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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강대 사학과의 1996년 박사논문이다.
1장에서는 성호학파의 양명학 수용과 전승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가 처음 주목한 인물은 이병휴(李秉休)였다. 이병휴는 당시 성리학 절대주의에 대하여 비판하였고, 당시 이단으로 배척하던 양 · 음 · 노 · 불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7~9쪽) 또한 양명학의 영향을 짙게 받았는데, 이는 이병휴의 인심도심설(人心道人)에서도 드러난다. (17~25쪽)
저자는 이기양((李基讓)의 학문적 성향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이기양 역시 ‘미발의 중’ 의 해석에서 정주학과 차이를 보이기에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30~31쪽) 또한 이기양이 양명학을 언제 받아들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화학파의 영향이 아닌 이병휴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33~35쪽)
다음으로 저자는 권철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권철신은 이기양에 의하여 양명학을 수용하였지만 양명학을 수용하기 이전부터 정주학의 수양론에 대하여 모순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44~45쪽) ‘지행’과 『대학 경 1장에 대한 견해는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다 (45~46쪽) 그러나 그는 안정복과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했기에, 주자학 기반인 안정복의 영향으로 1766년에 이미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1769년에 이기양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46~49쪽)
이어서 한정운(韓鼎運)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 등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는 안정복의 사위이기도 했다. (54쪽) 권일신은 권철신의 사상을 잇고 있었다. (55~56쪽) 이가환 역시 양명학을 수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이기양이 양명학을 수용한 뒤 양명학이 한정운, 권철신, 권일신 이가환 등의 학자들이 양명학을 수용하여 양명학이 성호학파 내에서 소장학자들의 지배적인 학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60쪽)
이후에는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해당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권철신의 제자들은 정약전(丁若銓), 이벽, 이승훈 이총억(李寵億)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1779년에 권철신의 주도로 개최된 주어사 강학회에 참가하였다. (62~64쪽) 따라서 저자는 “권철신의 제자 대에 이르러 양명학은 성호학파 넹[ 더욱 널리 전파되어 성호학파의 주된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한층 확고히 하였다.”라고 평가한다. (73쪽)
다음은 천진암 주어사 강학과 양명학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서 천주교에 대해 논하지 않고 양명학에 대한 토론만 있었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강학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는 관점의 연구를 비판한다. (74~75쪽 각주 3~4번) 이들이 강학회의 천주교 관련 내용에 대한 근거는 달레의 서술을 근거로 하는데, 저자는 이를 비판하며, 실증한다. (78~79쪽) 이 실증 작업은 90쪽까지 이어진다. 특히 천주교 배척에 앞장선 이기경이 이승훈 등과 친밀하였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승훈의 천주교 서적 수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천주교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 부분이 주목된다. (86~87쪽)
저자는 주어사 강학회가 양명학을 성호학파 사이에 전파시키는 것에 큰 역할을 했으며, 당시의 강학회가 일반적안 학문 연구 방법과 구별되는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98~100쪽)
다음 장에서는 성호학파 양명학자들의 서학 수용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들은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습득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기양과 이승훈, 이가환, 정약전, 이벽 등이었다.
특히 정약용의 경우,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고, 관상감 직원을 비롯한 기술직을 북경에 보내 북학을 배우게 하자고 건의하였고, 이용감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124~125쪽)
이처럼 성호학파의 양영학 계열이 서양과학기술 연구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성호 이익의 영향이 컸다. 성호 이익은 효제와 덕행과 더불어 사공과 재능을 선비의 필수 자질로 중시하였다. (129쪽) ( 『성호사설』, 13, 인사문, 영강사공) ( 『성호사설』, 10, 인사문, 공검) 또한 글에서는 정조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요인 중 하나로 들고 있다. (129~133쪽)
그러나 결정적 요인으로 꼽는 것은 주자학과 중국 및 강화학파의 양명학과 달리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은 사실과 가치의 세계를 확연히 구분하고 이와 기에 대한 개념들도 사실에 관한 측면과 가치에 관한 측면으로 이원화하고 있다. (137쪽) 반면 중국이나 조선의 강화학파 등의 양명학자들은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구분하였으나, 가치 측면인 도덕적 자각능력을 중시하고 사실에 관련된 사물의 이치나 그 인식은 중요시하지 않았다. (137쪽) 즉 저자는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은 서양과학기술을 수용할 만한 이론체계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138쪽)
다음 장은 성호학파 양명학자들의 천주교 수용에 대해 논하고 있다. 성호 이익은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천주를 고대 경전에 나오는 상제와 같다고 이해하였다. (140쪽) (이원순, 『조선서학사연구』, 일지사, 1986, 149~151쪽 참고)
성호학파의 인물들 중 아숭훈은 1784년 봄에 영세하였고, 이벽 또한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들을 읽은 후 1784년 9월에 이승훈에게서 영세를 받았다. (141쪽)
정약용은 1784년 4월 15일 서울로 오는 배 안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다 본 뒤 입교하였다. 권일신은 이벽으로부터 전도를 받은 후 즉시 입교했으며, 권철신은 이후 권일신의 권유로 입교하였다. (141쪽)
저자는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들이 인격적인 신의 존재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하며, 그 근거로 이들이 추종했던 윤휴의 학문에 사천(事天) 경천 등의 표현이 있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153쪽) 또한 주어사 강학회에서는 종교적인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었고, 이는 천주교와 상관없는 유교적인 것으로서 이미 인격신이나 상제가 전제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53쪽) ( 『다산의 정치경제 사상』, 창작과 비평사 1990, 317~318쪽 참고)
또한 그들은 윤리론과 이기론적 자연관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하고, 주자학과 달리 윤라학에서 이기론적 자연관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고, 자연에 대한 지(知)는 경험적인 것으로 그에 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윤리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자연관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154쪽)
그리고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은 본래 유신론을 가지고 있었고, 서양 과학기술의 탐구를 통해 창조론과 영혼론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155쪽)
저자는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천주교 수용에서 주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양명학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55쪽)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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