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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 vs 미시마



늘 그렇듯 당연히 사견.

걍 둘 중 내가 왜 미시마를 작가로서 더 좋아하는지에 대한 잡담.



나쓰메 소세키는 친근한 작가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한 작품이고, <마음>이나 <그 후> 같은 작품은, 한 인간의 내면과 정서가 극세사 천처럼, 혹은 선뜻 손대기 두려워지는 파인 다이닝 요리처럼 얼마나 섬세해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꼴도 보기 싫은 작가임. 많은 독붕이들이 그렇겠지만 학식 시절, 친구와 연애의 대체품으로 어쩔 수 없이 책을 택한 주제에,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며 백일몽을 꾸던 날 현실 세계로 추락하게 해준 씹새끼. <금각사>의 일본식 정원 같은,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작가의 전지전능한 기교로 배치되고 계획되었기에 문장 하나, 삽화 에피소드 하나 의미 없는 것이라곤 없는 (예술적으로는) 완벽한 소설을 읽은 멍청한 문청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자기연민과 합리화, 꼴사나움이 없는 문학적 자기고백이라는 당연히 형용모순에 가까운 불가능한 경지를 보여준 <가면의 고백>은 또 어떠했겠고. (게다가 이 작품은 데뷔작이었단 말이다. 빌어먹을...) 위악적이고 삐뚤어지고 허약한 자기 인식 위에 징그러울 정도로 싱싱한 자멸적인, 하지만 놀랍도록 자생적인 탐미주의의 세계를 완성한 작가. 그런 인간이 또 시미치를 뚝 떼고 한없이 건전하고 그야말로 신화적인 생명력과 원형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파도소리>를 써내고, 심심했는지 대중들이 환장할만한 막장 신파 불륜 스토리를, 여성에게 빙의라도 한 듯한 심리묘사와 통속과 클리셰를 엿가락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써낸 <비틀거리는 여인>이나 <사랑의 갈증>은 또 어떻고.


쓰다 보니 이미 밸런스는 박살이 났구나.



그런데 사실 내가 미시마를 작가로서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음. 현실 인식에 대한 차이 때문임.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도이다><금각사>의 공통점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모습이 담겨있다는 거임. <고양이>에는 청일? 혹은 러일 전쟁 무렵의 일본이 국민들에게 일본의 혼이라는 요상한 개념을 강요하며 전쟁을 위해 단결할 것을 강요하는 시국에 대해 대체 일본의 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붉은 색인가, 하얀 색인가?”라는 투로 비웃는 장면이 나옴.


<금각사> 속 일본 군국주의는 어떻게 묘사되어있는가? 미조구치가 금각사에 페티쉬를 느끼게 된 계기, 방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 모두 미군이 교토를 공급할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었음. 말더듬이에 용모와 미래까지 추한 자신과 상관없는 세계에서, 영원히 뻔뻔스럽도록 아름다울 것으로 보였던 대상이, 필멸할 자신처럼 적국의 공습에 의해 사라질 비극적 운명의 대상으로 전락하자, 볼썽사나운 짝사랑에 불과했던 금각사에 대한 집착은 공통점, 같은 운명을 가진 대상에 대한 사랑이 됨. 동경의 대상이던 귀족가의 영애를 짝사랑하던 천민이, 불치병에 걸린 데다가 창녀로 전락한 그녀를 마음껏 사랑하게 되고, 병사하기 전 목 졸라 죽이고 만족해하는 심리. 이 얼마나 정합적이고 이해 가능한 정서란 말인가?


...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현실과 시대에 대처하는 두 작가의 모습을 비교해 보잔 말이다. 소세키는 자기 나라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 자국과 타국을 넘어 세계 전체에 뚜렷한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을 비웃으며 무시하고 있음.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과 승리에 힘입은 풍요에 기대 천황 장학생으로 뽑혀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인간이자, 일제의 폭력 덕분에 만들어진 평화 위에서 안빈낙도하며 고양이를 키우고 연애질을 하고 일상을 영위하는 인간이, 일제의 침략과 잔학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일인 듯 취급했다는 거임. 이게 가능한 일임? 이게 한 인간으로서, 혹은 국민으로서, 작가로서 바람직한 태도일까? 현실에 대처하거나 참여할 생각도, 상황의 원인과 해결책을 규명할 생각도 하지 않고 모래밭에 대가릴 묻는 타조처럼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취급하고, 본인은 일상과 사소설적 내면세계로 침잠해 점잔을 빼는 무책임하고 뻔뻔한 태도.


미시마 역시 일본군 징집을 꾀병으로 도피했던 좆병신 출신임. <가면의 고백>에서 작가 스스로 썼듯, 평생 이 일을 잊지 못하며 부끄럽게 여겼고. 그래서인지 자국의 행위와 시국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함. 깊은 통찰과 고민으로 이 시국에 대해, 이 외부적 상황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이 시대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고민했고, 그걸 당당하게 표현했고, 나아가 실천했음. 수많은 작품과 인터뷰, 방송과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예술적으로 표현했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이 문제의식을 예술적으로, 정치적으로 형상화하는데 바쳤음. 이 주제의식을 집대성한 4권 짜리 대하 장편을 탈고한 날, 다들 비웃는 천황복위의 연설을 한 뒤 자의에 의해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거임. 누구처럼 위장질환에서 비롯된 우울증으로 징징대며, 삶을 이어갈 이유도 딱히 모르겠는 주제에 위장약을 과식하며 연명하다, 결국 그 병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나는 이 글에서 저 행위의 옳고 그름이나 바람직함, 혹은 저들의 삶 자체를 평가하고 싶지 않음. 당연히 그럴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음.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엄중하게 존재하는 외부 환경, 세계, 실존의 무대인 세상을 바라보고 이에 대처하는 한 인간 혹은 작가로서의 성실성,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임.

나는 현실에 대해 어떤 식의 반응이라도 보이는 인간이, 현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와 타인을 기만하는 인간보다는 낫다고 생각함. 나는 본인이 살고있는 세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규명하려는 야심을 가진 작가가, 그걸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풍자와 흉소 정도로 퉁친 뒤 누구도 상처 입거나 실수하지 않을 안온한 사적 세계를 그리는 것에 자족하는 작가보다 더 배울 것이 많다고 본다는 거임.


게다가 과거와 현재의 일본, 일본인들의 생각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전자가 더 적절한 표본이라고 봄. 소세키가 그린 소박하고 일상을 사랑하는 소시민적 인간형은 일본의 다테마에에 불과하다는 건, 우린 특히 더 잘 알고 있음. 집단, 혹은 국민으로서의 일본인의 혼네는 사실 미시마의 생각과 비슷하거나, 그의 사상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함. 고양이를 키우고, 연애를 하고, 소박한 가정식을 만들어 먹는 일본인들의 이면엔, 어떤 허무주의와 기묘한 열등감에 평생 몸부림쳐온 나머지 집단과 국가의 이름으로 뭉쳐 자기파멸적인 호전성과 과대망상적인 신념과 목표를 위해 몸을 던지려는 충동과 의지를 늘 갖고 있다는 거임.



결론은.. 내가 문학을 읽는 이유가 공감이고 위로이고 이해였다면, 당연히 소새끼를 더 좋아했을 거임. 하지만 내가 문학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 의의와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투쟁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임. 싸구려 공감이 아니라, 이해와 납득. 그리고 문학이란 예술을 그 투쟁의 도구로 선택한 이들의 기예의 탁월함을 확인하고 싶음.


그러므로 내 생각에, 미시마는 소세키 보다 더 훌륭하고 읽고 이해할 가치와 효용이 있는 작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