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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다 읽고
<도끼의 25살 연하 아내의 수기로 알아보는 독붕이 솔로탈출법 특강> 같은 드립을 칠 생각이었는데
읽고 나니 그런 마음은 사라졌음.
<도박꾼>을 급하게 탈고해야 할 47세의 도끼 앞에 21살 속기사로 등장해,
만난 해에 결혼하고 이후 14년 간 곁을 지키며 <좌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을
집필할 수 있는 경제적, 정서적 안정을 만들어 준 여성이라는 점은
도끼를 좋아하고 관련 서적이나 석영중 교수의 책 등을 읽어본 독붕이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듯.
읽으면서 내심 기대했던 내용인
도끼의 작품 자체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나 새로운 해석의 키 등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계절이 바뀌면 도끼 스스로 안나에게 옷을 사러 가자고 요청해서
2~3일 (독붕이들아, 주목해라. 두세 시간이 아니라 2~3일이다!) 동안
쇼핑에 따라 나섰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옷을 골라주는 모습,
한 겨울, 함께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갔다 혼자 가족을 보러 간 아내가 예상보다 늦게 돌아오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아예 호텔 밖 도로 변에 나가 3시간 넘게
아내를 기다리는 모습,
본인이 주빈인 문학 강연회나 행사 자리에 아내와 동행했다가
명사들이 (유럽식으로) 아내의 손등에 키스라도 했다하면 미친 놈처럼
방방 뛰면서 아내가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발광하다
한 시간도 못되어 사과하는 패턴을 늘 반복하는 모습ㅋㅋ
아내 지참금이나 패물을 저당잡힌 돈을 도박에 탕진하기도 했지만,
가끔 여유가 생기면 심혈을 기울여 산 보석 등을 선물로 안기고
그 보석을 찬 아내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해하는 모습 등등은
자연인이자 남편으로서의 도끼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는가와 동시에
얼마나 순수하고 또 사랑이 많은 사림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이었음.
나아가 진짜 이 여자 아니었으면
도끼의 후반 대작은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음.
죽은 형의 가족, 역시 죽은 전처의 (전남편 소생의, 피 한 방울 안섞인!) 아들에
누나의 가족까지 스스로 떠맡아 생계를 책임지던 도끼.
이 븅신이 얼마나 호구였는진 당대 러시아인들도 다 알아서
도끼의 형이자 함께 출판사를 꾸려가던 미하일이 죽자
형에게 받아야 할 돈이 있다고 달려드는 빚쟁이들에게
도끼는 사실 확인도 없이 어음을 써줌.
당연히 이후론 진짜 채권자에 그보다 열 배는 많은 사기꾼들까지 달려들어
어음을 받아내 결혼 직전의 도끼는 이미 수만 루블의 빚을 진 상태였음.
이 채권자들은 물론, 가족들의 뻔뻔함이 얼마나 심했냐하면
결혼 직후, 분명 추운 겨울인데 가을 옷을 입고 있는 도끼한테 안나가 '왜 가을 옷을 입고 있냐'
라고 묻자 저 빌어먹을 아들도 아닌 아들 새끼랑 가족도 아닌 가족들이
당장 줄 돈이 없으면 겨울 외투라도 저당잡혀서 돈 내놓아라 지랄한 뒤
실제로 외투를 벗겨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호구처럼 실실 웃으며 자백함...
특히 저 아들 새끼, 파벨 도스토옙스키는 진짜 존나 악질인 게
스무살이 넘도록 계속 도끼한테 빌붙어 살면서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고
나중에 도끼가 죽자 가장 먼저 나타나
아직 온기가 식지도 않은 도끼의 시신 앞에서 슬퍼하긴 커녕
아버지의 재산에 관련된 유언을 공증해 줄 변호사를 불러 오라고 난장을 피우던 개새끼임..
이런 악조건 속에서 안나는, 본래 넉넉하고 화목한 귀족 대가족에서 자라나
타인과 큰 소리 내고 싸우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던 사람이,
채권자들을 만나 빚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협상을 해 조정을 해 나가고,
채권자와 가족 때문에 도저히 집필할 환경을 갖지 못한 남편을 위해
결혼 당시의 지참금과 패물을 처분하고 때론 출판사를 만나 담판을 지어 마련한 여행 경비로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도끼가 여유롭게 예술적 자극을 받으며 집필을 할 환경을 만들어줌.
나중엔 남편의 집필을 돕는 것을 넘어 진짜 출판사를 차려 제대로 된 수익이 도끼에게 돌아오게 했고,
두 명의 아이를 잃는 슬픔을 이겨냐고 도끼의 나머지 자녀들을 건사하고
(정부의 지원금이 아닌) 남편 작품의 수익으로 고등교육까지 시키며 키워내고,
사후에 벌어진 문인들의 남편에 대한 근거없는 혹평과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우고 반박하는 강단까지 보여줌.
위대한 인물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는 명언은,
안나 여사 이후론 '위대한 문호 뒤에는 위대한 아내가 있었다'로 바뀌어도 될 듯 함.
도끼의 인생의 사랑이자 어머니,
도끼의 결점많고 신산한 영혼을 품어 작품이란 불멸의 결실을 부화케 한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여사께 무한한 감사와 경외의 뜻을 전함.
그녀의 영혼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영면하길.
개추
나도 얼마전에 읽고 월간독갤에 투고 했는데 반려됐당 ㅎㅎ.. 문학 형식으로 리뷰 써서 쫌 그렇데. 나도 읽으면서 위대한 문호 뒤에 위대한 아내가 있다 라고 생각함. 문호를 예술가로 바꿔도 될듯. 파멜 완전 강아지같은놈 - dc App
ㅋㅋ 난 월간독갤에 정기적으로 책 선물 후원하겠다고 했다가 까였는데 ㅋㅋㅋㅋ 신춘만큼 드높은 월간독갤의 위상이여..!
아내분 잘만났네 도끼옹은 진짜 복받은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