고려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왜구를 막아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100척이 채 안되는 고려의 함대는 전국에 고르게 배치해야 하니, 수도인
개경의 하구를 지키는 배도 20척 남짓하다. 하지만  왜구는 정찰대만도 20척이 넘는다.
공민왕은 분명히 능력 있는 왕이지만, 그는 북쪽에서 준동하는 홍건적을 막기에도 바쁘다.

이런 와중에 400척의 왜군 대함대가 나타나 고려 선박 300여척을 불태우는 사건이 터진다.
전란으로 흉흉한 시대상을 고려해 볼 때, 민간 상선이 300척 씩 모여있을 수는 없다.
아마도 고려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고 있던 함대를 왜군이 눈치채고 불지른 것이리라.
다급해진 고려는 교류하고 있던 중국 남부의 한족 반란군들을 조운선의 호위병으로 고용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왜구의 공격으로 궤멸되고 만다.
용병들 또한 몽골과 싸운 억센 전사들이며, 해적이 득실대는 중국 남부에서 자라 물질 또한 익숙하건만
경인의 왜구들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5년간 고려는 왜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홍건적이 밀고 내려와 개경까지 함락당하는 통에 왜구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안가의 마을은 폐허로 변하고 사람들은 노예로 끌려가 곳곳으로 팔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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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반격

몇 년을 끌어온 홍건란을 힘겹게 진압한  고려는 그제서야 남방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생긴다.
북방의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해 자신감에 차있던 고려군은 왜구와의 전면전을 기획한다.
80척의 함선을 차출하고, 북방에서 돌아온 동북면의 강인한 전사들로 이루어진 특공대는
조운선 호송 도중 인천 앞바다에서 왜구 함대와 마주친다. 80척의 특공대는 50척의 왜구 함대를 향해 거침없이 전진한다.
그러나 고려 함대는 무참하게 파괴되고 선봉의 장수들은 모두 전사한다

귀환한 함대는 20여척이 채 되지 못했다. 그나마도 선봉의 함대가 몰살당하는 동안 병마사 변광수가 후퇴한 덕분이다.
가혹한 현실은 선악의 판단 또한 모호하게 한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병사들을 버리고 도주한 것은 변광수의 죄이지만,
20여척의 함대라도 보존해 개경을 수비하게 한 것 또한 변광수의 공이다.
말로 표현하자면 "변광수가 비겁하게 부하를 버리고 도망친 덕에 고려는 20여척의 함대를 건졌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하와 처벌의 기준이 애매해지고 만약 이랬다라면, 하는 가정이 무의미해진다.
 
해전에서 거듭 패배하고, 간신히 마련한 함대가 매번 불타자 고려 조정 일각에서 해상전투를 포기하고
연안의 육지 방어에만 주력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함대의 증설은 백성들에게 확실히 부담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끝까지 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다를 사이에 둔 적과 싸울 경우, 제해권을 장악하느냐 마느냐는 기동성과 직결된다.
육지 방어에만 주력할 경우 공격 시점과 타겟을 전부 적이 결정하게 된다. 전술적으로 불리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병사가 많아도 모든 해안선을 방어할 수는 없다. 방어기지를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병력이 분산되는 것도 문제이다.
왜구는 바다를 떠돌며 고려를 탐색하고 방비가 약한 지역을 털어버린 뒤에 순식간에 사라진다. 병력을 나눠 놓으면 각개격파당하고
모아 놓으면 주변 고을이 무방비가 된다. 무엇보다 제해권을 상실한다면 이 전쟁을 끝낼 수가 없었다.
이 전쟁은 소극적인 방어가 아니라, 왜구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그 날까지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고려는 간파해냈다.
북방민족의 기병을 고려가 기병으로 잡아냈듯이, 왜구를 끝내려면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바다에서 끝을 봐야 했다.
 
이러한 판단 아래 고려는 무자비할 정도로 함대 증설을 밀어붙였다.
이 때 고려의 계획은 대선 800척, 전함 2000여척의 대규모 군대를 만들어 왜구를 완전히 소멸시켜버리자는 것이었다.
현대의 시점에서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 계획을 주장하고 밀어붙인 사람은 바로 불도저 최영이었다.
북방에서의 활약으로 유명해진 그는 이때 이미 고려 최고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엄격하고 뚝심있고 강직하며 고집 센 장군인 최영은 백성들의 절규와 눈물을 감수하면서 이 계획을 탱크같이 밀어붙인다.
왠만한 국가라도 견디기 힘든 이 엄청난 계획은 수십년간의 전란을 겪은 고려 백성에게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함선 건조, 물자 징발, 병력까지 전부 백성들이 감당해야 한다.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고려의 탱크 최영은 끝까지 이 계획을 고수했다.
 
최영이라고 백성들의 고통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그가 무식하게 쪽수로 승부를 보려는 장군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왜 최영은 2000여 척이라는 엄청난 함대 증설을 계획했던 것일까?
 
고려군의 주특기는 활이다. 이는 고려 수군도 마찬가지이다.
고려의 활은 주변국과 비교해 볼 때 압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활은 2m에 가까운 크기에도 불구하고 최대 사거리가 50m 남짓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에는 거리가 36m 이상일 경우 활은 효용이 없는 무기라는 말 까지 나온다.
 
하지만 고려의 활은 크기 또한 훨씬 작아 휴대도 용이했고, 일반 병사용 활의 "표준" 사거리가 약 150m 남짓 했다. 압도적인 우위다.
이렇다 보니 고려군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원거리 공격이었다.
이런 특징은 각 군의 함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고려군의 함선은 크고 뱃전이 두텁다. 높은 곳에서 뱃전을 성벽처럼 활용해
화살을 쏘는 방식의 전투를 활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군의 주특기는 백병전이었다. 좁고 장애물이 많은 배 안에서는 창보다 칼이 더 유리했다.
더군다나 일본이 방패를 버리고 두 손으로 칼을 잡기 시작하면서 칼의 활용도는 대폭 상승했다.
그 이전까지 칼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살을 벨 수는 있어도 뼈를 끊을 수는 없다' 였다.
 
그러나 두 손으로 쥔 칼은 사람의 뼈를 끊을 만큼의 위력을 가진다. 좁고 걸리적거리는 배 안에서는 창보다 더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그렇다보니 일본군의 전술은 상대방의 배에 접근해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주류였다.
그렇기에 기동성이 떨어지며 투석기의 표적이 되기 쉬운 큰 배보다는 작고 날렵하며 적의 사격을 쉽게 피할 수 있는 작은 배를 선호했다.
(이러한 배의 차이는 임진왜란때까지 이어진다. 조선군의 배 또한 일본군의 배보다 두텁고 컸다)
 
고려는 이러한 장기를 활용하기 위해 산맥과 같은 지형, 또는 성벽같은 지물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서는 적의 양 옆에서 집중사격을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구의 함대 앞에서 고려군 함대를 좌우로 분할한 뒤 왜군을 둘러싸고 사격을 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적 병력의 두 배 정도는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2000여척의 함선을 경기/전라/경상 세 곳으로 분할하면 약 700여 척이 된다. 왜구 함대의 최대 규모가 300~350여 척 정도니
최영의 계획은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전력 분석을 통해 나온 계획이란 것이 증명된다.
 
하지만 그런 전략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계획이 무리한 것은 분명했다.
백성들이 도망가고 상소가 빗발치고 정치인들은 떠들어댄다. 고민하던 공민왕 앞에
중랑장 이희가 나타난다. 이희는 자신이 수전에 익숙함을 어필하며 지금까지 준비한 함대
(당시 최영의 계획은 반 정도 진행되어 있었다) 만으로도 왜구를 섬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나치게 많은 병력은 훈련시키는 데 만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지금 가진 병사의 질을 높인다면 현재 병력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의견의 골자였다. 거듭된 논쟁과 엄청난 비용에 질려 있었던 공민왕은 이희를 칭찬하며 그의 말대로 계획을 수정한다.
 
그러나 이희는 단 한 번의 패전으로 고려가 피땀흘려 건조한 함선을 모조리 수장시킨다.
그나마 간신히 남긴 최소한의 수비함대도 왜구의 유인에 걸려 전부 불타버렸다.
고려가 전 국력을 기울여 기획한 반격은 수도를 지킬 경비함 하나 남기지 못한채 허무하게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