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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책 『우리의 학맥과 학풍』
이 책은 철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기자 출신 저자가 1995년 출간한 책을 복간한 것이다. 본문에 실린 2022년 대담에 따르면 도발적인 '실명 비판'으로 당시 꽤 주목받은 책이라고 한다. 특별히 내용을 손 본 부분은 없지만 이 책이 지닌 가치는 여전하다. "과연 대한민국의 학문의 뿌리는 어디이고, 어떤 상태였으며, 지금은 어떠한가?".
저자는 전통학문, 동양철학, 서양철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의 계보를 좇아 자신의 답을 제시한다. 안타깝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대한민국 학문이 표절 덩어리이며 유행에 쉽게 휘둘린다는 것이다. 물론 암석에 숨겨진 원석 같은 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대한민국 학문사는 저열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현재에 와 반추해보면 이런 작태는 조금 나아졌을 뿐 크게 개선된 것이 없어 보인다. 학자뿐만 아니라 정치인, 연예인 등 매체에 나오는 온갖 인물들이 논문 표절 논란에 휩싸이는 꼴을 매년 수 차례 우리는 목격하곤 하다. 또한 저자가 더불어 강조한 '번역 문제'도 여전하다. 유명 교수라는 사람이 번역한 어떤 책은 기본적인 문법부터 엉망이라서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외계문서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일도 우리는 자주 겪는다. 따라서 평범한 교양 독자와 갓 대학에 들어온 학생부터 학자들까지 학문을 우리말로 못 해 학문의 주권성이 침해받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학문윤리의 확립은 결국 학자들과 학자사회의 몫이다. 대한민국의 국제정치적, 문화적 위상에 비해 학문적 위상이 낮은 것은 어느 정도 그 도덕적 해이에서 유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번에 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양심있는 사람들을 따돌림 하는 행태에 대한 외부의 제재가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책 『심장지대』
이 책은 영국의 지리학자 해퍼드 존 매킨더가 저술한 3개의 글을 엮은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1919년에 쓰인 「데모크라시의 이상과 현실」인데 여기서 매킨더의 주요 개념인 '심장지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매킨더의 주장을 간략하게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동유럽을 지배하면 심장지대를 호령하고, 심장지대를 지배하면 세계도(世界島, 아프로-유라시아)를 호령하고, 세계도를 지배하면 전세계를 호령한다".
그는 고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심장지대를 차지했던 세력이 부흥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심장지대를 차지하지 않고 부흥했던 제국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매킨더가 전혀 해명하지 못 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뒷부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심장지대 이론은 독일과 러시아 사이 세력균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나는 추측한다. 실제로 매킨더는 역사상 심장지대에서 유일하게 거대한 인구집단을 가진 나라가 러시아라는 점을 인정했고, 독일의 동유럽에 대한 야망이 자유세계에 큰 재앙을 불러올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매킨더의 이론이 가진 의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림랜드 이론 등 지정학 발전에 기여한 공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처음으로 세계를 대륙의 모음이 아니라 세계도와 같은 섬의 모음으로 보았고 그 섬들과 섬 내부의 지리적 특성이 어떻게 국제정세에 영향을 끼치는지 밝히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세 번째 책 『세계질서와 문명등급』
이 책은 중국계 미국인 비교문학 학자인 리디아 류를 중심으로 '문명등급'의 탄생과 파급력에 관한 여러 분야의 중국 학자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리디아 류의 「국제법 사상의 계보: 문야(文野)의 구분에서 전지구적 통치까지」였다. '문명등급'이란 서구인들이 세계인을 '문명화' 수준에 따라 나눈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는 세 개의 등급으로 나뉘는데 문명인, 반(半)문명인 또는 몽매인, 야만인이 그 분류이다. 이러한 분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연원했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최초로 조약을 통해 세계를 둘로 나누었고 야만인이 사는 지역은 모두 그들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전유럽으로 번졌다. 그러나 분명히 국가와 복잡한 조직체계를 가진 사람들을 서구인이 만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야만인이 아닌 이들의 땅을 마음대로 점령할 수 있는가?". 서구인은 문명과 야만인 사이에 반문명이란 개념을 만들고 이들과는 조약을 통해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을 개발해 문제를 해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식민제국들이 해체를 맞이하고 민족자결권과 보편적 인권이 부상하면서 문명등급은 명시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과 여전히 남아있는 문명등급 의식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UN회의에서 식민제국들은 식민지에 보편적 인권을 적용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 이유는 식민지인들이 '고등문명'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물론 이는 제3세계 국가들의 큰 반발을 받았고 수용되지 않았다. 저자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개념 속에 여전히 문명등급 의식이 내재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는다. 서방국가가 다른 나라에 개입할 때 흔히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그 보편적 인권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국제인권규약' 중 법률적 구속력이 있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비준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다. 나는 리디아 류의 글을 읽고 내 마음 속에도 혹시 보편적 인권으로 위장한 문명등급 의식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인권 유린을 가만히 내버려 두자는 의미는 아니라는 게 저자나 나나 같을 것이다.
한편 다른 중국학자들의 글을 보면 오늘날 중국인들이 왜 서방세계에 대해 반감을 갖는지 알 수 있다. 이른바 '백년국치' 시기에 중국이 겪었던 피해가 그들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를 야기하는 게 아닌가 나는 추측한다.
네 번째 책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이 책은 『케인스 하이에크』를 썼던 영국의 언론인이 후속작으로 낸 것이다. 저자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구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구해서 집필했다는 점이다. 그는 단순히 공개된 정보만이 아니라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사적인 내용까지 수집하는 열정을 보여줬다.
내가 읽으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의 흥망성쇠'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아탑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새뮤얼슨보다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자신의 이론을 현실에 관철시키고자 하는 프리드먼의 행적에 눈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케인스주의 학파인 새뮤얼슨과 신고전학파인 프리드먼의 싸움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결론은 프리드먼이 졌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통화공급을 중앙은행의 재량이 아니라 정해진 양으로 일정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 방법이 물가를 안정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레이건 정부와 대처 정부에서 실시됐지만, 레이건 정부는 공급주의 학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사실상 실시되지 않았고 대처 정부는 엄청난 실업자를 양산하면서 통화주의 정책을 포기했다. 그의 이론이 현실에 맞지 않다는 게 증명된 것이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관점은 케인스주의에 의해 무시됐던 통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으며 현재 거시경제학에는 그의 이론의 영향이 남아있다. 어쩌면 프리드먼은 승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야 참 독특한 책들을 읽는구나
박사게이노......?
박사게이 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