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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미국 건국의 신화 중 하나인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의 허황됨을 폭로하는 책입니다.

미국 혁명 직후 미국의 위정자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계 이주자들이 계속해서 서부로 이동하며 정복을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고도 일컫는 이 사고방식은, 미국이 탄생한 시점부터 약 250년간 미국을 내부 혼란으로부터 지켜준 ‘안전밸브’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면 미국이 ‘더이상 밖으로 나갈 기회를 잃은’ 그 시점에 안전밸브는 폭발하여 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것이 트럼프의 장벽 건설을 비롯한 자국민 보호주의적 정책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혁명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고 근대 시민혁명으로 추앙받는 미국 혁명 역시 많은 결점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미국의 서부 팽창과 그에 따른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지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다수는 미국에 지리적 한계가 없다고 믿었으며 황량한 서부 지역을 정복하여 ‘문명화의 사명’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토머스 제퍼슨은 1813년에 몇십년 전 독립 혁명을 진압하려 한 영국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야만 상태로 유지시켜 “불행한 이들을 구제하려는 우리(미국)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다고” 불평했습니다. 물론 제퍼슨이 이야기한 “원주민의 구제”란, 철저한 서구의 기준으로 원주민을 ‘문명화’하기 위해 학살과 추방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미국의 13개 주들은 서부로 끝없이 팽창했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 부족들의 저항이 있을 때마다 연방군은 끊임없이 개입하여 정착민의 폭력 행사를 도왔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을 꺾고 대통령이 된 앤드류 잭슨 장군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장기적으로 서부 팽창을 추진하면서도 법리와 유화책에 얽매여 허둥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잭슨 행정부는 본래 미국 남부에 모여 살던 촉토족, 크리크족, 치카소족, 세미놀족, 체로키족을 한꺼번에 미시시피 강 서안으로 몰아내 지금의 오클라호마 주 지역에 강제정착시켰고 그 자리를 백인 노예제 지지자들로 채웠습니다. 

재선에 실패하고 야인이 된 전직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정치인생의 막바지에 들어 미국의 과도한 팽창 계획에 의문을 표하고,  추가적인 전쟁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특히 애덤스는 1836년 앵글로아메리칸들과 테하노(멕시코인과 미국인의 혼혈)의 주도로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을 미연방에 병합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여 ‘멕시코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자유의 깃발은 멕시코의 깃발이 되고 미국의 깃발은 노예제도의 깃발이 될 것’이라는 강경한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텍사스 공화국은 멕시코로부터 유혈 독립할 당시 미연방 가입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에 합의했기 때문에, 텍사스가 미국에 하나의 주로 가입하려 한 즉시 멕시코는 반발을 내보였습니다. 그러나 텍사스 공화국은 가입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미국-멕시코 전쟁이 일어납니다. 결과는 미국의 대승리. 남부에 위치한 텍사스 주는 노예주로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을 끝까지 반대한 존 퀸시 애덤스가 사망한 1848년 그 해,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되어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들을 점거한 노동계급의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열악한 노동환경과 빈곤에 저항했습니다.

훗날 1848년의 혁명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비록 유럽 전역에서 완전한 정치권력 획득에 실패했지만,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창설에 영향을 주고 유럽 정계에 노동계급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폭력봉기에 기겁한 각국 정부는 더 과격한 봉기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 설립이라는 유화책을 내세웠고, 이때의 유산은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노동자들이라고 유럽의 노동자들과 사정이 달랐을까요? 그들 역시 커져가는 빈부격차와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위정자들은 광활한 서부의 황무지와 멕시코 북부 영토를 점령하는 것으로,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외부인과의 ‘인종 전쟁’을 펼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분산시켰습니다. 유럽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 앞에 서서 상류층과 싸울 때, 미국 노동자들은 상류층과 함께 서쪽으로 가서 원주민과 멕시코 군대를 공격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텍사스의 합병은 자유주와 노예주의 균형을 깨트리면서 미국 내전(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어, 결국 애덤스의 불길한 예언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노예제도의 깃발을 든 남부의 분리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패배하였고, 워싱턴 정부는 해방노예국을 건설하여 전쟁 난민의 복지 증진에 신경씀과 동시에 폭넓은 사회보장제도를 실행하려 했습니다. 저자는 “미국에 사회 공화국이 탄생할 타이밍”이 있었다면 그때가 가장 적절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링컨의 암살 후 집권한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공화당 급진파의 요구를 사사건건 반대하며 남부 농장주의 이권을 대표했습니다. 개혁은 흐지부지되었고 서부로의 영토 확장은 더욱 잔인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원주민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의 농장주들은 북부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북부를 중심으로 가속화된 미국의 산업혁명은 남북 간의 갈등을 부채질했습니다.

황색언론의 메인 호 피격 사건 보도로 시작된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은 혼란을 무마시킬 또 한번의 ‘안전밸브’ 역할을 했습니다. 스페인의 전제 통치로부터 카리브해를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이 무색하게도, 미국은 승전 후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은 지역을 다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거나 서류상으로만 독립국인 종속국(쿠바)으로 만들었습니다. 영토 확장 이외에 미국-스페인 전쟁이 미국에게 가져다준 이익이 있다면, 전쟁 과정에서 지원병으로 참가한 수많은 남부인들이 북부인과 함께 싸우며 미국의 (백인간의) 남북갈등이 해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승리 이후 미국에는 더이상 확장할 영토가 없었습니다.

대공황 시기 미국을 이끈 프랭클린 루즈벨트(이하 FDR) 행정부는 이를 겸허히 인정했고 사회복지제도의 확대 적용이 곧 변경의 신화와 같다는 뉴딜 사관을 주장했습니다(저자는 FDR 역시 미국 흑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전쟁 중 재미 일본인을 수용소에 수감하는 실책을 저질렀으나, 그가 기용한 관료들이 미국의 사회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FDR은 곧이어 ‘두번째 권리 장전’을 발표하여 사회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법적 근거를 도입하려 했으나, 그 시점에 그는 이미 죽기 직전의 사람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FDR은 4번째 임기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부통령 트루먼에게 자리를 넘깁니다.

2차대전은 미국이 전후 세계질서의 주도적 역할을 차지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막대한 산업 역량으로 지원한 무기는 유럽 여러 나라에 대여되어 소련과 서유럽 제국은 나치 독일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종전 직후에는 미국을 위시로 한 서방 블록이 형성되고,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소련의 공산진영을 향해 자유의 확대를 부르짖는 새로운 변경의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변경의 신화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지면서 위기를 맞게 됩니다. 마틴 루서 킹은 전쟁이 계속될수록 미국인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내부의 억압 역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전쟁에 대한 미국 내부의 전체적인 반응 역시 킹과 대동소이했습니다. 1848년의 멕시코 침공 때와 달리 많은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 파병에 반대했습니다.

1980년대의 경제 위기와 고르바초프의 개방 정책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소련의 공산진영이 무너지자 미국은 다시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나아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은 미국을 다시 한번 끈질긴 전쟁의 수렁에 빠트렸습니다.

한편으로는 더이상 확장할 곳이 없는 남부 변경이 멕시코계 이민자들로 채워졌습니다. 본래 아메리카 원주민과 멕시코인의 영토만 병합하고 그 주민들은 내쫓거나 차별 대우를 하던 미국의 ‘변경 신화’ 신봉자들은 국경경비대를 창설하여 불법 이민자를 폭력적으로 단속했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멕시코 장벽 건설 역시 국경경비대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미국의 확장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생겨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약 250년간 미국의 평화를 유지해온 신화는 깨졌고 미국 사회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앞으로 미국은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이 책을 읽고 깨달은 점은,

첫째는 미국의 번영에는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및 흑인의 희생이 깃들어 있으며, 그 번영의 과실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기 싫어하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팽창 전쟁의 승리로 내부의 갈등을 겨우 봉합해 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더이상 팽창 전쟁에서 미국이 항상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드디어 겉으로 나타난 미국 내부의 분열이 배외주의 세력에게 계속 집권 명분을 줄 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깃발을 잠시 접어둔 채, 내부 혼란의 시기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이 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우익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사회적 갈등이 여전히 봉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미국의 가까운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입니다. 좋으나 싫으나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고 미국인은 물론이고 미국의 영향을 받는 세계의 수많은 인구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