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치 심리학자가 된 것처럼 인간의 이성보다 인간이 가지는 몇몇 기분이 인간을 더 지배한다고 말함.
그 기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근본기분"이라 함.
근본기분은 인간이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광범위한 경우를 뜻함.
존재 앞에서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었어.
고대 그리스 사람은 존재 앞에서 그것을 경이 혹은 경악으로 봤다 함.
이것이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왜 이렇게 된건지, 왜 이렇게 거대한지를 생각했겠지.
이성은 그 뒤에야 쌓여진 것이라 함.
전기 하이데거엔 근본기분을 불안으로 생각함.
과학기술이 놀랄 정도로 발전했고,
기술은 고대 그리스의 포에시스란 말처럼 존재를 더 잘 드러내주기보다는, 몰아세우는, 그래서 어떻게든 기계화하려고 했고,
인간도 마찬가지로 몰아세워져서 시간과 그 죽음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고, 그래서 이게 현대 사회의 모습이라고 봤지.
그런데 난 이런 생각이 들었음.
정말 시간인지 죽음인지가 별 문제가 되는 걸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보통 문학은 늙음의 문제로 해결했음. 걸리버 여행기에서 평생 살지만 나중에 늙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난 이것이 논점을 비켜난 거라고 생각했거든.
시간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게끔 인간의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어찌되는가?
노화의 문제도 해결하고, 병도 걸리지 않고, 그냥 평생 건강하고 충분히 얻을 걸 얻으며 생활한다면 어떨까?
하이데거의 죽음 타령은 대체 뭔 쓸모가 있을까?
난 이 질문의 해답을 은하철도 999에서 얻었음.
"장례의 별"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그 별의 사람들은 마치 광적인 종교인처럼 장례식이란 행위를 깊이 받아들이고, 장례식 뒤에는 장례식을 더 치르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죽인 뒤 다시 그 사람에 대한 장례를 치른다고 함.
왜 이런가?
장례의 별은 예전에는 골프나 치면서 정말 천국 같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함. 그런데 어떤 비행선이 급히 이 별로 우회하여 도착함. 애인 관계인 남자와 여자가 있었는데, 여자가 급성으로 위험한 병에 걸려 치료를 필요로 했던 상태였음.
그러나 장례의 별엔 병원이 없었음. 누구도 병에 안 걸리기 때문. 결국 그녀는 죽었음. 그는 그 장례의 별에서 정말 낯선 의식, 장례식을 진행하고, 마음속 깊이 오열하며 그녀를 떠나 보냈다 함.
여기서, 그 장례의 별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급격하고 초월적인 어떠한 감정을 느꼈고, 그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 감정에 심취한 나머지 남자마저 죽인 후 장례를 치렀음. 그리고 그 감정을 위해 장례식을 매일같이 전쟁을 해가며 펼치는 일이 일어났다 하는 것임.
초기 하이데거 직후 그는 점점 존재를 설명하는 데 있어 "시간성"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음. 점점 존재의 근본기분을 더 탐구하다가, 불안 대신 다른 개념을 찾아냄.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그 말을 하지.
그렇게 나온 세번째 존재의 근본기분은, "권태"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존재에 대해 지루해하고 있다는 것임.
존재 자체가 너무 이해가 안 되어서 계속 이해 관계를 가졌던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이젠 존재가 너무 당연해졌고, 세상이 의미없이 너무 지루해졌고, 존재가 "말을 건네는 것", 그러니까 존재를 이해해보는 것이 오히려 신기해졌다는 것임.
릭 앤 모티에서 릭은 그 어떤 세계도 탐험하고, 어떤 것이 실현된 세계도 실현되지 않은 세계도 갈 수 있었지.
그러나 그는 친구를 가지게 됨. 그의 친구인 버드퍼슨과 함께 그 세계 안의 권위에 대해 전쟁을 하지.
전쟁이 끝난 후 버드퍼슨은 이렇게 물어봐. "대체 너는 왜 나와 같이 있느냐? 너는 내 투쟁이 성공한 세계도 실패한 세계도 갈 수 있지 않느냐. 대체 왜 날 도와주는가?"
릭은 이렇게 말해. "그렇다.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세상과 다른 모든 세상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나에게 너는 의미가 있다."
우리 세상을 사는 방법은 존재에의 권태에 대한 하나의 투쟁, 하나의 의미 세우기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이야 너 글 잘쓴다
https://klyp.fyi/ifani
점점 존재의 근본기분을 더 탐구하다가 >> 현존재의 근본기분 인 듯 현존재로부터 시작하는 실존론적 도상으론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져올 수 없음을 알고 (방법론적) 전회한 것이 "존재가 말을 건네는 것" 의 청종인데. 난 존재가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지, 의미 세우기나 투쟁같이 주체가 무언갈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좀 건방진 생각 같음.
좀 반쯤은 내 부족으로 반쯤은 일부러 하이데거의 말을 뭉개놓은 게 있음. 현존재란 말을 일부러 안쓰고 인간이라 했고, 전기와 후기는 그냥 내가 아는 것만 좀 넣어둠. 이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은 전기인지 후기인지 모르겠다.
하이데거의 전기를 말할때 존재와시간, 현상학의 근본문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형이상학의근본개념들 까지 여기는데 이 존재와 시간 이후 언급한 저작들이 존재와시간에서 끊겨버린 후속작업을 하고 있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많음. 이 저작들의 특징은 현존재의 실존을 바탕으로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다시 회수해오는 작업으로 존재에 대해 알아내려고 하는데, 너 말대로 시간에 대한 이해를 죽음을 선취하여 가져왔다고 해도 존재가 갖는 역운까지는 파악하기 힘들어서 결국 현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이데거 스스로 인간이라는 말로 다시 바꾸면서 결국 존재가 말을 건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지점때문에 하이데거가 존재신학자라고 비판 많이 받음. - 근데 난 너가 죽음을 선취한다거나,
양심의 청종같은 현존재가 실존론적 시간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상한 개념들 또한 염두하고 글을 썼는지가 제일 궁금함. 하이데거는 죽음을 선취하고 양심에 청종하는 것에 시간성이라는 지평을 확보하는데, 결국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양심의 문제가 남아있으니까
시간과 "존재의 진리"라는 논문을 읽고 시간성을 더 이상 지평의 가장 큰 요소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함.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부터 시간이 존재이해의 근거라는 사실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성을 버린게 아니라 실존론적 분석론으로는 존재 이해에 다가갈 수 없음을 확인하는 도상인거임.
나는 존재와 시간에서 67 이후는 산은 산이지 물은 물이지 하게 넘기고 그냥 박찬국 해설만 읽고 넘겼음. 그런데 내가 일단 눈에 띈 점은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은 시간을 거의 다루지도 않음. 유한성을 더 다루지. 그래서 다른 개념으로 시간성이란 지평을 확보한다 따위의 말이 별로 감이 안감. 차라리 후기에 가까워 보임.
유한성이라는 것이 시간성의 지평이 확보된 것을 지시하는 건데?
하이데거는 결국 '실존' 이라는 걸 포기하게 되는데, 네 말대로 이건 '시간성'의 (너 식대로) 포기임. 그럼 후기와 가까워지겠지. 존재신학적인 존재가 건네는 말. 그럼 투쟁이나 의미세우기 같은 '실존적인' 방법론도 필요 없다는게 내 생각임
1A. 유한성이 시간성의 지평이 확보된 것이란 내용은 언제 나옴? 1B. 나중에 하이데거가 후기나 철학에의 기여로 진입하면서 시간성의 개념을 거의 버렸다 같은 것도 그럴만한 이야기인 거 같은데, 근본개념들도 그런 거 아님? 1C. 내가 알기로 하이데거가 베르그송의 시간에 대한 순수 지속이란 개념을 보고 자신의 시간 개념을 철회했다고 하는데, 이거 맞음?
2. 일단 하이데거를 설명하면서 이 말은 안 하려 하지만, ... 정말로 그 사람 말을 믿음? 왜 시간성이어야만 하고 공간성이면 안된다는 거냐는 거임. 나는 라이헨바흐가 말한 시간에 대한 이론은 오직 수리물리학의 언어로 쓰여져야만 타당하다는 말을 믿음. 존재와 시간에서 꼭 시간성을 다뤄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거 같다고.
<존재와 시간> 가장 후반부에 시간 전체성을 확보하고 현존재 유한성을 얘기했던걸로 기억하는데. 2. 이게 시간성을 버린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존재 이해를 '현존재'의 위치에서 시도하는 것 자체를 포기함. 그래서 실존론적 분석이 진행되지 않고, 그 결과 실존론적 분석에서 현존재가 놓여있는 가장 근본적 근원인 시간에 대한 분석도 진행되지 않는 것. (근본개념들은 아직 실존론적 분석이 진행될 때 쓰인 글로 알고있음) 3. 베르그송과 하이데거 관계는 잘모름
난 하이데거 말을 믿지는 않는데, 주체가 무언갈 주도적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엔 동의함. 네 생각도 일리는 있지만 내가 듣기엔 좀... 건방지다는거지
나는 시간성이나 죽음을-미리-앞서서-봄인지 하는 거도, 그저 "인간의 유한성" 같은 더 적합한 단어로 설명을 다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봄. 실제로 야스퍼스는 "세계정위로 다루어지지 않는 실존"이란 말을 썼는데, 이게 오히려 더 철학적으로 합당한 말이라 봄.
하이데거가 시간성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임. 현존재는 시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게 너무나도 당연해서 이게 포기되어지면 현존재의 분석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믿은 사람이니까.
죽음의 선취가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말은 비동의, 왜냐하면 양심의 청종이 동반되지 않은 시간성 확보는 비본래적이기 때문
그리고 현상학에 대한 생각에 대해 내가 완전 생각을 바꾼 게 있음. 바슐라르가 현상학을 비판하면서 "현상기술학"이라는 단어를 도입함. 그에 따르면 철학자는 멋모르고 세계를 "본질 직관"이라거나 "초연한 내맡김"이라 하면서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며 그걸 과학에서 볼 수 있다 말함.
뭐 한 문장을 쓰는데 학자 하나씩 인용하는 태도가 당신의 박식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바라면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겠으나, 주제랑 너무 멀어지진 말자고.
과학자들은 어떤 본질이든 사실이든 무언가 관측하려고 할 때 어떤 도구를 써서 임시적 환경을 만들어서 관측한다는 거임. 화학자가 투명한 유리로 현실에서 다른 현실, "만들어진 현실"을 관측한다는 거지. 과학자도 현상을 조작이든 "창조"하든 어떻게든 해서 보는데, 대체 어떤 연유로 철학자라는 자가 현실을 단박에 붙잡을 수 있을 거냐고 하는 거지.
난 하이데거도 못해 메를로퐁티라 한들 정말 엄근진하고 어찌보면 경박한 비판을 해서 좀 문제가 될 부분을 뜯어내야 한다고 생각함.
하이데거의 후기철학이 현실을 단박에 붙잡고있나? 오히려 반대아닌가. 인간이 단박에 붙잡는 다는 것을 포기해야만, 오히려 존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신학적인 태도로 연결된다고 보는데 이건 과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거고. 과학이 세상 만물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이 네가 말한 과학도 결국 관찰구조 안에서 만들어진 사실을 관찰한다는 거니까.
존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야말로 바슐라르가 비판할 말임. 바슐라르나, 그를 따라가는 과학자들이라면 잘 들으려는 태도는 커녕 기술을 써서 그 말을 조작해야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거임
그건 별개의 문제인것 같음. 하이데거는 결국 문학과 예술에 우위를 둔 학자인데, 문학과 예술이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한테 과학철학자 얘기를 가져와서, 아니, 세계를 보려면 세계를 잘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춰야해 라고 말한들 이건 절대로 교접할 수 없음
네 말을 거칠게 요약하면 시인이 보는 세상은 엄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유를 뜯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 처럼 들림 나한테는
그리고 존재의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조작하여 세상을 알아가야한다는 주장을 할거였으면, 본문 글을 바슐라르로 수정하는게 또 맞는거같음.
내가 느껴지는 게 있는데 하이데거를 너무 많이 공부한 거 같다는 느낌이 듬. 하이데거가 여러가지 이론을 펼친 것처럼 슈펭글러도 이론을 펼쳤음. 슈펭글러도 "괴테적 과학"이란 이론을 펼쳐 인과성과 독립적으로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태도를 펼쳤음. 하이데거는 뭐가 다름? 카시러의 관점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 타령이나 슈펭글러의 형태 타령이나 그게 그거였음.
님아... 바슐라르가 시인을 무시했으리라 생각함?
적어도 바슐라르에 대해서, 특히 프랑스 과학사학자 들 계보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꽤 진정성있게 공부했다고 생각하고, 난 바슐라르를 얘기한는게 아니라 네 태도를 얘기하는거임
너가 어떤 주제를 잡고 얘기할때 사변적인 '타학자 주석달기' 를 조금 감했으면 좋겠음. 모두가 몰라서 이 학자는 저랬다 저학자는 저랬다 얘기 안하는게 아님. 주제와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알아서 주제에 맞는 얘기만 하는거지. 내가 지금 관찰에 대한 얘기를 한다고 하버마스와 루만의 논쟁까지 끌고 들어오면 이 대화가 어디로가겠음?
내가 갑자기 이상한 사람을 끌고 간 것에 대해서 좀 잘못이 있긴 함. 내가 원하는 말은, 대륙철학은 그 문제에 대해 좀 신경증이 난다는 거임. 그것을 공부할 땐 언제나 의문점을 세우고 이게 대체 옳게 되는 것인지, 그저 무한루프로 빠지는 사변으로 가는 게 아닌지를 계속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임. 심지어 후설 같은 엄밀하다고 여겨지는 현상학자도 포함되는 거고.
안 그러면 하이데거는 제 2의 슈펭글러가 되고 말 거임.
철학하는데 있어서 건방질게 뭐가 있냐? 철학의 본질 자체가 건방짐인데 ㅋㅋ 차라리 논리적 모순을 지적한다면 모를까나. 주석달기를 감하라니.. 조선학계의 고질병을 디씨에서도 보네..
ff(175.202) >> 넌 진짜 하나도 이해 못하고 글을 쓰는구나 주석달기가 잘못이라는게 아니라 굳이 학자 한명씩 끄집어내며 논변을 흐트러트리지 말라는 얘기이고, 주체가 무언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건방지다는건, 그런 생각을 하지말라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사유 자체가 너무나도 좁기때문에, 주체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지, 지금 작성자의 생각이 건방지다는게 아닌데 내가 소귀에 경을읽지 어휴
가령 인간의 사유로 세계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으면 그 주장을 듣고 그 생각은, 건방진 생각 같다. 라는 평을내리는 것 또한 철학적 사유라는거임 타학자 주석달기는 말그대로 이 얘기를 하는데, 가령 루만은 관찰자와 관찰대상만이 있는데, 이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대해 진술하는 모든것이 결국 관찰의 자기지시라는 주장을 했기 때문에, 결국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의미 또한 체계에서만 통용될 뿐이다. 그 체계는 결국 자기지시적이며, 세계를 지칭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자가 세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건방진 생각이다. 라는 주장까지 확장시키면, 과연 체계는 자기지시적인가? 비판적 사유를 함유하는가? 까지 논변이 확장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타학자 주석달기'를 하지말고 주제에 천착해야된
나는 지금 쓴 라이헨바흐, 야스퍼스, 바슐라르, 슈펭글러가 전부 옳게 쓰여졌다고 생각함. 바슐라르가 특히 문제가 된 거 같은데, 나는 이게 박식함의 표현이 아니고 하이데거에만 접근하려고 할 때 생기는 어떠한 맹목의 문제를 다룬 것임. 레비나스나 마리옹이 아니라 아예 근원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임.
그리고 솔직히 "건방짐"이라는 말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이것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랐음. 생각을 해보면 주체를 다룬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반대하는 사람도 생각해볼 수 있잖아.
특히 프랑스 과학철학에서의 말과 사물 9장에 나오는 푸코의 비판을 생각해볼 수 있지. 푸코가 말하길 "내 철학의 가장 중요한 근본 목표는 구조주의나 해석학이 아니라 주체성의 문제였다"라고 하기도 하고. 대체 얼마나 많은 철학자가 있어야 건방지다는 말을 포기하겠음...
ㄴ여기서도 푸코 말과사물 끌고오는 게 112.218이 지적한 건데. 움베르토 에코, 미술전시회의 도록에 서문을 쓰는 방법 참조하셈.
http://m.egloos.zum.com/proto/v/237361
죽음은 필연적이니까 하이데거가 죽음을 중요하게 생각한거 아님? 장례의 별 이야기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은하철도 999의 세계관에서는, 과학기술의 아주 큰 발전으로 인해 부자라면 아주 총에 맞지 않는 이상 무조건 살 수 있게 되어 있음. 심각한 상처가 아닌 이상 영원히 살 수 있고, 노화도 일어나지 않음. 죽음뿐만 아니라 시간성도 없다고 볼 수 있음.
그래서 죽음이 필연적이지 않게 된다면 장례의 별처럼 인간은 죽음을 발명하게 될거란건가? 하이데거 철학의 시작이 죽음이 필연적이란건데 그냥 아예다른얘기자나 그건
하이데거가 마치 죽음을 보조한다는듯이 대하는 사람들이 있음.
https://youtu.be/cZYNADOHhVY
여기서 과학자들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를 얼마나 이상하게 보는지 알 수 있지. 뭐 그리고, 이것은 존재와 시간의 비판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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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앤 모티는 마치 비트겐슈타인 같음. 릭 앤 모티의 취지는 보잭 홀스맨 같은 키르케고르 등의 실존주의라든지 아무튼 인생철학을 의미하는데, 분석철학에 대응하는 릭 앤 모티 팬은 미식스에만 너무 빠져 있는듯...
과학 최전선은 노화의 종말을 앞두고 있어서 하이데거 퇴물될 날은 무조건 옴 ㅋㅋ
권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하이데거가 퇴물이 되진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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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논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음. "이 사람은 햄릿의 구절 time is out of joint 하나만 가지고 이 철학을 전개하네... 뭐지..." 그런데 그 책에서 사실 하이데거도 별 다를 바 없이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만 참고하고 있더라고. 근본을 따진다고 고대 그리스만 파는건 내가 원래부터 그에게 맘에 안 들어 했던 것이고.
좋은 글 고마움. 몽유병자들은 안 읽어봤음. 그런데... 몽유병자들이 그런 파편적 의미를 다룬다면 또다른 모더니즘 소설인 특성 없는 남자는 어느정도 권태를 다루지 않을까 싶음...
분명 하이데거가 실존에 대해 던지는 화두는 감탄할 만 하지만 나치 추종자의 말은 주의깊게 듣고싶지 않음 - dc App
병신 ㅋㅋ
요즘 고민하고 있는 주제를 이 글에서 건드려줘서 사실 소름끼치면서 글을 읽었음. 많은 대륙철학에서 죽음이란 개념이 삶을 다시금 성찰하게끔하는 도구인데 만약 과학이 죽음을 정복한다면 나는 어떡하지라는 고민에 몇주동안 고민해서인지 글이 잘 읽히고 재미있었음. 그리고 철학 좆문가인 본인이 보기에 죽음말고도 '늙음'이라는 경험도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듦. 내가 죽지 않고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한들.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고 그로 인해 점점 내가 뒤로 밀리는 듯한 경험은 죽음과 노화가 정복되도 왠지 내가 경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심?
우리의 눈과 뇌는 서로 음모를 꾸몄으며, 모든 음모가 그렇듯 우리가 알지 못하도록 의식세계 저 편에서 서로 협약을 꾸몄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우리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음모를 꾸밀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런 무지로 인해 우리는 미래의 고난으로 경험할 고통의 강도와 지속 기간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는 우리의 눈과 뇌가 벌이는 작업에 역행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은 것 보다는 행동한 것에 대해, 단순히 약간 짜증나는 경험보다는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해,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보다는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켜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예측 당시에는 이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하기보다는 행동하지 않기를, 큰 고통 보다는 약간의 짜증을,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구속보다는 자유를 선택한다.
대니얼 길버트,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9장 '현실에 대한 면역'의 맺음말에서
난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일상에서 작은 친절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극복하면 하이데거가 의미 없어진다는 소리는 맞는 말이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는 소리지. 죽음을 없앤다면 (노화 치료따위로는 불가능함) 물리학 법칙을 뒤집어 엎는다는 소리인데 그럼 하이데거뿐 아니라 이세상에 살아남을 학자가 없음.
인간이 멸종된다면 아무도 글자를 읽을 수가 없을텐데 하이데거 책은 쓸모가 없는거 아닌가요? 이런 한심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거랑 똑같이 보임
사변놀음에 빠지면 현실 감각 제로되는 거 순식간이지
ㅋㅋ - dc App
안다고 생각할 때 모름을 망각하는 게 아닐까? 모름을 모르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너를 안다고 생각할 때 너를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가졌던 가능성들을 폐기하는 것이 아닐까? 안다고 생각할 때 존재가 아니라 고정적인 언어에 갇혀 권태에 빠지게 되는 게 아닐까? 과학은 그 가능성들을 폐기하고 현상들을 단순화하는 도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