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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루아는 캐나다 출생으로 데뷔작인 "싸구려 행복"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궁핍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삶을 다룬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수녀원에 가거나 군에 입대하고 보다 더 여유로운 상대와 결혼하는 등 매번 이상과 타협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루아의 소설은 첫 소설의 이런 기조를 계속 유지하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어떻든 인물들은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초기작의 고발적인 느낌이 옅어지면 그 선택의 결과가 살아보지 못한 삶의 대체, 뜻대로 선택하지 못한 대안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기의 단편집 "세상 끝의 정원"은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중국계, 프랑스계, 러시아계, 우크라이나계... 외딴 캐나다 평원 지대에 정착한 숱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구름 떼처럼 많은 인부들 중의 한 인부로 부두에서 일하는 한 알갱이의 인간', 저녁에 기어들어가는 캄캄한 침소에서야 '겨우 한데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의 다중성에서 잠시 헤어나는' 중국인이었던 삼리웡은 희망의 땅으로 생각한 곳에서도 외로운 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곳의 삶과 마주한 인물들은 자기 앞에 놓인 길이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 어디에 어떤 돌멩이가 있고 얼마나 소박한 길인지를 잘 알고 있다. 지평선을 내다보듯이 훤히 보인다. 그런데도 그 길을 밟아본다. 땅값이 올라 운영하던 식당을 넘겨준 삼리웡은 머물 곳이 없는 처지가 된다. 그는 고향을 죽어 돌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디를 가든 다 늙어버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차에 앉은 삼리웡은 저 미개지에도 또 다른 마을이 드문드문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또 한 번 식당을 차려보기로 한다. 창문에 비누로 간판을 쓰고 바깥에 나와 보니 원래 살던 곳에서 늘 보였던 산맥의 반대편 부분이 보인다. 먼 산맥 하나를 건너다보듯이 가브리엘 루아 소설의 인물들은 옛 기억이나 전설, 풍광 등에 기대어 고된 삶을 이어나가는 것 같다. 싸구려 행복으로 거둔 첫 성공 이후로 루아에게는 무관심이 따라붙었고 만년에 건강도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낙차 속에서도 글을 썼다. 가브리엘 루아의 소설이 대체로 일관된 주제를 말하고 초기의 구상과 개인적인 회고를 계속해서 다루는데도 반복이나 정체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렇게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쓰고 있는 글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이미 아는 길을 확인하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삶이 한 선이라면 이미 쓰여진 것이 수십 년 뒤에야 출간되었을 때는 어디에 점을 찍어야 할지 어렵다. 루아의 글쓰기는 보측을 닮았지만 하퍼 리의 경우는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멈춰 선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의 연표에는 두 편의 소설뿐이다. 루아와 마찬가지로 첫 작품이 크게 성공했지만 이후로 그런 일은 다시 없었다. 다만 하퍼 리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았는지 거의 절필을 했다. 앵무새 죽이기에는 한밤에 몰려온 사내들과 대치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어린 스카웃은 안부를 물으면서 이 사람들을 돌려보낸다. 캄캄하고 소리도 없는 밤에 당신과 자녀의 이름을 발음함으로써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런 식으로 앵무새 죽이기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선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전에 쓰여졌던 "파수꾼"을 보면 싸구려 행복의 경우처럼 첫 소설에서 작가가 이미 세계 인식을 마쳤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웠던 경험은 분리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어 있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다른 모든 점만은 그대로이면서 백인 권리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마을은 가까웠던 흑인 가정부가 남을 대하듯 낯을 바꿀 정도로 인종 문제의 각축장이 되었다. 파수꾼은 그렇게 다같이 나를 속이는 듯 돌변한 공간 속에서 어린 스카웃이 삶의 지침처럼 삼아 왔던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이나 변절이라는 건 그에게 따개비처럼 붙여진 어떤 것이다. 세간의 평가는 좋지 못하지만 파수꾼에서 세상의 양가성과 화해하는 과정에는 최소한 그 나이에만 글로 써낼 수 있는 진정이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 길을 더 밟아 보지 않았다. 나중에야 세상에 낸 파수꾼에는 작가도 예상했을 혹평이 이어졌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절필의 사정에 대해 앵무새 죽이기의 성취에 편집자의 공이 크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마디로 온전한 자기 글을 내놓기 두려워서 더이상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퍼 리를 생각하면 그렇게 절하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사실 전작이 걷잡을 수 없이 성공한 상황에 그 메세지를 한 번 깨트려야 하는 이야기를 감히 내놓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만년까지 쓸 수 있었다면 어떤 글이 나왔을지 궁금하지만, 쓸 수 없었다기 보다는 쓰지 않기를 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참고한글

https://blog.naver.com/woomi9/20001724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