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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6년부터 약 2년 동안 김영건이 블로그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2019년 출판되기까지 10년 이상의 간극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본인이 느끼기에 유치한 부분은 수정했다고 하지만


젊은 그의 '파편'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책소개의 '파편'이라는 단어를 차용했다. 김영건의 지향을 본 받아 글을 담백하게 쓰고 싶었지만 그래도 '겉멋'을 위해 한번 써봤다.)


즉, 김영건의 시선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서문에서 그는 '철학을 문학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바라보았던 내 과거 관점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논증적 철학으로 변모'했다고 밝히는데


아직 두 관점이 공존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김영건의 고백은 매우 흥미롭다.

(물론 비대칭적 공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분석철학쪽으로)







↓ 솔직하고 냉철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


24 나는 강독 수업이 제일 싫다. 그냥 번역이기 때문이다. 언어 실력이 부족한 약자들은 결코 철학적 질문을 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한다.

24 철학책을 읽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번역이 철학의 모든 것은 아니다. 번역된 내용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 보는 것이 철학이다. 번역만 하는 철학 강독은 가짜다.

25 한 학기에 겨우 20페이지에 불과한 부분을 강독하는 철학 수업은 ‘쓰레기’라고 평할 수 있다.






김영건은 '논증'을 강조한다.


66 내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프랑스 철학의 어떤 사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이유는 거기에 논증이 보이기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런데 그들의 글조차도 논증적이지가 않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자들이나 그들에 대한 글도 잘 읽지 않게 된다. 동시에 잘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비판하게 된다. 이런 딜레마를 탈피하는 방법이 무엇이란 말인가?

80 멋 부리는 문장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준다면 그것은 괜찮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종류의 문장은 우리 사유를 ‘몽롱’하고 멍청하게 만든다.

103 독일 지식인들의 에세이 스타일, 그것은 그들의 개성 있는 스타일이지만 그 스타일에 적응하기는 참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불투명한 사유를 만들어내는 데 한 몫 한다고 본다. 아마 비트겐슈타인도 호흡이 짧아 이런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116 옛날에는 몽롱한 글에 대단한 의의를 부여했지만, 이제는 그냥 거의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47 한문 번역과 텍스트의 이해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말한다. 비판에서 만나게 되는 소리는 언제나 결론 뿐이다. 서양적 방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뿐이다. 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결과,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다.

136 동양철학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는 한문이나 한자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만을 하고 그것으로 표현된 생각을 논증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면, 단지 문자만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하나는 거기에 있는 세계관을 고집하려는 태도이다. 단지 거기에 있는 세계관만을 옹호하려면 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종교일 뿐이다.

187 동양철학에 대한 책을 쓰면서, 분석철학이라는 내 좁은 영역을 벗어나게 해준 것이 역설적으로 분석철학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논증 덕분임을 말했다. 비록 한자나 한문을 몰라도 내가 동양철학에 대해 논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을 한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논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09 전문학자로서 철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주장을 정당한 논거를 통해 입증하고 설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논거 없이 단지 소개만 하고 있는 경우, 또는 어떤 철학자의 사유를 해설만 하고 있는 경우, 그 노력에 비해 우리가 토론할 것, 또는 배울 것은 별로 없다.

159 내 생각을 전개하는 데 있어 먼저 해야 할 일이 쓸데없는 내용들을 갖다 붙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화려하고 휘황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런 허무한 화려함을 좋아하는 인간 유형들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소박한 동기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지적사기가 된다.







혹자는 김영건이 주장하는 '논증의 필요성'에 대한 논증의 필요성을 지적할 것이다.


아래 구절을 그 논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77 우리는 시를 해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어떤 사유를 전달하고 싶어서 글을 썼다면 함축적인 시와 다르게 자기 사유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독자를 위한 의무이다.


방구석 철학자의 노트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출판됐다면 철학자가 본인의 사유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도 그러하다. 그리고 김영건의 목소리는 아주 명확하다.)


전달이 전제된다면 전달되지 않는 글은 모순이다.


187 철학의 대상이 논증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강한 경향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반대하는 것인가? 역설적으로 그렇게 반대하는 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논거도 없이 반대한다면 그냥 "싫다"는 취향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논증적 철학을 반대하는 그들의 논증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분명한 것은 논증적 철학에 반대하는 생각조차 논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익살스런 글도 많이 있다.


104 나는 딱 각이 잡혀 있는 그런 단순한 건물이 좋다. 이런 내가 ‘남근 중심주의자’인가? 오히려 이런 명칭을 붙이는 자들이 더 웃기지 않는가? 복합적인 장식들이 오히려 어떤 핵심을 은폐한다. 혹은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206 『논어』는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논증은 없고 우리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주장들만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사유를 배울 수 있는 보다 기초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은 논증이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는 책을 읽는 것이다.


326 취미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냥 철학은 취미로 해야 하겠다. 취미로 철학하는 경우에는 철학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







철학에 대한 팩트 폭격


133 철학은 대충 겉멋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부하라. 철학적 실력이 어느 수준에 올랐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기초부터 정리해보는 것이다.


197 우리말로 철학해야 한다. 나는 이 주장에 찬동하지만, 어떤 철학적 의미 때문에 찬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이 보다 쉽고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뿐만 아니라 문장들도, 우리말을 사용하여 명백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췌된 글이기 때문인지, 실명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종종 맥락없이 대명사로 인물을 지칭한다. (가독성이나 명료성에 대한 주장과 충돌하는 부분이다.)


근데 이명박이나 가라타니 고진 등 대충 알만한 사람들은 노빠꾸로 나온다.







오랜만에 통쾌하게 읽은 책이다.


그의 주옥같은 어록들이 넘치지만 일부만 가져와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