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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게 봤는데, 엔딩이 너무 낙관적으로 끝나는 것 같다. 주요 테마는 계몽이고, 문치주의 전통 답게 학문에 열정이 있고, 큰 인물이 되고자 하는 포부도 있건만은 한국 미래는 저자가 원하는 방향과 좀 다르게 흘러간것 같다. 어쩌면 식자계층이고 문인이고 지식인 계급이 송두리 째 친일로 전향해서 메세지가 전달에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문학가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하나의 이데올로기고, 믿음인데, 그런 마음을 전달하기에 문학이 적절한 것 같다. 진짜 이성적인 것보단 감정적인 사항에 가깝다. 정확히는 인지를 통해 정서적 고양을 유도한다. 인지라는 게 정서적 만족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 미래 희망에 믿음을 굳건히 함도 커다란 정신적 소득이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밀알하나가 죽어 10배가 불어난다는 행위의 긍정적 영향을 확신하는 것. 확신을 강화시키는 것 희망을 강화 시키는 것이다. 진리추구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한 것이 성경 구절에서 따왔다. 


인지와 정서, 정서를 위한 인지. 계몽주의에는 그게 더 가까울 것이다. 계몽이란게 합리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진보와 미래의 희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으니까 반대로 인지를 위한 정서. 전근대적이다.  뭔가 대상을 진리로 규정하고 거기에 충성하는 격이다. 인지와 정서 객관과 주관으로 나뉠수 있는데, 어쨋든 나 외에 대상을 우선 삼는 것은 주권적이지 못하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는 사르트르의 말. 실존주의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도 계보상 전부 르네상스 이후 휴머니즘에서 시작되었다. 거기 인간의 존엄성회복이라든지 교양이라든지 전부 인간의 지배권을 확인하여 고양감을 느낌에 가깝다. 지나치게 낙관주의적으로 결말이 나는데 저자가 글을 썼을 때 20대 중반이였고, 미성숙함이 있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괴테 비롯하여 계몽소설이나 교양소설에서 대체적으로 마무리가 비극적으로 끝나진 않은 것 같다.


낙관적 전망과 달리, 일제 문인들이 대부분이 친일로 전향한건 안타깝긴하다. 계몽이든 뭐든 권력에 잘보여야 살아남는다고 판단하였다. 우리나라는 친일앞잡이 군부앞잡이 문인과 저항시인으로 뚜렷하게 나뉘는 편이다. 지금은 뭐 유토피아도 아니고 권력역학 나뉘어져 있고, 캉디드와 같이 최선의 세계라고 선전하는 건 프로파간다이고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앞잡이들 설치고 있다. 어쩌면 계몽이나 휴머니즘이나 낡은 인습에 충성하는 앞잡이들에게서 저항하는 역동성에서 발현될지도 모른다. 친일앞잡이가 무슨 계몽인가. 그런데 태평양 전쟁 때 백인 국가인 미국에 지배당하여 인종차별 당할바엔 같은 황인한테 지배 받는 게 더 낫다는 속셈도 있었다. 윤치호가 그런 케이스고, 근데 군부앞잡이는 용서가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