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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5일 저녁, 저는 어머니와 함께 연극 <햄릿>을 보러 갔습니다.


어머니는 참 불쌍한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마음이 병든 채 자라온 딸은 그만 그녀의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고나서 그 주검을 처음 봤을 때,

딸이 그저 곤히 잠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몸을 만져보니 온기가 전혀 없어 그제야 잔인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To die, to sleep......"


장례식이 열리고, 망자의 동생이자 유일하게 남은 자식인 아들이 상주가 되었습니다.

이 아들도 참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기이하게도 그는 한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데도,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19살 되는 해의 벽두까지 줄곧 중국 북경시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후에 비로소 한국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북경을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품 속과 같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위대하신 중화인민공화국 당국께서

외국인 주제에 감히 비밀리에 중국인에게 선교를 한 것을 괘씸하게 여겨,

북경에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를 추방해버리고 입국 금지를 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추방당한 본인은 이에 순응했지만, 아들인 그는 절망했다고 합니다. 마치 외간남자가 자기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버지를 무참히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동침하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외간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에 아들의 마음 속에는 매일같이 증오가 불길처럼 타올랐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누나까지 잃었으니, 그의 가슴 속에는 슬픔이 뿌리깊게 박혀버렸다고 합니다.

이 곡절 많은 인생을 살아온 아들이 불쌍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히 알고보면 그는 약하고 또 악한지라 도저히 사랑해줄 놈이 못 됩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둘이 연극 <햄릿>을 보고 난 뒤에 보인 반응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습니다.


연극 <햄릿>은 각색이 많이 된 편입니다.

여러분께서 익히 아시다시피, <햄릿> 원작의 도입부는 두 보초병의 대화로 시작합니다만,

연극 <햄릿>에서는 그런 것은 없고 그저 유령이 천천이 무대 뒤편으로 걸어가는데

궁궐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말하라며 아우성치며 묻는 식으로 연출되었습니다.

포틴브라스는 아예 삭제되었고,

그 유명한 햄릿의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릿이 영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원작 독백의 마지막인 "이제 조용히, 아름다운 오필리아구나! 님프여, 그대의 기도에서 내 모든 죄가 기억되도록 하옵소서."는 삭제되었고,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너는 정결한가?"(Are you honest?), "너는 아름다운가?" (Are you fair?)는 그보다 앞서 나옵니다.)

그리고 내용 외적 측면에서 보자면 연극 <햄릿>에서는 현대적 요소가 제법 들어가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옷과 총입니다.

모든 배우가 현대 복장을 입은 채 연기를 펼쳤고,

마지막 검술 장면을 제외하면 등장인물의 무장을 드러내는 소품은 권총이었습니다.

그래서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죽일 때에는 총성이 울리고,

클로디어스가 기도할 때는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레어티스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하며 클로디어스에게 권총을 들이댑니다.

이러한 현대적 각색은 물론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습니다만,

일찍이 벤 존슨이 셰익스피어를 두고 이르러 "그는 한 시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었다."(He was not of an age, but for all time)이라고 이른 것을 두고 생각해보면,

이러한 연극 <햄릿>의 각색은 현대의 관객에게 보다 더 쉽게, 그리고 더 깊게 다가가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입니다.


저는 연극을 관람하는 내내 <햄릿>의 서사를 이렇게 파악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빼앗겨버려 끊임없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는 인간이 복수를 이루어가는 이야기."

그래서 저는 햄릿에게도, 레어티스에게도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햄릿은 삼촌 클로디어스의 야망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고,

레어티스는 폴로니어스가 햄릿에게 살해당하면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사람을 잃음으로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죽여 복수하겠다는 무한한 증오에 가득 찹니다.

그렇게 햄릿과 레어티스는 서로 닮은꼴이 됩니다.


(다만, 그들의 증오의 배경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햄릿의 증오는 클로디어스가 야망을 위해 저지른 암살에 기인합니다.

클로디어스의 선왕 암살은 이론의 여지 없이 고의적이지요.

반면에 레어티스의 증오는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죽인 데서 비롯합니다.

햄릿은 그가 클로디어스인 줄 알고 죽였으나 사실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가 죽은 일을 딱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어쨌든 똑같이 아버지가 살해당해 분노하니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바꾸어 말하자면 서로 다른 성격의 원인으로 인한 분노가 어떻게 닮을 수 있는지,

또 분노와 폭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최종적으로 햄릿과 레어티스는 원수를 갚는데 성공합니다.

완전한 파국이라는 철저히 비극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다만 레어티스가 죽기 직전 햄릿에게 용서를 구하고, 햄릿 역시 그를 수용합니다.

햄릿은 클로디어스에게 억지로 독배를 마시게 하며, 증오를 담뿍 담아 이렇게 말합니다.

"마셔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다."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큰 쾌감을 느꼈습니다.

처절하기에 위대한 복수의 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살인을 암시하는 연극 <곤자고의 살인>을 보고 자리를 박차고 떠나

무릎꿇고 기도하는 클로디어스를 죽이면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이기에

응징을 미루었던 햄릿은 자기가 독 묻은 칼에 베여 죽어갈 때,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게한 '독'으로

비로소 복수를 완성합니다.

완벽한 복수.

그리고 숭고한 퇴장.

그를 지켜보며 느껴지는 것은

전율이었습니다.


그리고 햄릿은 말합니다.

이제야 나에게 침묵이 허락되었다고.

나의 대사를 다 말하였다고.

남은 것은 오직 침묵 뿐이라고.

그렇게 그는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 그 옆에 섭니다.

거트루드, 클로디어스, 레어티스,

쓰러져 있던 이들도 서서히 일어나서

무대 뒤편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곳. 먼저 떠난 이들이 있는 곳.

영원한 잠과 침묵의 세계로....

그리고 처음처럼 다시 춥고 어두운 밤이 옵니다.

한 치 앞도 아니 보일 만큼 어둡고,

뼈가 시릴 만큼 추운 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립니다.

이 기나긴 광대놀음도 끝나고 맙니다.

이렇게 연극이 끝나갈 무렵,

(마치 백석의 <남신의주 류동 박시봉방>의 표현처럼)

제 눈에는 "뜨거운 것이 핑" 괴였습니다.

"가슴이 꽉 메어" 오기도 했습니다.

배우들께서 관객에게 인사를 전하자,

저는 환희에 차서 일어나 우렁차게 손뼉을 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장면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햄릿은 연극 <곤자고의 살인>을 상연하게 하여 클로디어스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저는 북경의 국가대극원에서 공산당이 저지른 무수한 악행을 풍자하는 연극을 습근평에게 보여주고,

그가 역정을 내면 "이 연극은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해방하기 전에 군벌과 국민당이 저지른 악행을 풍자한 연극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대체 당신에게 불경합니까?"라고 비꼬며 말하고 싶다는 상상이 들었습니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상상만으로 쾌감이 들었습니다.


거트루드가 전하는 오필리아의 익사의 소식은 제가 들은대로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고였습니다.

오필리아가 일부러 자살한 건지, 아니면 판단력이 없어서 사고로 죽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령 일부러 물로 뛰어내렸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마음이 병들었기에, 그녀의 자살은 사실 병사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연극 속 미쳐버린 세상을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또 아름답게 떠나갔습니다.

마치 물 위로 떨어진 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남겨진 자에게는 어김없이 슬픔이 찾아옵니다.

비탄에 잠긴 레어티스가 관을 옮기고,

오필리아를 매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감싸안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수의 너머로 느껴진 차가운 시체의 감촉이 떠올랐습니다......


인상깊은 장면을 되새기는 동안 모든 배우의 인사가 끝나고 막이 내려왔습니다.

박수를 다 친 저는 제 옆에 앉아계신 어머니를 봤습니다.


어머니는 휴지로 눈물을 닦아내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제 눈에 고여 있던 뜨거운 것이 기어코 왈칵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얼싸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울면서 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대사가 남아있다고......

아직 우리에게는 침묵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그렇게 우리 모자는 잠깐 울고나서 자리를 떴습니다.

극장 문을 나서니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로등 빛이 환해서, 전혀 어둡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바람도 덥지 않게 불고, 매미도 청량하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춥고 어둡고 역겨운 나머지 무대를 뛰쳐나가고 싶어도,

아직 대사는 한가득 남아있어서,

허무를 증명하는 바람처럼, 운명을 절규하는 매미처럼 살아가야 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