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카와나 미시마처럼 읽어 본 작가들 얘기가 나오니까 흥미로워짐...


5. 출구가 없는 것

자살한 일본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초기 작품 「나생문(羅生門)」은 이래저래 유명해진 소설인데, 일본 문학의 특색을 논하기에 적합한 예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지상주의자요 대단한 기교파인 아쿠타가와[芥川]가 자살까지 가게 되는 삯을 이미 간직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호에는 아귀라는 것이 있다. 오니[鬼]로 발음되는 그 말의 뜻은 글자 그대로지만 우리말로 귀신이라하기엔 적합하지 않고 도깨비라 할 수도 없는데 아귀라는 그의 호에서 예술지상주의에 투신할 것을 작심한 만만찮은 의기(意氣)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닫혀진 세계였다. 예술지상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에 「지옥변(地獄變)」이 있다. 소재(素材)의 특이성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다분히 조작성이 눈에 띄는데 그 작품 얘기가 나오면서 자연히 떠오르게 되는 것은 내용이 비슷한 김동인(金東仁)의 「광화사(狂畵師)」다. 「지옥변」의 표절인지 아닌지 그간의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하여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괴기와 탐미는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상통하는 점도 많다. 감각에 충격을 주는 면에서 그렇고 보편성과 휴머니티의 결여, 윤리 부재 또는 반도덕적인 것에서도 공통된다. 그리고 특이하지만 출구가 없는 것도 비슷하다. 그것은 총괄적인 인간의 삶 자체가 대상이라기보다 심층에 깔려 있는 인간성의 어느 부분의 의식을 끌어내어 그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본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바로 그 같은 특이한 세계인데 일본민족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로맨티시즘과도 무관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통속으로 떨어지면 괴기는 가이단[怪談]으로, 탐미는 와이단[猥談]으로, 로맨티시즘은 센티멘털리즘이 된다. 일본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은 대체로 그 정도 차이로써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 그 세계 밖에 나가면 바람을 타고 위축되어 버리는 것 같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말 중에 ‘스고이![凄い]’라는 것이 있다. 우리네의 굉장하다는 말과 같이 일종의 감탄사인데 크고 훌륭하다는 뜻의 굉장과 오싹하게 소름 끼친다는 뜻의 스고이, 일본도(日本刀)의 푸른 칼날의 번뜩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
그런 광경과 통하는, 오싹하게 소름 끼치는, 스고이의 뜻. 그 말 속에는 괴기와 악마적 탐미가 들어 있다.
아무튼 특이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비하여 편협하다는 의미와는 다르게 세계가 좁은 것은 사실이다. 일본 문학 중에 그 구성에 있어서 치밀하고 뛰어난 묘사력 세련된 문장 등 대단히 우수한 작품이 있으나 늘 주제가 약한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일본 문화의 전반적인 경향이 아닌가싶다.
추리소설가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작품세계에는 괴기와 탐미가 혼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추리소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차라리 엽기소설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에도가와[江戶川]의 몇몇 작품, 하도 오래되어서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맹인이 미녀를 납치하여 감각의 세계에 탐닉하다가 극치 속에서 여자를 살해하는 것이 있었다.5 그 비정의 탐미를 에도가와[江戶川]는 사랑의 극치로 항변하고 있는데 여담이지만 일본인들의 특이한 것에 사랑과 치정이 별로 구별되지 않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탐미의 극치 속에서 여자를 살해하는 과정이 아쿠타가와[芥川]의 「지옥변」에서는 간접적인 예술행위로 나타난다. 「지옥변」의 평풍을 그리기 위하여 화염에 휩싸여 타죽어 가는 외동딸의 모습을 예술적 감흥, 황홀경에서 미친 듯 그림을 그려 처절한 작품을 완성했으나 노화사(老畵師)는 목을 매 죽는 것이 개요인데 괴기와 탐미에다 예술지상을 투영하고 있다. 「나생문」은 괴기와 삶을 대비하고 있다. 대비한다기보다 괴기를 소도구(小道具), 배경으로 찌그러진 삶을 부각하고 있다.
삶을 부정적 시각, 혹은 악(惡)과 비정(非情)을 합리화하고 있다. 『곤자쿠 모노가타리[今昔物語]』에서 소재를 얻은 「나생문」은 흉년이 들어 황폐한 성내(城內)에서 갈 곳도 없고 아사(餓死)를 기다릴밖에 없는 머슴이 나생문에서 엉기적거리는데 나생문 누상(樓上)에 원숭이 같은 백발 노파의 괴이쩍은 행동을 본다. 노파는 쌓아올린 시체의 머리칼을 뽑고 있었던 것이다. 하인이 노파를 쓰러뜨린즉 노파는 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실토였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하랴, 하인은 노파의 옷을 벗겨들고 누상(樓上)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대강의 줄거리다. 바로 이것은 일본의 모습인 것이다. 과거 침략을 자행했던 역사도 그렇지만 경제대국으로 팽창하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짙게 그 옷자락을 끌고 있는 것이다. 『곤자쿠 모노가타리』에서 소재로 가져온 「나생문」에서 나는 삼국유사의 정수사구빙녀(正秀師救氷女)를 떠올렸다.
눈은 쌓이고 날은 저물고 정수(正秀)가 삼랑사(三郞寺)에서 돌아오는 길, 천엄사(天嚴寺) 문밖을 지나는데 한 여자 거지가 애를 낳고 누워 있었다. 그냥 두게 되면 얼어 죽기 십상이라, 정수(正秀)는 따뜻한 체온으로 여인을 안아주니 얼마 뒤 깨어났다. 정수(正秀)는 옷을 벗어 덮어주고 알몸으로 뛰어서 본사(本寺)에 돌아와서 볏짚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냈다.
중 정수(正秀)가 벌거벗고 본사(本寺)까지 달려가는 모습이 떠올라 빙녀의 비극보다 오히려 희극적 요소로 돋보이게 하는 글이었다.
아쿠타가와[芥川]의 「나생문」이나 「지옥변」은 출구가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비극으로도 보이지 않게끔 작가의 눈은 차갑고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다. 예술지상에 몸 바친 화사(畵師)와도 같이, 예술지상주의자 아쿠타가와[芥川]도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아니 모든 생명은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도 삶의 투쟁, 삶의 인식, 삶의 조화 그 모든 삶에 수반되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신묘한 본질적 삶의 교향악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은 삶의 추구며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