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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괴델 에셔 바흐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란 책에서는 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책을 읽고 란 복잡한 층위들이 뒤엉킨 이상한 고리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문제없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모순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는데, 모순이란 이 뒤엉킨 층위의 자기지시적인 모습을 한번에 바라볼 때 나타나며 이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2. 모래의 여자

부락에 갇히기 전 남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사회와 사회 밖으로 나뉘어진 세계였다. 그렇게 두 장소가 구분되어 있을 때 남자는 왕복표를 쥐고 두 장소를 왕래할 수 있었다. 휴가마다 사회 바깥으로 나가며 곤충채집을 하는, 그것이 남자가 생각하는 였다.


"신종 하나만 발견하면, 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기록되어 거의 반영구적으로 보존된다. 비록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이기는 하나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P15


그러나 부락에서의 경험을 통해 남자는 자신이 살던 사회와 부락이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된다. ‘가 믿고 있던 세계의 질서가 뒤엉킨 곳을 마주한 순간 남자의 자아는 혼란에 빠진다.


분명 적과 우방으로 구별되어 있던 작전 지도가 뿌연 중간색으로, 수수께끼 그림처럼 정체를 알 수 없게 모호해지고 말았다."P212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뫼비우스의 띠는 이런 뒤엉킨 계층질서를 형상화한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이 결국 한 몸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보면 안과 밖이 구분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모순이 발생한다.

남자가 세상이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었을 때, 남자의 기차는 끊어진 띠 위에서 안과 밖을 오가며 왕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안과 밖이 서로를 가리키는 뫼비우스의 띠임을 알게 된 순간 기차는 안에서 안으로만, 또는 밖에서 밖으로만 오로지 편도로 달릴 뿐이다.


"편도표란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 없는 생활을 뜻한다."P154


사회와 부락을 가르던 유일한 가치인 자유의 허구성을 깨달은 남자의 자아는 허무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남자는 자기부정의 에너지라는 것을 생각한다.

더 이상 체계의 끊어진 부분을 맺기 위해 고민하지 말고, 그저 체계를 모순인 채로 놔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를 부정하고, 노동의 가치를 찾지 않고, 노동의 목적을 노동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 아닌 더 교묘한 자아로 숨어들어가는 것이다. 자기부정의 에너지란 단어 자체가 퇴화적인 이미지를 암시하는 지극히 자아적인 관점에서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여자에 대해 남자는 강한 혐오감을 느낀다. 자기를 잊은 채 그저 살아가는 여자의 모습은 남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벌레의 모습과도 같이 보인다.

결국 남자는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할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낸다. 모래 속에서 물을 추출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이에 몰두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는 모래 속에서 물과 함께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발굴해 냈는지도 모른다."P224


작가는 마치 자아가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목소리처럼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3.

많은 통찰력 있는 소설들은 기존 체계의 허구성이라는 관념을 끄집어내 형상화한다.

그런데 체계의 모순을 바로 체계 안의 언어들로 만들어 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래의 여자>의 경우 분명 남자의 언어로 글을 풀어 나가는데 남자의 관점이 뒤엉키는 부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아베 코보는 체계 속의 부분들을 선택적으로 모아 소설을 엮었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 전체에서 체계의 자기지시성은 한눈에 드러나고 모순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카프카 소설의 악몽같은 느낌이나 감정들을 통해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분명 소설 속 부분적인 언어는 그것을 가리키지 않는데, 소설 전체로 바라보면 이상한 고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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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래의 여자가 가리키는 것

아베 코보가 묘사해낸 뫼비우스의 띠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의 허구성일까? 현대 사회에서 남자가 향유하던 자유가 낡은 새끼줄 조각에 다름없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그런 것은 이미 많은 소설 속에서 다루어져 왔으며 <모래의 여자는> 그 이상의 것을 지시하고 있다. 오히려 모래의 여자에서는 모든 체계들이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현대 사회의 의미 없음뿐 아니라, 체계라는 것 자체가 같은 층위 아래서 서로를 지시하고 있는 닮은 꼴임을 언급한다.


"어떻습니까?......나는 인생에 기댈 언덕이 있다고 하는 교육 방법이, 도무지 미덥지가 않은 데-그러니까, 없는 것을 말입니다.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환상 교육이죠.......그래서 모래가 고체면서도 유체역학적인 성질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는 점에 아주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p96


<모래의 여자>는 그런 것 보다는 자아의 모순성 그 자체에 대해 말한다. 이런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라도 갈망할 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자아의 모순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독은 환영을 좇기에 충족되지 않는 갈증인 것이다."P203



5. 소설에 대해

자신이 알던 세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공중에 띄워진 누각 같은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된 후에도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답하기 전에 또 하나의 허구(2)가 있다.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허구(2)라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은 현실의 언어로 허구의 것을 묘사해낸다. 모래에 파묻힌 부락같은 것은 현실적인 언어의 언급을 통해 책 속에서 살아있게 된다. 소설의 체계 안에서만 말이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기이한 부락의 모습과 비인간적인 전통 소설 속 현실 안에서 살아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덮고 실제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소설 속 허구와 현실이 모두 소설이라는 허구(2)의 영역 아래서 서로를 가리키는 자기지시적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실존주의 소설들이 묘사하는 실존적 위기나 심각한 모순에서 빠져나와 삶 속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6.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몇 작품들은 소설이 이렇게 살아있게 되는 방식에 대한 일종의 메타 소설이다. 보르헤스는 현실의 부분들을 선택적으로 모아 현실 위에 틀뢴을 띄워올린다. 그리고 독자가 다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로 되돌아오면, 독자는 자신이 믿던 현실이란 무엇인지, 소설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보르헤스가 선택한 현실속 부분들은 소설레퍼런스이다. 소설은 허구에 속하고 레퍼런스는 현실에 속한다. 허구와 현실 두가지 계층을 소설의 허구(2) 속에 끌어들이다. 허구에 층위에서 가상의 행성을, 현실의 층위에서 그 행성에 대한 레퍼런스를 통해 현실 위에 틀뢴을 띄워올린다.


우리는 어떤 것을 현실이라고 믿을까? 사람들이 많이 믿어 증언되는 것. 사전에 기록된 것. 레퍼런스에 나온 것. 보르헤스는 이런 현실의 모호한 틈새를 잘 파고들어 정말 절묘하고 기교넘치는 방법으로 가상의 허구들을 공중에 띄어 올린다.


그러나 이 두 계층은 결국 보르헤스 소설 속의 허구(2)일 뿐임을 우리는 안다.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면 허구와 현실이 소설이라는 허구(2) 아래서 서로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전체성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암시받는다. 소설은 스스로를 지시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허구인 자신을 공중에 잡아 현실 위에 띄우려는 시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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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두 개의 허구성

모래의 여자는 자아의 허구성에 대해, 보르헤스의 몇 소설은 소설의 허구(2)성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두개는 하나의 표현된 체계라는 것으로 묶인다.

모래의 여자에서는 결국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 또한 하나의 에고이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언급을 통해, 남자의 곤충채집, 모래에서 물 추출하기 등의 행위를 소설 쓰기라는 것 전체와 연결시킨다. 그러면 남자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소설쓰기라는 것 자체에 대한 고민이자, 작가 자신의 고민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도 있게 된다. 소설쓰기란 그 자체로 허구인 자기 자아를 잡아 현실 위에 띄우려는 시도라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즉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쪽이 되고 싶다는, 자기를 꼭두각시와 구별하고 싶은 에고이즘에 지나지 않죠."P1



8 체계에서 벗어나기

소설 속 남자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로 고통 받는다. 자신이 밝혀낸 허구성에 대해 현실과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자기 부정을 하고 자신이 벌레라는 것을 인식한 채 하루하루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소설 쓰기를 그만두는)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보르헤스의 가상의 행성처럼 더 절묘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모순들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면(더 통찰력 있는 소설을 써 내면) 어떨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저 끝없는 반복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남자가 고통받는 이유가 이 어떻게 할까?”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9. 현실로 돌아오기

우리는 왜 이 모든 자기지시적인 체계들이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까? 왜 남자는 실존적 모순에 빠져 뇌 회로가 타버리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는 보르헤스의 가상의 책과 인물들이 정말 기교넘치고 절묘하기는 하지만 결국 픽션일 뿐임을 알 수 있을까?



10.

선불교의 공안들은 이렇게 생각의 문득 끊어진 곳을 가리킨다. <무문관>이란 이런 공안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인데 의미없는 문구들로 가득하다. 'gateless gate'라는 영제는 뫼비우스의 띠나 경이로운 현관을 떠올리게 한다.


<모래의 여자>속 남자의 고민들과 여러 역설들은 체계의 언어들을 선택해 하나의 자기지시를 보여주며 그 체계 아래서 어떻게 할지를 묻는다. 그러나 공안집은 이런 자기지시적인 문구들을 모아 엮어 자기지시에 대한 메타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오히려 의미가 끊이진 곳 자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그저 뫼비우스의 띠인 채로 놔두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는 아무리 현실을 끄집어내 활자로 펼쳐놔도 그것은 이미 빛바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현실 위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패러독스를 읽고 컴퓨터처럼 회로가 붕괴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현실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


자신이 믿던 세계가 무너져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처음부터 절벽에 매달려 있던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선불교적 관점으로 남자에게 조언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벌레같은 마음은 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