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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수업시간에 문학 작품을 읽을 때면 늘 나오는 문제가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때의 습관이 몸에 밴 건지, 성인이 된 지금도 책을 읽을 때면 종종 이 책은 어떤 주제를 갖고 있고,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곱씹는다.
독서에서 반드시 실용적인 무언가를 얻어가겠다는 것은 불순한 태도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오래된 습관은 자꾸만 나를 닦달하고,
그 덕분인지 나는 독서 그 자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갈피를 잡은 것 같다.
처절한 생존기, 차별에 대한 저항, 가슴 아픈 사랑 이런 모든 서사의 바탕에는 세상과 인간 자체에 대한 작가의 관찰이 있다.
어떤 장르고 어떤 주제며 어떤 결말이든 모든 것은 작가가 관찰한 인간의 이야기를 작가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서를 하는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듣게 되고,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 또한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충실한 대답을 들려준다.
노인과 바다는 인간을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나는 대자연 속 구성원 중 하나로서의 인간, 다른 하나는 개척하는 존재로서 역경을 딛고 헤쳐나가는 인간
자연의 구성원으로 보는 시각은 소설 곳곳 산티아고의 대사에서 엿볼 수 있다. 바다를 남성형이 아닌 (어머니를 의식한)여성형으로 부르고, 자신과 씨름하는 청새치를 형제라고 칭하고 친밀감을 갖거나, 몸집이 작은 제비갈매기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자신의 배 주변을 스치는 여타 어류와 조류들에 친밀감을 갖는 대사들을 볼 때, 산티아고는 고기를 낚는 자신의 위치를 다른 생물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다만 각자의 처절한 생존을 다툴 뿐인 한 어머니(자연)의 자식들 중 하나로 여긴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인간의 오만한 자의식을 경고한 작품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노인과 바다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자연의 구성원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곳곳의 비유에서 나타나듯이, 산티아고는 예수를 투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먼바다로 떠나 3일 만에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청새치를 낚아 마을로 돌아온 산티아고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한 부활의 화신이자 인간의 가능성의 지평을 새롭게 연 선구자로 비춰질 것이다.
하지만 이 예수는 인간을 이끌지언정, 인간을 구원하는 예수는 아니다.
산티아고가 종교 지도자와 거리를 두는 점은 자신은 죄를 모른다고 고백하는 데 있다.
기껏 잡아 올린 청새치를 상어에게 빼앗기게 생겼을 때, 산티아고는 희망을 버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며 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고기를 잡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고기를 잡고, 상어를 죽이며 기쁨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내린 결론은, 자기는 죄를 모르며 세상은 원래 생존을 위해 죽고 죽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개척자로서의 인간은 대자연 속의 인간과 만나게 되며, 그 둘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공존하게 된다.
인간이 자연의 하나임을 인정하는 것이 자연에서 오는 모든 부조리에 순응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원죄도 없고 구원도 없는, 오로지 생존만이 알파이자 오메가인 비인간적인 세상일지라도, 그 속에서 버티고 저항하며 생명력을 불태우는 것이 헤밍웨이가 생각하는 인간의 참모습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존엄한 대사가 상어에게 고기를 다 빼앗길 판국에 나온 것이 이해가 된다.
헤밍웨이가 생각하는 패배하지 않는 인간이란 어느 때고 승리해 수확을 거둬내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거대한 부조리 속에서 어느 때는 승리하고 어느 때는 파멸할지라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는 과정이 매우 활력적으로 느껴졌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의 스토리를 어부인 친구의 이야기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어부가 들려준 이야기란 수십여 일간 물고기를 낚지 못하고 허탕만 치던 어느 날 대어를 여섯 마리나 건지고 항구로 돌아가는 길에 상어에게 고기를 모두 빼앗겼다는 것인데, 얼핏 들으면 고진감래가 없는 자연의 무심함을 느낄 위 해프닝에서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읽어낸 헤밍웨이는, 인간 예찬을 떠올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어부에게 투영한 것 같다.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한 후 10여 년째 이렇다 할 걸작을 배출하지 못한 초로의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며 수십여 일째 고기를 낚아 올리지 못한 어부에게 자기 자신을 비춰보았을 것이다.
청새치와 씨름하며 왕년에 팔씨름 시합에서 우승한 기억을 떠올리거나, ‘그 소년이 옆에 있었더라면’ 하고 읊조리며 젊은 활력을 그리워하는 어부의 모습은,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창작의 고통에 빠진 헤밍웨이를 생각하면 조금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소설이 출간된 당시에는 청년도 아닌 노인 혼자서 5미터가 넘는 청새치를 건져올리는 것은 사실성이 떨어져 아쉽다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성은 소설의 완성도와 독자의 집중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요소다.
그러나 산티아고가 청새치와 씨름할 때, 고독한 바다 위의 싸움을 끝내고 육지로 돌아가 부활한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파멸할지언정 패배하고 싶지는 않아 사력을 다해 청새치와 씨름한 어부가 한 명 더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약간의 빈약한 사실성은 눈감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문학적인 소양이 딱히 깊지 못해서 ㅎㅎㅎ
독붕이들이 보기엔 미흡하고 어설픈 점이 많을 거임
책을 읽고 다른 감상이 있거나, 아니면 아니면 위에서 매끄럽지 못하게 표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주면 고맙겠다
잘 썼다 어디 꼬집을 수가 없다
와 너 해석 좋다
쿠바 어부 얘긴 30몇년도에 칼럼에 쓴거 16년동안 품고 있다 1-2주만에 쓴게 노인과바다
노인의 데이앤나잇 선술집 팔씨름 얘긴 야곱이 생각나지 ㅋㅋ
몇 분 간격으로 불어나는 댓글.. 좀 무섭긴 한데 고마워 야곱 이야기는 내가 잘 몰라서 방금찾아봤는데 씨름에서 이긴 다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 이야기 맞나? 확실히 자랑스러워할 추억 맞네 도전적인 이미지도 강하고 ㅋㅋ
무서웠음 먄해^^ 감정이입 많이된 작품이라 ㅋ
글고 네가 본 얘기 맞아 ㅎ
destroy되도 defeat을 거부하는 의지가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팬들의 맘을 울렸지.. 노벨상 아카데미회원들 맘도 ㅋㅋㅋㅋㅋㅋㅋㅋ
노인이 집착한 청새치의 매력 ㅎ
청새치 잡고싶다 ^^
노인은 청새치를 정말정말 사랑해^^ 그것만 알면 돼요^^
더 알고 싶으면 ㅋㅋ
걍 읽고 또 읽어 ㅎㅎ
내사랑 ㅋㅋ
사랑해^^
9월 최고의 감상문.
노인의 사투도 사투였지만 노인과 소년의 유대감같은 게 참 좋더라 - dc App
감상 좋다 ㅎㅎ
걍 지나가다 쓸데없는소린데. 산티아고는 낚시하다 손에 피를 흘리고 돛대를 매고 언덕을 오르다 여러번 넘어지지 근데 그게 예수의 투영은 아니야 예수는 intj 이고 헤밍웨이는 estp거든 완전 다르지않아?
찾아보니 infj 였구나 ㅎ
노인은 작가본인이야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작중에서 노인의 아내는 두 번 언급되지 초라한 방에 남겨진 조각상 유품과 꿈속의 폭풍우, 큰사건과 아내의 죽음으로 그리고 노인이 된 그는 사자꿈을 꾼다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