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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라마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덕에 제법 인지도를 얻은 모양)


북풍은 서늘하고                     北風其凉

눈비는 펑펑 내린다                 雨雪其雱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惠而好我

손 잡고 함께 떠나리                擕手同行

어찌 망설이고 있으랴              基虛基邪

이미 급하고 급하거늘              旣亟只且


북풍은 세차고                       北風其

눈비는 펄펄 내린다                雨雪其霏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惠而好我

손 잡고 함께 돌아가리            擕手同歸

어찌 망설이고 있으랴             其虛其邪

이미 급하고 급하거늘             其亟只且


붉지 않다고 여우가 아니며       莫赤匪狐

검지 않다고 까마귀가 아니랴    莫黑匪烏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惠而好我

손 잡고 함께 수레에 오르리      擕手同車

어찌 망설이고 있으랴              其虛其邪

이미 급하고 급하거늘              其亟只且



그렇게 엄청 독특한 수법을 쓰지도 않았고, 기가 막힌 비유 같은 것이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시 "북풍"은 19세기 이미지즘의 거장 에즈라 파운드(1685~1755)로부터 "당신이 사랑이 뭔지 알고 싶다면, 북풍을 읽으라"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베이징에 본부가 위치한 국제시문학회(크게 중국, 중국, 그리고 중국의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다)에서 2013년에 뽑은 "최고의 시"에서 무려 2등에 선발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1등은 모택동의 시이다).


이 단순한 시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찬사를 받은 것일까?


먼저 이 시의 흥(興)을 한 번 살펴보자.


시경의 수사법이 크게 부, 비, 흥으로 나뉜다는 것은 어렸을 적 중화민족 기본 문학 교육 과정을 완수한 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부는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 비는 한 사물을 유사한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 그리고 흥은(사실 이것은 정의가 아직도 애매하긴 하다) 비와는 달리 꼭 유사성이나 인접성이 없는 사물이래도 그 사물을 묘사함으로서 생기는 "정취"를 빌려와 한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게 볼 때 북풍의 흥은 특이하다. 관련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시에서 묘사하려는 것과 정반대되는 풍경으로 기흥(起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묘사하려는 건 시경에 흔히 보이는 사랑과 결혼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의 기흥은, 흔히 생각할 따뜻한 첫눈 같은 것도 아니요, 세차게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폭설이다.


전통적으로 흥은 하늘과 인간이 상호감응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미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법이다. 굳이 시경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한시에서 처음에는 "복사꽃 달빛 받아 물이 다 빠졌는데" 같은 식으로 자연 경물을 묘사한 후, "내 마음 춘심은 아직도 남는구나" 같이, 곧장 자신의 내면을 얘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계와 인간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믿음. 그러나 북풍은 처음부터 그 믿음을 정면으로 배반하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역의 씨앗은 그 이데올로기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심어져 있다"라고 미국의 영화감독 슬라보예크 지젝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처음부터 그 천인합일 미학의 반역으로서 심어진 북풍은 자연과의 동화가 아니라, 매서운 자연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연인들은 손을 잡고 "떠나"거나,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전부일까? 이 시는 단지 전통적 세계관에 "아니!" 하고 커다랗게 외친 뒤에, 절망으로부터 도피하려고만 하는 그런 시일까? 


그때 세 번째 구의 변화가 시작된다. 


"붉지 않다고 여우 아니며, 검지 않다고 까마귀 아니랴."


이를 "붉지 않으면 여우가 아니고, 검지 않으면 까마귀 아니지"로 해석하는 것도 많이 봤는데, 필자는 "아니랴"가 맞다고 생각한다. 시의 화자는 이미 붉어야 여우고, 검어야 까마귀인, 세계의 기준과 스스로의 자기규정이 일치하는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북풍의 세 번째 구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세계와의 합일이 깨어진 그 순간에, 화자는 붉지 않아도, 검지 않아도 여우나 까마귀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일치가 없어도, 하늘과의 연결이 끊어져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다고, 우리를 지켜낼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전 구부터 진행된 변화이기도 하다. 처음 구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고자(行)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구에서는 돌아가고(歸) 싶어한다.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은 예전의 세계로 퇴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를 되찾으려는 시도, 즉 새로운 시대에 맞는 세계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렇게 돌아가려는 욕망은, "막적비호, 막흑비오"의 세계를 정초해내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제 연인들은 가지도, 돌아가지도 않는다. 수레(車)라는 시어는 이전의 것들과는 달리 방향성이 모호하다. 그것은 앞으로의 행로가 결정되지 않은, 하늘과의 연결이 끊어져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두 연인의 수레인 것이다.



그 정신은, 천명이 세상에 사라진 혼란의 시대에서 인간의 마음에서 천명을 발견한 맹자의 논변에, 악인에게 벌이 내리지 않고 선인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역사의 현실을 직접 심판하고자 붓을 든 사마천의 사서에, 비할 만하지 않는가?



실제로 사마천이 어렸을 적 이 시의 저자와 친구였다고 하니, 역시 의인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