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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글은 그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함.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데,


1. 신화, 종교, 철학적 관념 등 보르헤스 본인이 즐겨 쓰는 작품의 소재와 주제 자체의 난이도가 한 몫 하고


2. 보르헤스의 글에서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허무는데 일조하는 상호텍스트들과 인용, 오마주 때문이기도 함.




1.과 같은 경우는 머리가 아프긴 해도 곰곰히 작품을 곱씹다보면 이해하고 무릎을 칠 수 있음. 세상의 모든 텍스트 조합이 들어있는 무한한 도서관이라던가 (바벨의 도서관) 온 우주의 모든 요소가 지름 3센티미터의 구슬같은 공간에 중첩없이 존재하는 지하실이라던가 (알레프) 분명 낯설고 골아픈 개념이지만 그 발상과 전개가 워낙 압도적이기에 많은 사랑을 받는 이야기들이지.







이러한 정교한 상징적ㅡ환상적 세계를 현실에 교묘하게 구현하는 보르헤스의 단편들은 주로 <픽션들> 에 수록된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음. 그래서 난이도가 있음에도 보르헤스에 입문코자 하는 사람들에게 <픽션들>을 먼저 추천하는거임.


2.의 경우엔 조금더 골치가 아픈데, 보르헤스가 인용하거나 모티브로 삼은 작품들이 한국에선 검색도 쉽지 않은 중세.근세 문헌들이거나 라틴 향기가 물씬 풍기는 가우초 문학 등등이 많기 때문임.


하지만 보르헤스의 단편에 레퍼런스로 쓰인 1차 문헌들과 무수한 오마주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면, 보르헤스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게 됨. <알레프> 에 수록된 많은 단편들이 그 점을 잘 보여줌.





<아스테리온의 집>


이 4페이지 남짓의 소설은 미노타우르스의 시점에서 테세우스 신화를 재해석 한 작품임. 마지막 문장을 통해 화자 '아스테리온'이 미노스의 아들ㅡ즉 미노타우르스라는 반전이 드러나면서ㅡ물론 그리스 고전에 능통하거나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글 서두의 인용구를 통해 진즉에 알아챌 수 있긴 해ㅡ 그 앞의 정신병자와도 같았던 아스테리온의 행적이 이해가 가게 되지. 추리소설의 형식을 사랑했던 보르헤스의 솜씨가 잘 드러난 작품이기도 하고.


여기서의 미노타우르스는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괴수가 아닌 외롭고 순수하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보이는 이미지임. 미로 속에 갇혀있기는 하지만 딱히 감금된건 아니었거에 바깥세상으로 한 차례 나가 보지만, 사람들의 공포와 분노를 마주하고는 '자신은 유일무이한 존재'라며 스스로를 미로속에 가둠. 글 조차 배울 수 없는 지능이었기에 가상의 세상에서 외로움을 달랠 수 조차 없었던 그는 의미없이 달리거나 스스로 역할극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이러한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함.


이까지만 봐도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고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반전의 묘미를 살렸으며 그 와중에도 '14' 와 '무한대' 를 혼용하여 세계의 환상적 확장을 시도한 보르헤스에게 감탄을 표할 수 있겠지만, 작가의 후기를 읽어보면 이 단편의 진면목을 다른 측면으로 느낄 수 있음.


작가는 '아스테리온의 집' 이 조지 와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힘. 아래의 그림을 보자.








이제 보르헤스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보다 이해하기가 쉬워짐. 수평선을 아련히 바라보는 고독한 미노타우르스의 뒷모습에서 그의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지.


보르헤스 본인의 인터뷰들을 살펴볼 행운을 얻었다면 이 작품은 보르헤스 자신의 고백록이라는 것 또한 발견할 수 있음.


"나는 악몽에서 소설의 플롯을 얻곤 합니다. 자주 꾸는데, 미로의 악몽을 꾸곤 하죠...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어느 순간에든 구원이 죽음이라는 소멸의 형태로 찾아올텐데, 뭐하러 걱정을 해?" ㅡ보르헤스의 말, 마음산책


미로의 외로움 속에 고통받다 죽음이란 구원을 순순히 받아들인 미노타우르스. 인생의 후반기를 눈이 먼 상태로 살아가며 평생을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인생에서 고통받으며 죽음이라는 탈출구를 기다렸던 작가의 모습이 진하게 투영되는 모습에 보르헤스가 실은 생각보다 감성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




<알레프> 엔 이 외에도 '아베로에스의 탐색'이나 '신학자들' 과 같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훌륭한 단편들이 수록되어있음. 보르헤스라는 작가의 또 다른 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지. 하고픈 말이 많지만 마지막으로 한 편만 더 언급하고 끝내겠음.




<독일 레퀴엠>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악랄한 나치 수용소장 린데의 마지막 편지를 그린 작품임. 린데는 독백에서 슈펭글러의 개념을 인용하는데, 슈펭글러는 문명이 일종의 생애주기를 거쳐 몰락한다는 <서구의 몰락> 의 저자임.


슈펭글러의 이론에 따르면 문명은 크게 3가지, 역사에 무관심한 아폴론적 문명ㅡ고대 그리스로마ㅡ, 본질에 집착하여 담을 쌓는 마기적 문명ㅡ기독교, 이슬람 문명ㅡ, 무한과 궁극의 지식을 갈망하며 열려있는 파우스트적 문명으로 분류함. 주인공 린데는 그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 문명을 이끌어나간다고 판단된 나치당에 입당을 함.


화자 린데의 가치관은 사뭇 소름끼침. 잔혹한 고문과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는 나치이기도 하지만 나치의 정신에 따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ㅡ자신이 속한 나치 독일이ㅡ전 세계의 파우스트적 문명화를 이끌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함. 그렇기에 조국이 폭격과 반격으로 유린당하고 패배해가도 그것이 자신이 믿는 이상의 실현이기에 기뻐할 수 있었음.


가끔 웹상에서 유럽 열강들은 나치독일에게 감사해야한다는 농담이 돌기도 함. 제국주의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 등의 나라들의 악행 역시 기절초풍할 수준인데 나치가 그 업보를 싹 지고 사라졌다는 거지. 농담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나치독일의 행보는 온 인류의 죄를 안고 죽은 메시아와 유사하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도달함. 보르헤스는 린데의 입을 빌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하고있음.



물론 보르헤스가 얄팍한 논리로 나치전범을 옹호하는것은 아님. 그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과 모든 국가의 깊은 곳에는 나치가 숨쉬고 있다는 경고에 가까움. 여기서 이 단편의 제목인 "독일 레퀴엠" 이 참 적절하다는걸 알게 되는데, 기존의 레퀴엠(장례식 미사곡) 은 라틴어로만 작곡되었음. 하지만 브람스는 독일어로 이를 작곡해 보다 보편적인 레퀴엠을 만들었음. 심지어 브람스는 처음엔 이 곡에 인류 레퀴엠 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다고 함.


파우스트적 문명의 확장을 위해 제국주의 유럽의 죄를 짊어지고 희생한다고 주장하는 린데의 궤변, 거기에 장엄하고 숭고한 레퀴엠을 제목으로 붙인 보르헤스. 지금도 심심찮게 민족주의와 이민족간의 갈등이 화두가 되는 세상에서 곱씹어 볼 만 한 단편인것 같음. 우리 내면에 나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편 같은 주제를 좀 다르게 접근한 책이 있어 같이 소개하고싶네.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임. 가공의 극우작가들을 소개하는데 정작 제목과는 달리 진짜로 나치와 관련있는 작가는 없음.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나 열등감, 주변의 선동, 본능적인 혐오감 때문에 이민족 혐오와 민족주의를 부르짖게 된 가공의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지.


하지만 제목에 레퀴엠까지 붙여주며 나치 전범의 인간적인 부분을 묘사했던 발칙한 보르헤스와는 달리 볼라뇨는 그들을 블랙코미디의 형태로 조롱함. 평생 소리질렀건만 팔린 책은 총합 3권이라는 둥 그 누구에게도 기억받지 못한채 잊혀졌다는 둥..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유명한 마르케스등을 위시한 기존의 라틴 문단을 비웃으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던 볼라뇨 다운 감상이지.








"나는 픽션(fiction)을 쓰는 것이 아니라 팩트(fact) 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더운 여름, 보르헤스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