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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 같은데, 고등학교 자퇴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나도 배우는 것도 짜증나고, 여러가지 적응 안되서 자퇴 고민 했었는데, 짜증나는 학교는 그 고민할 시간 조차 안준다. 야자까지 하루 14시간 달달 볶아대고 스트레스에 녹초 되서 오는 데, 언제 진지하게 고민하는가. 악순환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학자나 작가 따위 문인을 동경해서 정규교육 과정은 수료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진로가 학계나 문단으로 빠질지 모르니까. 아는 문인 중에 이렇게 학교 부적응한 케이스가 있었으면 결정에 영향 끼쳤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나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시간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가슴 깊숙한 곳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인 것이다.'
황석영이 자퇴 후에 19살 때 데뷔작에서 썼던 문구이다. 자퇴하고 무엇을 하려고 했던건지. 세상물정 어두운 나에게는 예외라는 게 두려움이였다. 부적응이란 건 실존적 고민을 감수하는 것이다. 실존에 대한 정의에 대한 함의가 어떤 사람에게는 본질을 도외시 하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세계에서 근본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탐구함은 철학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실존적 고민이 없이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는가? 회의적이다.
소설작품은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실존적 통찰이 없으면 그 세계관에 영혼이 빠져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세계관은 세계와 개인의 조화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지시하는 기능도 한다. 인간은 아는 동물이 아니라 실천하는 동물이다. 확실히 몰라도 가능성을 포착하여 실천한다. 미래 아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예언의 영역이다. 과학은 실험으로 검증하기 전까지 가설일 뿐이다. 실험은 과거에 속한다. 수학적 논리로 연역을 통해 자명한 사실도 있지만 그것도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은 의미를 지시하고 실천적 동인을 자극한다. 세계관을 알맹이 있게 만들려면 실존적 통찰이 필요한데, 실존적 고민은 사회에 부적응할 때 발현 된다. 사회에 부적응 안하고 실존적 고민이 가능한가? 그런것은 인위적으로 학습된 전통이나 관습 공동체여론에 타성적으로 뒤쫒기만 할 뿐이다. 실존적 고민은 남들이 전부 지록위마 처럼 예하고 긍정할 때 혼자 부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인위적인 양심이나 법이든 다 부정해버린다. 그래서 서양 근대소설 창시자 세르반테스도 투옥생활을 거친덕에 명작이 탄생한건지도 모른다.
좋네요
황석영, 이문열 등은 고등학교 자퇴하고 한동안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대성할 수 있었음. 방황의 시절에도 끊임없이 읽고 쓰고 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도 치열하였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재주가 있었던 것 역시 팩트임. 아무나 학교 때려 치우고도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