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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은 조선에 서학이 들어오게 된 경로와 그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쳤던 마테오 리치의 행적을 소개한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여러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한역서학서와 세계지도가 조선에 미친 영향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지봉 이수광은 마테오리치의 한역서학서를 『지봉유설』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또한 김만중은 세계지도를 통해 기존 중화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세로운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33~34쪽)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세로운 세계인식을 가로막는 장벽은 중화사상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세계관이라고 평하였다. (35쪽)
2장은 17세기의 조선 서학의 전개 과정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명청교체기였던 17세기에 서학 전래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정두원이었다. 정두원은 선교사 로드리게스에게 『직방외기』, 『만국전도』 등의 서학 자료를 받아 조선에 소개하였다. (51~56쪽) 또한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교류와 시헌력의 도입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하멜 일행과 같은 기술자 집단의 조선 표류도 17세기의 중요 사건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를 도쿠가와 막부의 난학 수용과 비교하며, 조선 정부의 수동성과 당시의 서학에 대한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70~75쪽)
3장은 18세기의 조선에서의 서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시헌력의 수용과 함께 서학 수용에 있어서 성호 이익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의 문집에서는 여러 서학서가 검출되고 있으며, ( 97~100쪽) 특히 이익은 기존 중화중심주의를 수정하여 사이(四夷) 중에서도 가령 성인이 복생(復生) 하더라도 따라야 할 문화가 있다는 것을 대담하게 주장하여 서학 수용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라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104쪽) 그러나 이익은 서교는 비판하면서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적 충돌을 회피하면서 서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107쪽)
신후담과 안정복의 천주교 비판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특히 『천학문답』의 내용을 정리한 부분은 주목할 만 하다. (119~122쪽) 저자는 신후담과 안정족의 서학 비판에 대해 ‘서교에 댜한 내제적인 비판을 통하여 그에 맞설 수 있는 유교적인 논리의 위치를 확고히 정립한 것’ 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22쪽)
다음은 북학파의 서학 수용에 관한 것이다. 홍대용은 서학을 통해 세로운 세계관을 정립했고, 박지원 등도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서학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부학파들은 연행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얀행록을 남기고 있는 특징이 있다. (138쪽)
특히 박제가는 서사초빙책과 해외통상책을 정조에게 건의하고 있는데 박제가는 여기서 西士들의 표교활동만을 금지하고, 그들의 지도하에 서학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데, 자지는 국가적인 대책이 있다면 현실성이 있는 정책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145쪽) 전반적으로 저자는 박제가의 서학수용책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44~145쪽)
4장은 정조대의 서교수용과 갈등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서학을 접한 성호학파의 학인 중 이승훈, 이벽 등의 주도로 조선 천주교회가 세워지고, 이에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 신서파 세력과 서교에 반대하는 이기경, 홍낙안 등의 공서파 세력으로 남인계가 나뉘었고,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이로 인해 이승훈, 정약용 등은 처벌받았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로 인해 남인 세력이 몰락하고 서학 수용이 위축된 후에도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용감의 설치 등을 통해 서학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종장은 신유박해 이후의 서학 수용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신유박해 이후에도 조선교회는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 역시 지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이규경과 최한기가 서학 수용에 긍정적이었지만, 서양 세력의 접근에 도통을 중시하며, 위정척사 운동을 펼쳤던 이항로 등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1~195쪽) 결과적으로 17세기 이후의 서학 수용이 상당한 반발에 직면했으며, 이는 개항 이후에도 이어져 서학을 수용하기 위한 확고부동한 정책이 결여되었고, 자립, 자존의 근대화의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선구적인 사상을 지닌 선각자들의 사상은 이어져져왔으며, 이를 더욱 발굴하고 가다듬어 조선사상사를 풍부하게 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202~203쪽)
보론 1은 정약용의 서학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다산은 그의 경학사상에서 마테오 리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상제’ 라는 유일신적인 천관과 부합되며, 안성론도 성즉리으ㅔ 가초한 성리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214~216쪽) 결론적으로 저자는 정약용이 예수회의 보유론적인 천주교리의 영향을 받아 그의 경학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고 보고 있다. (217쪽)
그러나 정약용은 천주교의 제사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진산사건을 계기로 서교와 결별하였고,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정약용은 신서파의 서학파에 속한다. (해당 표는 221쪽)
정약용은 『천주실의』나 『칠극』 같은 천주교리서를 읽었을 뿐 아니라 정조에게 올린 자명소에서 광범위한 과학기술서를 읽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22쪽) 따라서 저자는 정약용 사상에서 서학의 영향을 받은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지원론(地圓論)적 세계관에 의거하여 화이론의 세계관을 부정한 것이고, (223~224쪽) 둘째는 기술개발과 그에 의한 성력화(省力化)에 관한 과학적인 견해로, 저자는 그 예시로 이용감을 들고 있다. (224~227쪽)
결론적으로 다산의 경학은 서학의 보유론적 논리를 이용해 더 풍부해졌지만, 효론(孝論)에 있어서 다산의 경학과 『천주실의』의 효론은 상충된다. 천주를 상부(上父), 군주를 중부(中父), 가군(家君)을 하부(下父)라 하고, 하부를 거역하더라도 상부를 따라야 함을 주장하는 효론은 효제가 인륜의 근본이라는 정약용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228쪽) 그러나 정약용의 서학 수용과 그의 과학적인 사상에 대해 대해 ‘코페르니쿠스적인 진화를 가져올 수 있는 획기적인 사상’이라고 고평가한다. 동시에 신유박해와 위정척사 운동 등으로 인한 서학 연구의 중단으로 조선은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229쪽)
보론 2는 정약용의 일본유학에 대한 인식에 대한 글이다. 실학자들은 한정된 정보 안에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고, 그 중 성호 이익은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를 이어받은 정약용은 일본 고학파의 경학연구를 고평가하고 있으나 동시에 많은 부분에서 고학파의 경학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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