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분량이 많은 책들은 어쩔 수 없이
며칠, 몇달을 시간을 두고 읽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책들이 주는 새로운 사상과 감정들은
제각기 독특한 색의 파도가 되어 내 머리에 물결친다.
그러면 적어도 책을 읽는 기간 동안에는
내 마음과 생각은 책에 완전히 물들은 스펀지가 되곤 했다.
하지만 몇달이고 단 한 권의 책만을 독파하는 건
가끔 지루한 일이었다.
너무 한 권의 책에 매몰될까봐
종종 다른 책들도 병행하며 교차검증하듯 독서하는 습관이 생겼다.
최근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져서,
초서의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를 읽기 시작했다.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사랑과 배신을 다룬 기사문학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그 책은 아무리 시라고는 하나,
금방 읽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달 동안 책 속의 연인이 된 것마냥 사랑과 이별에 빠졌다.
그러던 중, 참을성 없이 트로이 전쟁의 다른 이야기들도 궁금해져서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를 병행하게 되었다.
트로이가 멸망해가는 과정을 카산드라의 시점으로 그리며
전쟁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그 속에서 평화를 찾아가는 책이었다.
카산드라의 연인, 가족, 고향을 향한 사랑이 슬픔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예언자의 광기에 사로잡힌 혼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조연에 불과했던 트로일러스였다.
초서의 장편시 속, 크리세이드라는 귀한 여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
헥토르 다음 가는 무훈을 세우던 열정적인 청년 트로일러스는
'카산드라'에게는 아킬레우스에 의해 전쟁 첫날 누이의 눈앞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가여운 17살 소년이었다.
사랑에 마음 아파 하는, 내가 아는 트로일러스는 갑자기 죽었다.
너무 놀라서 책을 덮었다.
책 두 권을 같이 읽는 동안
나는 예쁜 색의 두 물가를 오가며 놀고있는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쎄게 맞은 느낌과 함께
다시 책을 주워드니,
책이 주는 영롱한 빛깔의 파도들은 사실 맑은 물이 아니라
독한 술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술은 잘 모르지만, 나는 입에 깔대기를 물고
고량주에 보드카를 섞어서 들이붓고 있었던 것이다.
과한 알코올이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교묘하게 겹치면서
필요 이상으로 슬프고 충격적이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 저 책이 생각나고
저 책을 읽으면 이 책이 생각나고,
동명의 동일인물과 감정이 교차하면서
어떤 책에도 집중하기 어려워졌다.
카산드라가 꿈을 해석하여 미래를 예지한 것처럼
아직 살아있는 인물과 이미 죽은 인물이 시간에 맞지 않게
환상적이고 수려한 운문 이곳저곳에 나타나니
멍하게 책을 보아도 마음이 자꾸 들떴다.
참 이상한 경험이다.
책들 사이에도 이로운 조합이 있고
해로운 조합이 있음은 몰랐다.
원래 판본이 많은 이야기들은 이런 문제를 당연히 가지고 있는 걸까?
다음 책은 신중히 골라야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