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함을 감지하고 멈춰서는 일과 이상함을 감지하고도 끝까지 파고드는 일은 어떻게 다를까? 정말 비트겐슈타인이 유사성의 철학자일까? 비트겐슈타인이 그저 유사성의 철학자라면, 비트겐슈타인은 재능있는 철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건포도는 케이크의 맨 윗 부분이 아닌가. 하지만 건포도 한 주머니 쪽이, 케이크 1개보다 더 좋을 이유는 없다. 건포도가 꽉 들어찬 봉지를 주는 사람이 있어도,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케이크를 구어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보다 더 훌륭한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크라우스와 그가 말한 격언에 대해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나의 철학 문장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케이크. 그것은 엷게 늘린 건포도와 같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 -비트겐슈타인, MS 136 91b : 11.1. 1948.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는 비슷한가? 비트겐슈타인은 크라우스를 "이상한 재능은 있었으나 천재는 없었다."라고 평가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반-로크적인, 유사성의 철학자라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엷게 늘린 건포도같은 철학일 뿐이다.
콘 아이스크림의 끝부분에 달린 초콜릿은 과자가 눅눅해져 아이스크림이 흐르는 것을 막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마지막에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Muddy bites는 콘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만족감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콘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 없는, 그래서 콘 아이스크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Muddy bites를 본다면 뭐라고 설명할까? 그 사람에게 Muddy bites는 씨리얼이나 칸쵸같은 간식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간식거리를 만드는 장인의 손을 통해 기교가 아닌 만족감을 느낄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결국 엷게 늘린 건포도같은 철학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케이크 위에 올려딘 건포도의 역할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오직 의미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케이크 위에 올려진 건포도를 보여주기위해 끊임없이 유사한 논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건포도는 '케이크 위에 올려진' 건포도지, 엷게 늘린 건포도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의 머리말에서 "새로운 사상은 나의 낡은 사상과의 대비에 의해서만이 또 그 배경 아래에서만이 정당한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파고들었지만 끝내 멈춰섰고, 그런 작업을 통해 '실제보다도 더 위대하게 보이는 일면'들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하나의 고정된 그림이 아니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의 풍경은 핵심적이고 명료하다. 나는 한껏 체념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비트겐슈타인을 본다. 그는 크라우스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직 건포도만 이야기하거나 빵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일관성을 위해 모난 부분을 은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느낀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여러 형태로 찢어내지만, 그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오히려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보다 훨씬 뛰어난 장식실력을 가진 철학자도 많다. 굳이 그 재능인들의 목록에 비트겐슈타인의 이름 하나를 추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유사한 겉보기라도 그건 그저 우연하기 때문이다. 욕심쟁이, 바보, 그리고 정직한 사람만이 중간길을 걷는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정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역사에 남기를 희망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천재가 되기를 희망하는 인간으로,
자기 자신을 정신만으로 부풀어오른 공허한 튜브처럼 보여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MS 153a 12v : 1931.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마세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
모르겠음... 그가 유사성을 주장한 반-로크라는 게 비트겐슈타인을 엷게 늘린 건포도로 본다고 결론짓는 게 좀 이해가 안됨. 굉장히 유명한 나는 볼츠만, 헤르츠, 어쩌구부터 해서 칼 크라우스와 루스까지 설명한 그 글을 살펴보면 자기는 천재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업적에 변주만 했다는 겸손한 표현을 쓰고 있음. 칼 크라우스는 케이크 위 생크림을 빙판 삼아
스케이팅을 하고 있는 것이고, 비트겐슈타인이 하는 일은 그렇게 예술과 풍자를 가능키 하기 위해 그 빙판을 만드는 기술자, 다채로운 조망들을 만드는 길잡이 역할을 할듯. 여기서 윤리의 역할이 나올듯. 논고에 전쟁일기가 있듯이 탐구에도 윤리를 다루는 내용을 담으려 했을 거임.
윤리 즉 문화의 내용이 있어야 크라우스 같은 건포도들이 케이크 위에서 뛰놀 수 있었겠지. 엥겔만인가? 건축가가 말한 모든 부분에 신이 있으므로 정말 천천히 만들어내라는 말처럼, 케이크를 천천히 만들었고, 윤리조차 들어갈 수 있었으나, 멈춰 서기보다 책의 엄밀성을 위해 기다린 거지.
완곡하게 말하고싶지만, 화이트헤드나 데리다는 크라우스와 크게 다르지않다는게 내 결론임. 비트겐슈타인이 단순성에서 유사성으로 자기 '요청'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윤리는 너무나 하찮은것임. 나는 <탐구>가 그의 '요청'일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 '결과'라는 점에 주목하고싶네.
그것이 지식인이 할 먼한 기다림이지 않을까. 그런 완벽주의가 결국 문제를 일으켰지만.
자신의 생각이 익기를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생각이 '썩지 않도록' 희망하는게, 장식을 치우는 그의 습관에 더 걸맞은게 아닐까 생각해.
내 생각은 극단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것을 거의 확신함. 비트겐슈타인은 오직 윤리를 위해 글을 썼음. 후기 비트겐슈타인 또한 키르케고르적인 빈의 한 유행에 대항하기 위해 슈프랑어와 슈펭글러를 대신하려는 사례로 봄.
https://m.dcinside.com/board/reading/146129
이건 그 생각에 아주 큰 도움을 줬음. (사실 내가 쓴 글이라 해선 안되고, 스티븐 멀홀의 논고 해석임. )
윤리가 말하는 영원의 상이 미래가 아닌 현재라면, as if역시 해소해야 할 것이겠지.
어... 진짜 뭔말인지 모르겠... 뭐뭐인것마냥 이란 방식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말은 비트겐슈타인은 하는 말이 아니고, 스피노자 관조에서 의미도 이상하고, 지금 이 토론과도 관련이 없고...
1. 크라우스가 되었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크라우스와 비트겐슈타인의 목표 자체가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은 마치 생태계를 만드려고 했다 2. 건포도 관련 문장에 이해를 잘못한 거 같다, 아무래도 내가 케이크 역할을 하겠단 말이다 3. 비트겐슈타인에게 윤리는 아주 중요하고, 후기 철학에선 그것이 종교와 문화와 유머 부분에서 남아 있다 뭐 이게 요약임
생태계를 만들지말자. 역할을 하지말고, 생각하지말고, 보자. 왜 비트겐슈타인은 모이기에 너무 빈약하고, 또 과잉된 이야기를 할까? 자신의 이야기를 지반삼으려는 유혹에 저항하기 위해서, 라고 나는 생각해. 눈 앞에 있는 것을 보는게 어렵기 때문에,
"왜 빈약하면서 동시에 과잉된 이야기를 하는가"가 어떻게 "지반을 삼으려는 유혹에 저항하기 위해" 로 가는지 의문임. 내가 보기엔 그저 엉켜 있는 실을 풀기 위해 똑같이 엉킨듯이 명료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런 거 같거든.
비트겐슈타인이 바란 것은 90%는 겨우 명료성으로 인한 사고방식의 변화 뿐이겠지만, 그게 우리 삶의 방식의 변화가 될 수도 있음. Genova가 a way of seeing이라는 책을 썼는데, 난 이걸 구글 도서로밖에 볼 수 없었지만 서문의 내용만으로도 꽤 좋은 내용을 담고 있었음. 언어의 명료성이 아니라 삶의 명료성이 더 중요한 학자일 거임
신앙이 하잘것없고 상식적이라면, 사람들은 그걸 전유하거나 쌓으려고 하지 않겠지. 왜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에서 네스트로이를 인용할까, 왜 힐베르트의 천국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까, 비트겐슈타인이 메시아가 되려고했다면, 비트겐슈타인이 강단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고 봐.
로티나 브랜덤같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사상운동적 분기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우스워보인다는건 알아줬으면 함. 나는 너의 의문표현이 내 입장에 대한 이해부족이 아니라, 입장차이에 대한 완곡한 반대의사로 이해하려고 함. 이게 내가 토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고, 더이상 답글 달지 않음. 강단이 필요하면 강단으로 갈 일이니까,
어... 121.176이랑 같은 사람임? 근데 브랜덤이랑 맥도웰이랑 거의 같은 의견 가지고 있지 않음? 추리해봐서 맥도웰을 진짜 선호하는데 브랜덤에 대해선 별 관심을 안가지는 게 나한테는 정말 이상하게 보이거든. 퐁티 좋아하는 사람이 하이데거의 프로젝트에 조소를 남기는 느낌임
미안하지만, 그때 그 의문표현은 정말로 의문표현이었음. 둘은 전혀 맞지 않는 거 같아서. 거기에는 분명 중간 고리들이 필요했고, 일목요연한 서술이 필요했음. 확실히 철학의 태초, 제논이란 논리의 태초부터 잔혹한 분쟁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어.
같은사람 맞음. 그래도 질문을 남기니 답변하도록 할께. 마음과 세계까지는 맥도웰을 데이비슨의 유사 판본 정도로 생각했지만, 사적언어에 대한 맥도웰의 해석과 수정된 입장에서 맥도웰은 neo-hegelian보다는 revised kantian에 더 가깝다고 이해하게 되었음. 형이상학적이고 비일관적인 면이 드러났기 때문임.
처음에는 맥도웰의 논제들을 내 입장을 변호하는 논거들로 사용하고자 했지만, 애초에 철학적 논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근거로 제시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맥도웰의 논거들도 포기함. 하지만 맥도웰의 문제의식과 탐구과정을 존중하고 선호하는건 사실이야. 여하튼, 나는 철학적 논쟁이 이때 이후로 태도를 정당화하려는 헛짓거리로 보이기때문에, comrade를 찾고싶지않아.
말이 길어졌네. 아무튼 맥도웰은 데닛이나 로티, 브랜덤보다 훨씬 내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보면 다르게 보일거라고 생각함. 시간을 쓰라고 권유하고싶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