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의식을 보는 관점은 그 시대의 정신에 크게 좌우된다. 합리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정도에 따라 개인이 무의식과 그 산물을 다루는 데 호의적이거나 호의적이지 않게 된다. 기독교는 모든 폐쇄적인 종교 체계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무의식을 가능한 한 억누르는 경향을 보이며 개인의 공상적 활동을 마비시키고 있다. 종교는 그 대신에 개인에게 정형화된 상징적 개념들을 제시하고, 이 상징적 개념들은 개인의 무의식을 영원히 대체하게 된다. 모든 종교의 상징적인 개념은 무의식적 과정들을 보편적인 구속력을 지니는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종교적 가르침은 말하자면 인간의 의식 그 너머에 있는 세상과 "궁극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다. 종교의 탄생을 지켜보면 교리적인 상징들이 계시를 통해서, 다시 말해 창시자의 무의식적 공상의 구체화를 통해 창시자 본인에게 흘러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창시자는 본인의 무의식에서 솟아 나오는 형상들을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선언하고, 이 형상들은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공상을 대체하게 된다.
복음 전도자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과정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광야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왕국이란 개념이 예수의 무의식에서 어떤 식으로 사탄의 환영으로 나오게 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계를 통치할 권력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예수가 공상을 오해하여 정말로 받아들였더라면, 세상에 광인이 한 사람 더 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공상의 구체성을 부정하며 천년의 왕국을 지배하게 될 왕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그는 편집증 같은 것을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후의 결과가 증명하는 그대로이다. 예수의 심리가 불건전했으며 정신병적이였다는 견해들은 터무니없는 합리주의에서 나온 헛소리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에서 이 과정이 지니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내놓는 견해인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무의식의 내용을 세상에 드러낸 형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또 유효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영지주의와 그 후의 다른 이단들은 박해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주교들이 수도사 개인의 무의식적 행동을 배제시키려고 얼마나 열광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알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오의 전기에서 이 점에 관한 소중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수도사들을 가르침으로써 안토니오는 홀로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환영과 환상의 위험을 묘사한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악마가 성스러운 사람을 타락시키기 위해 감쪽같이 변장한다는 점에 대해 경고하였다. 물론 악마는 수도사 본인의 무의식의 목소리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전기에는 개인의 무의식이 진리를 밝히고 있음에도 일반적인 신앙에 의해 부정당하는 장면이 자주 묘사된다. 정신의 역사를 보면 무의식이 부정당하는 특별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이유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이 억압받았다는 사실에서 만족해야 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억압은 곧 리비도의 철회다. 이 철회로 인해 새로 얻게 된 리비도는 의식의 성장과 발달을 촉진한다. 그 결과 세상이 점진적으로 다시 그려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편의는 새로운 태도를 강화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심리가 무의식에 비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특징을 보이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심리 유형, 1920년)
"우리는 '에너지'의 본질을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에너지가 추상적인 개념인 것인지, 아니면 에너지에게 실체가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던 것이다. 현대의 유명론자는 에너지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란 것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 언어에서 에너지를 마치 사물처럼 다루며 우리의 머릿속에 인식론적인 혼동의 씨앗을 심는다. 추상 작용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끼어들면서 속성 또는 관념에 "실체성"을 불어넣는, 순수하게 개념적인 것의 사물성은 인공적인 산물이 아니다. 개념을 자의적으로 실체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추상적인 관념이 실체화되어 똑같이 인위적인 기원을 갖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로 옮겨진 것이 아니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실은 그 반대였단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미개인들 사이에 심상, 즉 감각 지각이 일으키는 정신적 영향은 강력하고 화려하다. 그렇기 때문에 심상이 기억 속의 이미지로 다시 떠오를 때면 간혹 환각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어느 미개인에게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면, 그 원시인이 보고 듣는 것은 마치 어머니의 귀신처럼 느껴진다. 우리 현대인은 단지 죽은 사람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미개인은 심상의 감각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을 실제로 지각하고 있다. 이는 미개인이 영혼과 정령을 믿는 이유에 대한 설명해준다. 미개인이 믿는 영혼과 정령은 우리 현대인이 "생각"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미개인들은 "생각"할 때 환상을 떠올린다. 이때 환상의 현실감이 강하기 때문에 미개인은 정신적인 것을 끊임없이 현실로 착각한다. 미국 지질학자 포웰은 "문명화되지 않은 사람들의 사고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혼동은, 객체와 주체를 혼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국 인류학자 스펜서와 호주 인류학자 길렌은 이렇게 썼다. "원시인이 꿈을 꾸면서 경험하는 것은 그가 깨어 있을 때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이다.
나 자신이 흑인들의 심리를 관찰한 결과 얻은 결론도 이 발견들을 뒷받침한다. 정신적 실체성과 감각 지각의 자율성, 그리고 심상의 자율성으로부터 정령들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다. 미개인들이 정령을 숭배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서 지어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유럽인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짐작하는 것일 뿐이다. 미개인에게 생각은 시각적이고 청각적이다. 고로 생각은 계시적이다. 마법사는 항상 부족의 사상가로서, 영혼이나 신의 현시를 끌어낸다. 생각에는 마법적 효과가 있다. 생각도 행동만큼이나 유효하다. 생각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외피인 단어도 진실된 효과를 발휘한다. 단어도 기억 속에서 표상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미개인의 미신이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현대인이 심상에서 감각을 배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추상적 사고를 배웠다. 그런데 추상적 사고의 교육에도 앞서 언급한 한계가 늘 따를 수밖에 없다. 임상 치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교육을 잘 받은 유럽인 환자에게도 생각이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줘야 한다. 우리가 때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에, 때로는 무엇인가를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심리 유형, 1920년)
"죽음은 특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관심사이다. 사람에게는 강제적인 질문이 부여되며, 그는 질문에 답할 의무를 지닌다. 이성은 그가 내려가는 곳에 검은 구멍만이 기다리고 있단 것을 알리기에, 끝에 이르러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미신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미신이긴 하나, 이는 다른 표상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죽음의 영역에 다다른 삶을 풍부하게 그려내는데 도움을 준다. 만일 사람이 미신을 믿거나, 어떠한 신념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반긴다면,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틀렸다고도 맞는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절망에 찬 사람이 무를 향해 행군할 때, 원형에 따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삶의 길을 따라가며 죽음 속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느 방식이든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나 한 명은 본성을 거슬러 살아가며, 다른 사람은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얻었던 인식으로 말미암아 죽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인식의 상한선이 결정된다. 이것이 지상의 삶이 그토록 가치 있는 이유일 것이며, 사람이 죽음에게 바치는 것이 소중한 이유일 것이다. 오직 지상의 삶에서만,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격돌하고 있고, 의식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형이상학적인 과제로서 미신이 없이는 수행될 수 없다. 미신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매개하는 제거될 수 없는 단계이다."
(죽음 후의 삶에 관해, 1934년)
"생명체를 환경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장내 기생충의 특징들, 수중 생활로 돌아간 척추동물의 신체 구조 등 환경적인 요건에 대한 반응으로만 설명 가능한 수많은 생물학적 현상들이 존재한다. 정신 또한 마찬가지다. 그 특징적인 구조는 환경적 요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의식이란 그 순간의 사건을 다루는 정신의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현재에 맞춰 반응하고 적응할 것이라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관계없고 보편적인 정신의 부분인 '집단적 무의식'에 있어서는 우리는 보편적이고 상수적인 조건에 맞춘 심리학적, 생리학적 그리고 물리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집단적 무의식은 신화적인 모티브나 원형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여러 국가의 미신이 이를 대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별자리의 경우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본래 무작위적인 형태에 이미지를 투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점성술사들이 말하는 별들의 힘이란 이것을 뜻한다. 힘은 그저 무의식일 뿐이며 집단적 무의식의 작용을 향하는 내성이다. 별자리가 천구로의 투사이듯이, 전설과 동화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도 투사가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집단적 무의식을 연구할 수 있다. 신화 혹은 개인을 연구함으로써. 후자의 경우는 가져올 수 없기 때문에 신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살아있는 육체의 여러 특징들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듯이 정신 또한 규칙적인 물리적인 현상에 대비하기 위한 기관 혹은 기능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체 기관에 대응되는 감각적인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물리적 현상의 심리적인 대응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의 일주와 밤과 낮의 주기적인 전환은 원형적인 태고의 시대에서부터 정신 속에 이미지를 남겼을 것이다. 이런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물리적인 현상에 대한 덜 환상적인 유비를 이끌어낼 수 있다. 매일 아침 신성한 영웅이 바다에서 태어나 태양의 전차를 이끌고 나타난다. 서쪽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으며, 저녁에 그는 어머니에게 삼켜진다. 그는 용의 뱃속에서 밤의 바다의 심연을 여행한다. 용과의 소름 끼치는 전투가 끝난 뒤 아침에 그는 다시 태어난다.
이 복합적인 미신은 명백히 물리적인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해서 많은 연구자들은 이런 미신은 그저 물리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가정하곤 했었다. 과학과 철학이 미신의 틀에서 자라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원시인들이 그저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물리적, 혹은 천문학적인 이론으로써 이런 것들을 떠올렸다는 것을 믿기 어럽다.
(...)
정신 속에 남는 것은 폭풍 그리고 천둥, 번개, 비, 구름이 아니라, 이것들이 일으킨 공상이다. 나는 격렬한 지진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든 생각은 내가 익숙하고 굳건한 땅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발밑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동물의 거죽 위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이미지였으며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사람은 파괴적인 폭풍우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원소의 해방이고 인격화된 자연의 분노로 이런 과정을 통해 순수히 물리적인 현상은 격노하는 신으로 변한다. 환경의 물리적인 조건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적인 조건, 생식선의 분비 등 또한 환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성욕은 다산의 신, 여성형의 악령, 디오니소스의 염소의 다리를 단 음탕한 악마, 혹은 희생양을 죽을 때까지 짜내는 끔찍한 뱀으로 나타났다. 기근은 음식을 신으로 만든다. 어떤 멕시코 부족에서는 음식의 신이 회복할 수 있도록 매년 주식을 먹지 않는 명절을 지낸다. 고대 파라오들은 신을 먹는 자로 숭배되었다. 오시리스는 밀이고 땅의 아들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성체는 반드시 밀로 만들어야만 한다. 이외에는 엘레시우스 밀교에서 숭배된 라쿠스, 땅의 수확물인 미트라스의 황소 등의 예시가 있다.
심리학적인 조건들도 비슷한 미신적인 흔적을 남긴다. 위험한 상황들, 육체나 영혼에 위험한 상황들은 그 영향이 축적되어 미신을 낳고, 이러한 조건들이 전형적인 형태로 반복되는 경우에는 원형을 낳게 된다. 원형은 대체로 신화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역동성과 구조, 1960년)
"근대인들은 대게 사물과 관념이 지니고 있는 공상적, 심리적인 연상을 전부 다 무의식에 내맡긴 채 살아간다. 그러나 미개인들은 아직 연상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힘을 동물, 식물, 바위에 부여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원주민들은 대낮에 야행성 동물을 보면 마법사가 변신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초원의 영혼이나 자기네 부족 선조의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나무 한 그루가 어느 미개인들의 삶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수도 있다. 나무는 사람에게 속삭이는 영혼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당사자들은 나무와 운명을 함께한다고 느낀다. 남아메리카의 어느 인디언 부족은 사람에게 깃털도 날개도 부리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네 부족이 붉은 앵무새라고 확언한다. 이는 우리의 합리적인 사회와는 달리 미개인의 세계에서는 만사가 뚜렷이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근대인의 세계에서는 심리학자들이 '심적 동일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 연상이라는 후광은 바로 이렇게 미개인 세계에 풍부한 색채와 공상적 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먼 옛날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한다. 연상은 의식의 영역 밑에 잠복하고 있다. 이따끔 우연에 의해 의식의 표면에 나타나더라도 우리는 그저 뭔가 이상하다고 여길 뿐이다.
교육을 잘 받은 영리한 사람들이 이상한 꿈이나 환상에 직면하고는 심한 충격을 받아 나에게 상담하러 온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 사람들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확신하며 병적 장애가 있는 사람만이 환상을 본다고 굳게 믿는다. 언젠가 한 신학자가 내게 '에제키엘의 환상은 병적인 증세이며 모세 같은 예언자들이 들었다는 하나님의 음성도 실은 환청을 뿐이다'라고 했다. 한데 그에게 똑같은 일이 '저절로' 일어난다면 그가 얼마나 놀랄지 아마 상상이 갈 것이다. 우리는 언뜻 합리적인 세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한다. 미개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대신 물신이나 정령을 떠올릴 뿐이다."
(인간과 상징, 1961년)
"누가 식물이나 동물이 스스로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를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과 정신이 스스로를 만들었으며 그 자체가 자기 존재의 창조자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는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나고, 파충류가 포유류로 진화했듯이, 우리 마음도 서서히 성장하여 현재 의식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마음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발전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다. 우리는 외부 자극은 물론이고 내적인 힘에 의해서도 움직이고 있다.
내적 동기는 마음속의 깊은 원천에서 비롯된다. 의식은 이것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통제하지도 못한다. 고대 신화에서는 이 힘을 가리켜 마나, 정령, 악마, 또는 신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이 힘이 우리 소망과 일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발상이나 동기라고 부르면서, 용케 그런 것을 포착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낀다. 반면에 그 힘이 우리 의도와 반대로 작용할 때에는, 불운하다느니 누가 나를 적대시하고 있다느니, 뭔가 병적인 원인이 자기를 불행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근대 문명인이 의지력을 획득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의지력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근대인은 어떠한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거나 북을 쳐서 자기 최면을 걸 필요 없이, 스스로 행동하는 법을 익혔다. 날마다 신의 도움을 바라면서 기도하는 일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미개인은 행동의 모든 단계에서 두려움이나 미신이나 그 밖에 보이지 않는 장애로 제약을 받지만, 근대인은 하고픈 일을 할 수 있으며 자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격언은 근대인의 미신이다. 이 신조를 지키느라 근대인은 내성을 소홀히 한다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근대인은 합리적인 생활 속에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힘이 얽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신이나 악마는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단지 새로운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이 존재들은 근대인들에게 막연한 불안감, 내면적 갈등, 약물과 음식에 대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특히 온갖 신경증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과 상징, 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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