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의외로 괜찮았음.
<시를 쓰는 이유>라는 시였는데,

시를 쓰는 과정을 말의 덜어냄으로 표현했고,무당벌레의
날갯짓에 비유한 게 작위적인 티가 나지 않고 자연스러웠음.



하지만 기사를 마저 읽어보고 나는 솔직히 조금 역겨웠음.
누군가 처음 접하면 시인의 창작 초기 순수한 감정을 묘사한
시로 보일 수도 있었던 글이 사실은 국문학 시 1만 2천편을 학습시키고 임의로 조합해낸 결과였던 것임.
그리고 특정 주제를 입력하면 기계적으로 0과 1을 사용해서 일종의 '연산 과정'을 거쳐 30초만에 시를 뽑아낸다고 함.

솔직히 말하면 이런 시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음.
어디까지 인공지능의 예술적 영역이 확대될 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에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기계적 제어판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실수와 망각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예술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이라 생각함.

괴테는 60년에 걸쳐 그만의 고유한 문학관,예술론,철학으로
필생의 역작 <파우스트>를 완성했으며,릴케는 전쟁 이전
두이노 성관에서 고독을 맛보며 이뤄낸 첫 비가에서 전쟁을
거치며 인간의 존재 이유와 본질을 고민하며 장장 10년에
걸쳐 <두이노의 비가>를 끝맺었음.
그런 의미에서 시는 그러한 인간의 일생과 정신적인 고뇌,
그리고 사상적 배경의 산물이기 때문에 로봇이 문명을
이루고 인간과 같이 진화하며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이상
오직 인간만이 이루고 또 느낄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하는 것.

만약 전술한 바와 같이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이 인위적인
것이 아닌 원초적인 감정을 학습하고 그것을 예술적 감각으로
소비하는 때가 온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시인이라
부르고 그들의 시에 울며 기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시를 보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그 시인이
살아온 인생을 보고 그것을 시에 투영하여 감정을 공유하는
것일 지도 모르고(사실 이게 맞는 것 같음.앞서 말한 릴케는
그의 50년 생애를 시적 방랑과 적막한 고독 속에 살아왔고
나는 그 영향이 고스란히 묻어난 시를 좋아하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 문제는 인공지능이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감정을 느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만의 고유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의 문제가 될 듯 함.

갑자기 생각이 나서 휘갈긴 글이라 어휘나 문장 구조가 번잡해도 양해 부탁함.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고 다른 의견도 존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