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하지만 해당 작품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두부터 갑작스럽지만 만신(漫神)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가져와 보았다. 1945년에 그린 <승리의 날까지>라는 만화다.
왜 <카구야님은 고백 받고 싶어! ~천재들의 연애 두뇌전~>(이후 <카구야님>으로 통칭.) 같은 씹덕망가를 리뷰하는 데 데즈카 오사무까지 갖다 쓰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중요한 문제다. 왜냐면 내가 <카구야님> 3기를 보고 러브코미디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떠벌린 바람에, 그걸 보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쓰카 에이지에 따르면, 저 <승리의 날까지>란 짧은 만화는 만화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아무리 봐도 그저 공습을 피하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인데 뭐시 그리 중헐까? 키포인트는 ‘만화에 있는 인간도 피를 흘릴 수 있다’는 점이다.
어이없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톰과 제리>에서 톰은 제리를 괴롭히다가 몸이 짜부되기도 하고 분쇄기에 갈리기도 하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들은 그저 종이 위에 그려진 이차원의 모형일 뿐이니까.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승리의 날까지>는 한가지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림으로 그린 허상일 뿐이지만, ‘그들도 총을 맞으면 죽고, 한번 뿐인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을 세운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만화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과 더불어, ‘현실의 반영’이란 또 하나의 테마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만화는 두가지 방향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최대한 비현실적일 것! 둘째, 최대한 현실적일 것!
<카구야님>의 럽코 만화사적 의미는 이 두가지 방향성을 모두 충족해낸다는 것에 있다. 러브코미디라 하면, 결국은 썸과 고백과 연애. 그중에서도 럽코의 꽃은 단연 고백이다.
<카구야님>은 울트라 로맨틱 편에서 비현실적 고백의 금자탑을, 보통의 로맨틱 편에서 현실적인 고백의 금자탑을 세워낸다.
울트라 로맨틱은 그동안 일본 러브코미디 만화가 갖고 있던 비현실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에피소드이다.
수상하게 권력이 강한 학생회장이 학교를 점령한 뒤, 캠프파이어가 가장 잘 보이는 학교 옥상에서 수백 개의 풍선을 휘날리며 재벌2세 미소녀한테 고백한다는 전개는, 현실에선 결코 있을 수 없고, 만화라 해도 거대한 스케일이다. 말마따나 울트라 하다.
이 순간, 카구야와 시로가네는 기호적 육체에 머물러 있다. 정확히는 기호적 ‘고백’이라고 해야겠다. 이들의 고백은 마치 톰과 제리와 같다.
흑발적안 재벌 2세 미소녀와 노력파 학생회장. 성대하게 열린 캠프파이어, 수상하게 권력이 많은 학생회와 그들에게만 허락된 학교 시계탑 옥상, 수백 개의 풍선과 어른의 키스. 이는 만화적 데이터베이스의 집합에 다름 아니다. (시로가네가 코스프레를 하고 있던 것은 하나의 힌트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보통의 로맨틱 편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도 말해볼 수 있겠다. ‘현실적’이라는 표현이 꼭 ‘사실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현실에서 이들과 비슷한 사례가 얼마나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관점을 확장하는 ‘입체성’에 있다.
최고로 비현실적인 울트라 로맨틱이 끝난 이후, 이들은 한번 더 고백해야만 했다. 왜냐면 울트라 로맨틱은 진짜 고백이 아닌 기호적 고백이었으니까.
보통의 로맨틱에서 등장하는 것은 내면의 콤플렉스와 열등감, 불안, 우울이다. 여기선 평면적인 데이터베이스를 넘어, 입체적인 내면 분석으로 향한다.
(여기서 내면분석의 깊이를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러브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을 얼마나 잘 살렸는가, 즉 연애와 내면분석의 자연스러운 조화이므로.)
상처의 확인과 치유가 이뤄지며, 이들은 전과는 상반된 몹시 조용한 고백을 한다. 당연하다. 여기는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현실의 반영이니까.
이처럼 <카구야님>은 비현실적 데이터베이스 조합으로서의 압도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울트라 로맨틱’과
내면분석을 통한 인물상의 입체적 확장이 이뤄지는 ‘보통의 로맨틱’ 두 번의 고백이 행해지며,
‘현실적일 것’과 ‘비현실적일 것’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이율배반적인 성취를 거둬낸다.
여기까지 <카구야님>이 왜 최근 럽코만화 GOAT인지를 설명하는 긴 뻘글이었다.
가끔 씹덕비평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에반게리온의 라캉적 접근, 슈타인즈게이트의 변증법적 구조 파헤치기, 사이코패스와 푸코 겹쳐 읽기 등등...
장르가 애매해 독갤에 올릴 날이 올지는 모르겠는데, 마침 기회가 생겨 한편이라도 독갤에 올릴 수 있어 좋았다.
- dc official App
다~디 다디 두
보통의 로맨틱에서 등장하는 것은 내면의 콤플렉스와 열등감, 불안, 우울이다. 이건 먼말이농?
럽코 만화의 장르적 법칙을 따른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인간 내면의 콤플렉스와 열등감, 불안, 우울 등의 생리적인 감정묘사가 나온다는 의미임.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내가 현실-비현실이라는 단어를 택해서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저 승리의날 만화가 중요한 건 육체의 문제임. 그 이전의 만화(기호적 육체)에선 톰과제리의 톰처럼 언제 어디서든 재생 가능한 기호일 뿐이었는데, 저 승리의날 만화 이후로 피를 흘리고 아픔을 느끼는 '진짜 육체'(현실의 반영으로서의 육체)를 얻게 됨.
그런 만화사적 전환을 러브코미디 장르의 특성에 맞춰서 기호적 고백-진짜 고백으로 표현해본 것이고, 사실 머 깊이 생각하고 쓴 글은 아녀 ㅋㅋ
여기다 ㄴㄷㅆ 달면 되는거지?
네 맞워요
하지만 우리는 받아치기만 기억하지
그래서 A1이 극장판까지 만드는 거였군요…
3기 울트라로맨틱 - 극장판 보통의 로맨틱은 ㄹㅇ 전설이다...
다른 글들도 보고 싶네
https://m.dcinside.com/board/kyoani/290978
요런
것도 쓰긴 했워요
오, 우테나도 봄? 개인적으로 이쿠하라 작품은 아무리 최신작이어도 결국 우테나의 바운더리 안에서 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더라. 물론 하나하나 최소 수작 이상은 되는 듯. - dc App
앤 오프닝 맨날 코인노래방에서 부르는데 뽕짝필 너무 좋음 - dc App
오 럽 미 미스터~
오
왤케 잘씀
오스카 에이지가 말한 거 어제 유운성 책에서 읽었던 거 같음 - dc App
사이코패스 푸코 "써줘"
잘 읽었습니다 이런 필력을 쿄갤에서도 쵸큼 발휘해 주시와요
에반게리온, 슈타게 꼭 한번 읽고 싶습니다 선생님. 특히 슈타게는 문학적 접근 해석을 많이 못 봐서 꼭 보고 싶네요. 어디서 어떻게 보면 될까요 - dc App
나중에 쓰게 되면 여기 답글로 링크 올리겠음. 언제가 될진 모르겠는디... - dc App
부담갖지 말고 편하게 써주세요. 타인의 간섭에 영향받으면 좋은 글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 dc App
와 카구야 최애 애니인데 굿굿 재밌게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