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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었다.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잘 쓴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길래 읽었던 것인데, 과연 하루키의 에세이는 소문대로 재밌었다. 하지만 오늘 마침내 노르웨이의 숲을 다 읽자 결코 그의 소설은 에세이에 밀리지 않음을 느꼈다. 노르웨이의 숲은 바래고 헤진 추억 속의 책 한 페이지를 잘라내 읽는 듯한 재미로 넘쳤었다.


 왜 그런 감상을 품게 되었냐면,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같은 대학생의 신분이고, 어렸을 때 노르웨이의 숲 같은 책을 읽었던 것도 아닌데 이 책은 나에게 마치 세피아 필터를 씌운 것과 같은 아련함을 주었다. 이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아련함을 제일 크게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기즈키라는 인물이 죽음으로서 시작한다. 기즈키의 소꿉친구이자 여자친구인 나오코와, 둘의 친구인 와타나베는 이 기즈키라는 인물이 자살함에 따라 크게 삶이 뒤틀린다. 와타나베는 그 뒤틀림을 그는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라 늘 곁에 있음을 알려주었다라고 표현했다. 아마 작가가 말하는 일반적인 삶이란 죽음을 삶의 대극이라 여기는 자세이리라. 그러나 너무나 친밀한 인물이었던 기즈키가 죽어버림으로써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기즈키를 떠올릴 때마다 찾아오는 아련함과 함께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을 못하게 되어버렸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과거에 얽매여 있는 인물들이 많다. 나오코는 기즈키 뿐만 아니라 언니의 자살을 경험했고, 와타나베의 친구 미도리 역시 어렸을 때부터 받은 부모의 무관심과 수많은 병수발과 장례식의 기억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오코와 같이 요양시설에 있었던 레이코 씨는 말할 것도 없다. 각자 여러 방법으로 과거에 의한 상처를 안고 현재를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살고 있었다. 바로 그런 점이 나에게 아련함을 느끼게 했다. 누구나 과거를 떠올리면 아련해지는 법이고, 아무리 아픈 기억이나 슬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아련함으로 희석된다.


 다만 나가사와라는 인물만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그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미래를 사는 인물이었다. 그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과거와 현재는 간단히 버릴 수 있었고 가벼이 취급할 수 있었다. 자칫 과거로만 침잠하여 우울 일색이 될 뻔한 글을 그의 존재로 중화시킨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도 결국에는 전 여자친구 하쓰미의 자살을 나중에 듣게 되면서 상실감을 느끼고 만다. 이는 작가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과거에 미련이 없고, 그 아련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언젠가는 그것을 맛볼 일이 생길 거라고. 우리 인간은 결코 과거와 떼어놓을 수 없는 거라고. 그는 와타나베의 상실의 방관자이자 협력자였지만, 결국은 그도 상실자가 되어버렸다.


 명저들은 언제 읽어도 유익하고 인생에 색을 더해주지만, 나는 책이란 각자 가장 읽기 좋고 재밌을 시기가 있다고 믿는다. 노르웨이의 숲은 현대의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들이 읽기 가장 좋은 책이다. 20살이란 새로운 시작이자 많은 것들을 상실하는 시기다. 더 이상 아이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리고 새 환경이 찾아옴에 따라 과거의 환경은 없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물론 새 환경이 전보다 더 좋고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 책은 그런 두려움과 그 두려움에 대한 반동으로 찾아오는 과거에 대한 회상을 아주 잘 표현했다 생각한다. 이 책의 다른 제목이 상실의 시대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