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준비
최영의 계획이 함선증강계획이라면, 이희의 계획은 전력증강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이희가 공민왕에게 계획의 수정을 건의할 때, 이희와 같은 의견을 내던 '정지' 라는 장수가 있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던 그는 이희와는 달리 차근 차근 한 단계씩 전력증강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희가 고려 함대에 몰살 쇼를 펼치는 동안 정지는 고향인 전라도 목포로 내려가 해전을 준비한다.
정지는 해안가 주민들을 징집해 물길에 익숙한 정예 부대를 육성하는 한편, 왜구를 상대할 새로운 전술을 개발해 냈다.
그 계획은 바로 '거철'과 '구철', "철질려"를 활용하는 것인데, 거철은 배 주변에 밀대를 설치해 상대방의 배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구철은 끝부분에 갈고리가 달린 쇠막대로 상대방의 배가 도망가지 못가게 붙잡는 역할을 한다.
질려는 밤송이처럼 사방이 뾰족하게 된 쇠구슬로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땅에 뿌리기도 하는 군사병기다.
정지는 우선 구철과 거철을 동시에 걸어 왜구가 다가오지도, 도망가지도 못하게 잡아두었다.
또한 고려군 배에는 철질려를 깔아두어 왜구가 거철과 구철을 타고 고려군 배에 상륙하는 것을 막았다.
기존의 전술이 그저 왜구의 배가 다가올 동안 화살로 사격하는 방법인 것을 상기해보면 이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전술을 완성했으니 이제는 전술을 사용할 병사들을 육성해야 했다.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거철과 구철을 동시에 사용하려면
상당한 숙련을 거친 병사들이 필요했다. 정지는 오랜 시간을 들이며 병사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최영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함대가 전부 수장되고,
고려에게 남은 함대는 100척 남짓했다. 왜구는 한번에 300척이 넘는 병력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정지의 수군이 아무리 정예병이어도 1:3의 전력을 매번 극복할 수는 없다. 고려에게는 3배의 전력 차이를 메꿀 '한방' 이 절실했다.
이 '한방'에 유달리 주목하던 사람이 있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원나라를 헤집고 다니며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고려로 돌아와서도 중국 상인만 만나면 끈질기게 달라붙어 그것을 알아내려 했다. 중국이 국가 기밀로 감추고
공민왕과 신하들이 요청해도 끝끝내 내주지 않았던 기밀, 화약 제조법을 수십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의 이름은 최무선, 나이는 이미 50줄에 들어선 장년이었다.
화약 제조법을 알아내자 마자 최무선은 바로 정부에 탄원을 넣어 화약제조기관 "화통도감"을 설립한다.
고려에 있던 중국 상인들까지 모조리 징발해버린 화통도감의 목적은 화약이 아닌 "화약병기"의 생산이었다.
이것이 바로 최무선의 진정한 업적이다. 최무선은 불과 3년만에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수준의 화약병기를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그가 기록해놓은 화약병기의 수만 수십종이 넘는다. 종류 또한 다양했다.
고려는 피땀흘려 건조한 함선을 모두 날리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전술의 개발과 정예병의 육성, 비밀병기까지 확보한 고려는 반격을 위한 노력을 하나 하나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경인의 전쟁 최고의 시련이 고려에게 닥쳐 오고 있었다.
5.내륙 침공
경인의 왜구가 진행된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이정도 시간이면 고려군이 어떤 군대인지 파악하는 것은 쉽다.
고려가 자신들을 막을 변변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왜구는 이제 그 손을 내륙으로 뻗친다.
이는 명백한 위험징후였다. 조운선 탈취나 해안가 약탈까지는 피해를 입는 수준에서 그친다.
그러나 내륙으로 들어와 점령을 하게 된다면 이는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우려한대로, 얼마 후 전라도에 상륙한 왜구는 전라도 원수를 죽이고 영산,나주,전주 등 전라도 핵심 도시를 모조리 함락시켰다.
충청도로 들어온 왜구 또한 공주목사를 전사시키고 부여와 공주를 약탈했다.
경기지방 또한 안전하지 않다. 태조 왕건을 모셔둔 개태사가 왜구의 손에 떨어지고 양광도 원수가 전사했다.
홍건적의 침입을 극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내륙의 주민들에게 가혹한 시대가 펼쳐진다.
이제는 왜구를 피해 안쪽으로 도망칠 길 마저 사라졌다. 강을 타고 어디든지 나타나는 왜구는 홍건적만큼이나 두려운 존재다.
사람들은 죽고, 잡혀가고, 물자는 약탈당하고, 사회 기반 시설은 다시 초토화된다.
이 상황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이 나선다. 최영은 병든 싹은 초기에 잘라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왜구가 점령한 충청도의 부여군으로 향한다. 내륙 약탈이 매력적이란 것을 왜구들이 깨닫게 해서는 안 된다.
내륙으로 들어온 왜구는 끝까지 추격하고 완전히 섬멸해서 다시는 내륙으로 기어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뜸을 들여서도 안된다. 진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그동안 다른곳에서 왜구들이 들끓을 것이다.
속전속결, 그리고 철저한 섬멸. 이 두 목적의 달성을 위해 60세가 넘은 노장이자 고려의 최고 지휘관인 최영은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산으로 숨어들어간 왜구를 겹겹이 포위한 최영은 무지막지한 공세를 퍼부었다. 최고사령관인 최영도 화살에 맞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한 왜구가 화살을 쏘아 얼굴에 맞히자 최영은 바로 뛰쳐나와 그 왜구를 사살하고 태연하게 화살을 뽑았다. 이런 최영의 모습은 적들 뿐만 아니라
고려군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최영의 분전으로 고려군은 왜구를 궤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왜구의 내륙 침공은 멈추지 않았다. 내륙 약탈이 주는 이익에 맛을 들여버린 왜구들은 최영만을 피해다니며
다른 지역은 마음대로 노략질했다. 홍산대첩에서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충청도와 전라도가 왜구의 손에 떨어진다.
양광도까지 들어온 왜구는 최영이 건조하던 마지막 함대마저 불사르고 강화도를 점령한다. 최영도 몸이 하나인지라 사방에서 펼쳐지는 왜구의 파상공세에
모두 대처할 수가 없다. 고려는 몽골과 홍건적만큼이나 가혹한 침입에 시달렸다. 기세등등한 왜구는 수도 인근까지 찾아와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고려사]는 이 때 어느 왜구가 남긴 말을 기록하며 시대의 분위기를 전한다.
"우리의 행동을 아무도 금하고 막는 자가 없으니, 이렇게 좋은 땅이 어디에 있겠는가?"
왜구는 곳곳에서 출몰해 사람들을 죽이고 노예로 팔아버린다. 경제는 마비되었고 세금은 걷히지가 않는다.
국력을 기울여 투자한 함선은 한번의 패배로 불살라졌다. 정지와 최무선이 분전하고 있지만, 내륙으로 들어온 왜구들을 상대할 방법은 되지 못한다.
경상남도 진주에 나타난 왜구는 기병 700, 보병 2000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해적이 기병을 수백명씩 보유한단 말인가.
이는 왜구가 기병 1 : 보병 3이라는 정확한 비율을 갖춘 정규군임을 의미한다. 날이 갈수록 왜구의 공격은 거세지고, 그들의 편제는 정교해진다.
세계를 재패한 몽골의 침입도 견디고, 홍건적의 침입과 수차례에 걸친 군벌들의 침략, 반란까지 간신히 견디어 낸 고려는 왜구의 손에 붕괴할 지도 모른다.
6. 불타는 바다
기세등등한 왜구는 마침내 고려 침공의 피날레를 장식할 화려한 공격을 감행한다.
그간 흩어져서 고려를 약탈하던 영주들이 뭉쳐 500척이 넘는 대함대를 조직한 것이다.
당시 고려의 전함은 약 100척. 다섯 배가 넘는 절망적인 병력 차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려는 죽음을 거부한다.
고려가 만신창이가 되고 괴멸적인 타격을 입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가능성들이 마침내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그 잠재력 중 하나가 바로 최무선이다.
몇년간의 준비 끝에 실전배치를 마친 최무선과 화통군은
고려의 비밀병기 화포를 유감없이 사용해 500척의 함선을 모조리 태워 버린다.
경인의 왜구가 시작된 지 30년만에 거둔 해전의 대승이었다.
함선을 모조리 잃은 왜구는 경상도로 진격해 빨치산의 메카 지리산으로 숨어든다. 이 때 고려는 자신이 키워온 또 다른 잠재력을 꺼내든다
공민왕 대에 수복하고, 홍건난을 거치며 단련된 이성계와 그의 강인한 동북군이 바로 그것이다.
북방을 평정하고 왜란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온 이들은 몸을 아끼지 않는 치열한 공격으로 왜구를 말 그대로 섬멸한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신궁이라는 자신의 별명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인다.
일본군의 기본적인 대 화살 전략은 사무라이식 돌진이었다. 무식해 보이나 실제로는 가장 효율적이었다. 일본 활의 최대 사거리는 기껏해야 50m,
유효 사거리는 30m 남짓하다. 즉, 적군이 궁수에게 달려오면 궁수는 잘 해야 한 번 정도밖에 사격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한 번의 사격만 버티면
궁수는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전략은 최고의 궁수들이 포진한 고려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고려 궁사의 '일반적인' 유효사거리만 150m였다. 화살의 위력 또한 일본활보다 월등했다. 그런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냈으니 무사할 리가 없다.
결국 돌격 돌파를 포기한 왜구는 산 위에 틀어박혀 있다가 이성계를 향한 집중 공격으로 활로를 뚫으려고 한다. 아슬아슬한 장면이 거듭 연출되었다.
이성계가 탄 말이 두마리나 맞아 죽고, 이성계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이성계의 바로 뒤까지 돌진해 온 적장을 부하 이두란이 화살로 쏘아 죽이기도 했다.
본래 여러 영주의 연합체로 이루어진 왜구의 군대는 명확한 지휘계통이 없었다. 그것이 이런 위기에는 약점이 되었다. 결국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고귀한 신분이던 소년 장수가 앞으로 나왔다. 고려에서는 그를 아기 장수, 아기바투라 불렀다. 아기바투와의 백병전에서 이성계는 다시 한번 신궁의
면모를 보인다. 아기바투가 전사하자 왜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휘계통을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왜구를 이성계는 협곡으로 몰아넣고 죽였다.
500척의 함선에 실어온 병력 중 살아 돌아간것이 70명에 지나지 않는, 진정한 대 승이었다. 전투 후에 고려가 노획한 말만 1600필이 넘는데,
기병과 보병 비율이 1:3이라는 군편제를 생각해 볼 때, 이 전투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진포대첩과 황산대첩이다. 진포대첩은 최무선의 대표적인 전투로 유명한 해전이며, 황산대첩은 계곡 물을 온통 피로 물들이고
왜구의 목을 친 자리가 남아있다는 '피바위'라는 이름까지 남길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최무선과 이성계 다음으로는 정지가 등장할 차례다.
진포대첩 2년 후 정지는 해도원수로 임명되어 그의 특수부대와 함께 바다로 나간다.
정지가 공민왕에게 새로운 전술을 건의한 지 8년이 지났을 때다. 오랜 세월을 기다린 정지의 특수부대는 진포로 재침입해온 왜군을 박살내며 실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역시 정지와 그의 특수부대가 거둔 이후의 크고 작은 승리 중에서도 역시 가장 빛나는 것은 관음포 대전이다.
진포 대첩 이후 준비를 단단히 한 왜구는 대선만 120척이 넘는 대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야말로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은 전력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고려군 전함의 수는 왜구의 1/3 남짓한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작년에 전염병이 돌아 수군의 절반이 죽어 나간 뒤였다.
비가 와 화기의 사용도 여의치 않은 데다 바람의 방향도 고려에게 불리했다. 경상도에 출몰한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전라도에 주둔하던 정지의 부대는
밤을 새워 달려와야 했다. 왜구 또한 단순히 병력만 늘린 것이 아니었다. 고려군의 함선에 필적하는 크기의 거대한 함선을 주조해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노렸다.
정지는 남해와 광양, 여수 사이의 좁은 바다로 들어가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이곳의 다른 이름이 바로 노량 해협이다.
몇 백년 후 최고의 제독을 맞아들이게 되는 이 바다는 전략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다.
정지는 이곳에서 최무선에게 받은 비밀병기를 빼어든다. 우리가 현재 흔히 보는 '폭발하는' 대포는 근대의 산물로, 임진왜란 떄까지만 해도 화포는
커다란 돌덩이를 날려 배를 '부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하지만 1:3의 전력 열세를 상정하고 만든 정지 부대는 이보다 더 강력한 '한방'의 위력이 절실했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바로 화통이다. 화약을 반죽해 통에 집어넣은 다음, 불을 붙여 던지면 폭발하는 이 무기는 전력 열세를 뒤집을만한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데 왜 왜구는 이 좋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화통이 고도로 훈련된 부대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특수병종이었기 때문이다.
화통의 진짜 문제는 폭발 타이밍을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화통마다 들어간 화약 반죽 상태와 함유물이 조금씩 다르니, 대충은 예측해도 도대체
언제 터질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던지면 적이 통을 갑판 밖으로 밀어내 버리니 아까운 화약만 날리는 꼴이 됐다.
결국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통을 머리위로 치켜들고 타이밍을 계산해 던질 부대가 필요한데, 이 일만을 위해 고도로 훈련된 정지 부대와 달리 왜구는
이런 병종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잘 이겨 왔으니까. 절박함의 차이라고 할까.
정지는 이 희귀한 특수병종을 충당하기 위해 자신의 특수부대 말고도 사원의 승려들을 징발했다. 어떤 사람은 덧없다고 생각하는 승려들의 종교적 수양과
사명감은 이 때 그 위력을 발휘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통을 신호가 오기 전까지 계속 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는가.
정지와 그의 특수부대, 승병들은 이 전투에서 8년간의 훈련 결과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구철과 거철로 일본군 함선을 옭아매고 화살 세례를 퍼부었으며,
화통을 던져 배를 폭발시켰다. 화통을 피해 고려군 함선으로 올라온 왜구에게는 철질려와 창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발한 전술, 고도로 훈련된 부대, 새로운 무기
라는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 결국 노량의 싸움에서 고려군은 수백척의 왜구를 전멸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이 승리, 흔히 '관음포 전투'라 불리는 이 해전은
고려가 기나긴 악몽의 터널을 빠져나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전투로 고려를 반세기동안 괴롭혀 온 '경인의 왜구'는 사실상 소멸한다.
만약 누군가 이 부분을 영화로 만든다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서로를 오버랩하는 방식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수십 년간 중국을 돌아다니며 화약 제조법을 알아내려던 최무선의 모습과 진포 대첩 이후 불타는 바다를 바라보던 화포군의 모습
홍건적에게 개경을 함락당해 떠나가던 이성계의 모습과 황산 대첩에서 왜구를 섬멸하는 이성계의 모습.
자신이 키운 함대가 불타는 것을 바라보는 최영의 모습과 그 이후 정지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관음포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
자신을 목놓아 부르는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병마사의 모습. 자신을 강간하려는 왜구에게 저항하다 팔다리가 모두 끊어져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바라보다 수군에 지원하는 최극부의 모습. 시중의 아들이었던 이옥이 말단 병졸로 왜구와 싸우는 모습. 풀 한포기 남지 않은 고향을 떠나 자원입대하는 소년의 모습.
관음포 해전의 승리 이후 그들이 느꼈을 감정을, 감히 글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관음포 해전으로 고려를 들끓게 하던 경인의 왜구는 대부분 소멸했다.
이후에도 간간히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그들은 두번다시 전면적인 내륙 침공의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몽골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려는 14세기의 마지막 순간을 성공적으로 넘겼다.
생존을 위한 발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낳았다. 다급한 상황은 고려가 자신의 잠재력마저 총 동원하게 만들었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고려는 이를 극복할 유능한 인재들을 생산해냈다. 정지(전라도), 이성계(함경도), 최무선(경상도)는 출신도, 고향도 서로
달랐지만 모두 전쟁영웅으로 활약했다. 한 명의 인재도 아쉬운 고려는 특정 출신이나 세력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정지가 키운 정예군은 이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하사관이 되어 새로운 수군들을 양성한다.
이들의 활약은 전설이 되어 조선시대까지 내려온다. 심지어 60이 넘은 이 특수부대들의 실력이 현역 수군보다 월등히 좋으니 다시 징집하자는 논의가 조선 조정에서
나올 정도이다.
최무선이 집대성한 화포는 이후 발전을 거듭해 조선군의 든든한 전력이 된다.
이후 4군 6진 개척에 쓰인 신기전과 임진왜란때 쓰인 천자총통 또한 모두 최무선과 화통도감의 연구를 발전시킨 성과이다.
최영은 그 강직함과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으로 살아있는 전설이 된다. 고려의 기둥이라고 불리던 그는 죽고 나서도
무속신앙에서 신으로 추앙받는다.
이성계와 그의 동북군은 고려에서 가장 강한 무장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성장한 이 집단은 결국
고려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이 한국 군제사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획기적인 변화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이 시절 보냈던 그 피 묻은 시간을 고려는 낭비하지 않았다.
고려는 일본이 곧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가진 나라로 성장하리란 것을 예측했다.
그런 인식의 변화로 고려는 북방민족 중심의 방어관에서 탈피해, 일본을 전략적 주적 개념에 포함시켰다.
남부의 군사기지와 전략 요충지, 방어 기지가 일본과의 전면전을 상정해 대폭 개정되었다.
편제상으로 육군 뿐이던 군대는 육군과 수군을 갖추게 되었고 수군지휘부와 수군 기지가 탄생했다.
병력도 크게 증강되어 지방군의 70%가 수군으로 편제되었고 해상전술 또한 발전을 거듭했다.
고려와 조선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상정한 해군전술을 계속 유지했다.
비용이 많이 들고, 군역이 피해가 심하다는 불평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때까지 이 전술을 악착같이 고수했다.
200년 후 이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과 조선해군의 활약은 이미
이 날, 관음포에서, 진포에서, 황산에서.
바로 이 시대의 불타는 바다 위에서 시작되었다.
(최영 홍산 대첩)(이성계 황산 대첩)(최무선 진포 대첩)(정지 관음포 대첩)의 위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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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라 멸망모습은 조선 말기 모습이야.
부조리한 체제, 썩어가는 조직, 서서히 병들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변변한 반항도 못하고 강국에게 먹혀버리는.
나는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어. 조선이 장기가 썩어서 끙끙 앓다가 죽어버린 병자라면
고려는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야.
나는 그런 발버둥이 추하다고 생각 안해. 오히려 끝까지 살기 위해 모든 잠재력을 쏟아내는 고려가 더 마음에 들더라.
어쩌면 고려가 조선보다 덜 체계적이어서 그럴지도 몰라. 고등동물은 장기 하나만 고장나도 죽을 수 있는데,
하등생물은 생존을 위해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변하고 환경을 흡수하니까.
고려가 좋다 조선이 좋다 이런 의미없는 말은 안 할게. 나는 역사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는 거라 생각하거든.
다만 나는 보여주고 싶었어. 이렇게 멸망한 나라도 우리 역사에 있었다고. 망해가는 그 순간까지 발악하던 나라도 있었다고
고려에 관심 많은 사람으로서 고려의 이런 치열한 면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쉬워. 동북9성 얘기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얘기고
경인의 왜구도 그냥 해적떼정도로 생각되는 경향이 많거든..
이제 거란전쟁, 여진전쟁, 홍건적, 경인왜구를 끝으로 역사 얘기는 아마 끝일 것 같아.(몽골침입을 안 썼긴 하지만 )
밤새우며 써서 그런지 필력이 영...생각만큼 안나오네. 그래도 감상 하나씩 달아주면 고맙겠어
감상 보는 재미로 쓰는게 반이라 ㅋㅋㅋ. 0점이든 50점이든 일단 시험지를 냈으니 채점 결과가 알고 싶네.
상황 설명은 [전쟁과 역사] 많이 참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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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까지 본 고려사 관련 인터넷 포스팅중 원탑인 글이야
심지어 내가 읽은 고려사 관련 책 중에서도 이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글은 없었어
독갤러들도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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