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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자본주의 요인에 대한 세 가지 부정적인 요인들




  첫째 환경적인 요인이 있다. 자본주의 과정은 정치권력과 사회-심리적 태도를 널리 퍼트린다. (그에 상응하는 정책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 즉 자본주의 과정을 표현한다.) 그렇데 이 권력과 태도가 자본주의 과정에 적대적인 세력이 되어 힘을 키워나가다 마침내 자본주의 엔진을 꺼트려버린다.


  

  둘째 현대 대기업은 자본주의의 경직된 형태라는 이론이다.



  셋째 자본주의 엔진이 먹고 자라는 "재료"가 있다. 개인 기업과 투자의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려다보는 주된 이유는 이런 것들이다. 포화 상태, 인구, 새로운 땅, 태크놀로지의 가능성 많은 기존 투자 기회가 사적 투자보다 공적 영역에 있다는 사실 등.



  출산율의 저하는 내가 보기에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또 새로운 땅에서 가져온 식량과 원자재처럼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는 것도 없다는 점도 인정하고 들어가자.


  앞으로 가능한 장래에 우리는 식량과 원재자의 풍요에 의한 어려움 속에서 살게 될 것이고. 총 생산량의 확대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반드시 제기된다. 남아 있는 투자 기회는 개인 기업보다는 공공 기업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과정은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신념, 각종 신비하고 낭만적인 생각들을 몰아낸다.

 

  한편 전통적 기반이 사라진 의무감은 인류 복지에 대한 공리적 사상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윤의 숫자들을 다루는 회사 사무실에서 전투를 위한 전투, 혹은 승리를 위한 승리라는 영광스러운 이데올로기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산업과 상업의 부르주아지는 강도와 세금 징수원을 끌어들이기 십상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합리적" 공리주의를 숭상하는 자신들의 사상과 배치되는 전사 문화를 싫어한다.


  물론 비 자본주의적 환경에서도 옹호되었기는 하지만 현대적 평화주의와 현대적 국제 도덕성은 자본주의 산물이다.


  이보다 훨씬 심호한 문제가 있다. 그들의 선택적 자유를 파괴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택의 심리 상태를 교모하게 조성하여 가능성의 리스트를 좁혀 놓은 다음 그중에서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산 방법이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여 더 이상 개선 여지가 없는 그런 가능성을 일단 상상해보기로 하자


  초창기에 있었던 상업적 모험의 로맨스는 신속히 사라져간다. 과거에 천재의 섬광 속에서만 구상되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철저하게 사전에 계산될 수 있다.

  

  대체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의 과거에는 장군이 곧 리더쉽의 대명사였고. 군사적 성공은 곧 장군 자신의 개인적 성공이었다. 따라서 그 장군은 사회적 위신이라는 이윤을 올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 합리화되고 전문화된 사무실의 직업이 개성 계측 가능한 결과 "비전" 따위를 몰아냈다.


  지도자는 더 이상 전쟁터에 직접 나설 기회가 없다. 그는 사무실 작업자가 되었다. 그런 작업자는 한시라도 대체가 가능하다.


  기업가의 역활은 중세 영주의 그것보다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개인의 힘과 성공에 대한 책임 의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개인적 리더쉽의 또 다른 형태이다. 기업가의 지위는 전사 계급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지능의 사회적 과정 내에서 중요성을 잃게 된 순간 위협을 받게 된다.


  기업가들은 그 자체로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정, 인척들을 흡수하여 계급을 활성화시키고, 동시에 "비즈니스" 에 대한 적극적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가문들은 한두 세대 후에 그 계급에서 탈락된다.


  기업가와 부르주아 사이에는 산업가,상인,금융가,은행가 등의 사람이 있다. 이들은 기업가적 사업과 물려받은 가업을 일상적으로 관리하는 부르주아 사이에서 중간적 단계에 있다.


  봉건 문명에도 과도기가 실제로 있었듯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과도기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단계는 그들이 살 수도 또 죽을 수도 없는 관계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만약 자본주의 진화 (발전)가 중지되거나 자동화된다면, 산업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기반은 현행 관리직에게 지불되는 임금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단 일부 예외로서 유사 임대료나 독점적 소득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기업 정신은 그 성취로 인해 발전을 자동화시키는 경향이 있음으로. 그 기업 정신은 그 자신을 불필요한 존제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의 성공이 가져오는 압력으로 인해 스스로 산산조각나버린다.


  완전 관료화된 거대 산업 재벌을 중소기업을 몰아내고 그 소유주들을 "수탈" 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기업가들을 추방하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수탈한다.




  B. 지지 계층의 파괴.




  파괴는 세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장인들의 세계는 주로 경쟁의 자동적 효과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그 경쟁은 자본주의 기업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영주와 농민들의 세계는 주로 정치적ㅡ어떤 경우에는 혁명적ㅡ조치에 의해 파괴되었고, 자본주의는 적응적 변신을 도와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에 경제 조직이 사라지면서, 그 조직에서 주도적 역활을 했던 계급 혹은 집단의 경제적 정치적 특권도 함께 사라졌다. 특히 지주 귀족, 지역 상류층, 사제 계급의 면세 혜택과 정치적 특권이 철폐되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것은 부르주아지를 괴롭히던 많은 족쇠와 장애를 파괴하고 제거해주었다.


  그 새로운 질서 내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합리적 정신과 즉각적 이해관계에 더욱 부응하는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군주제의 철골 구조는 여전히 봉건 사회의 인적 재료로 이루어져 있고. 이 재료는 여전히 자본주의 이전의 행동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인적 재료)는 정부의 사무실, 군대의 장교직, 정책 입안가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지휘하는 계급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돌봐주면서도 부르주아지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것만이 그 사회의 본질일까? 영국의 사례가 대표적으로 예정하는 사태 발전은 그 대답이 된다. 귀족 계급은 온전하고 활기 넘치는 자본주의 시대가 끝나는 바로 그때까지 계속 통치했다.  물론 그 계급은 현재 다른 계층에서 두뇌를 가져온다.(이것은 그 어떤 나라보다 영국이 가장 잘했다.) 그 계급은 부르주아 이해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 부르주아지와 경쟁했다.


  부르주아지 계층의 경제 담당 부문은 이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를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부르주아지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실패한 것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경험 부족보다는 정치적 통치 계급의 태도 때문인가?


  그 이유는 산업과 혹은 상인의 숫자를 중세 영주의 숫자와 대조해보면 더욱 잘 드러난다.


  중세 영주의 "직분" 은 자신의 계급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직접 몸 바쳐서 싸웠다. 그런 직분은 영주의 머리 주위에 후광을 안겨주었고. 통치자로 만들었다. 


  계급 이익도 중요했지만, 신비한 광채와 영주다운 태도가 더욱 중요했다.


  산업가와 상인들에 대해서는 정반대가 진실이다. 그들에게는 통치 계급에게 너무도 중요한 신비한 광휘의 흔적이 없다.

  

  나는 부르주아 계급이 합리적이고 반反영웅적이라고 말했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국가를 자신의 의지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합리적이 반영웅적인 수단에만 의존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고. 돈을 내놓겠다고 약속하거나 내놓지 않겠다고 위협할 수 있으며, 배신을 잘 하는 용병 부대 혹은 정치가 언론인을 돈 주고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 정치적 가치는 과대평가되어 있다. 그의 체험이나 생활 습관은 개인적 매력을 불러일으킬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물론 독자들에게는 예외 상황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현대적 대도시(이것은 더 이상 부르주아의 일이 아니다.)가 생겨나기 전에, 도시의 경영은 기업의 경영과 유사했다. 


  이런 좋은 여건 아래에서 가령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이 예외적으로 발전했다. (저지대)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상인 공화국은 국제 정치의 커다란 게임 에서 예외 없이 실패했고, 비상사태에 직면해서는 중세적 외양의 군벌들에게 지배권을 넘겨줘야 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결론은 명백하다. 예외적인 조건들을 제외하면 부르주아 계급은 통상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대처해야 하는 국내외 문제들에 대해 대처 능력이 미흡하다. 


  이것을 부정하는듯한 온갖 수사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자신들도 이것을 느끼고 있으며 대중들 또한 느낀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신의 은총을 이라는 왕정을 제거했고. 만약 유지가 되었더라면 마을이나 직인 조합에 형성되었을법한 정치적 보호막마저도 제거했다.


  자본주의 정책들은 필요 이상으로 그것들을 파괴했다. 장인들의 보호 지역에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무한정 존속했을법한 장인들을 파괴했다. 농민들에게는 초창기 자유주의의 축복을 강매했다. 자유롭지만 보호되지 않은 토지 소유권을 주었으며, 목매달아 죽기에 딱 좋은 개인주의의 밧줄도 함깨 주었다.


  자본주의는 발전의 장애를 제거하는 한편 그 자신의 붕괴를 막아주는 보호벽도 함께 날려버렸다.


  무자비한 필요성의 측면에서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제도적 고사목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계층의 협력자를 제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 협력자와의 공생이 자본주의 구도에서 아주 핵심적인 요소인데도 말이다.


  자본주의 과정은 봉건 사회의 제도적 틀을 파괴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자신의 제도적 틀을 파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들이 사라지면 한 나라의 정치구조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중소기업의 소유주 겸 관리자들은 그들의 식솔, 심복, 관련 인사들과 함께 투표소에서 수량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 이들은 대기업 경영진이 결코 갖지 못한 영향력을 공장의 반장 계급들에게 행사한다. 


  가장 활기 넘치고,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의미 있는 유형들의 사람들이 도덕적 시야에서 사라지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는 사유 재산과 자유 계약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자본주의 과정은 공장의 담장과 기계류를 단순한 주식 뭉치로 대체함으로써, 사유 재산의 개념에서 생명력을 빼앗아버렸다.


  실제로 자신의 사회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많은 사업가들이 순진함과 놀라움의 어조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 자본주의 질서가 초 자본주의적 권력 혹은 초 합리적 충성심에 의하여 보호받아야 하는가? 왜 화려하게 깃발을 날리며 그런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는 내놓을만한 공리주의적 자격을 많이 갖추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에 대하여 완벽한 존립 옹호론이 나올 만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산업가들은 이런 점을 지적하고 나설 것이다.

 

  합리적 노동자라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 모든 것을 살펴볼 때 그 노동자는 그리 형편이 나쁜 게 아니며, 이런 계약 흥정의 장점은 어느 한 편에게만 일반적으로 유리한 것도 아니다.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첫쨰 



  합리적 논증으로는 정치적 비판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다.


  반박이 공격의 합리적 외피를 파괴할지는 몰라도, 그 뒤에 숨은 초합리적 추진력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자본주의 합리성은 합리적이지 못한 충돌들이나 합리성을 초월하는 충동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신성한 혹은 절반쯤 신성한 전통이 부과하는 제약을 없애버림으로써 그런 충돌들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든다.



   둘째 



  자본주의의 경제적 성과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합리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도덕적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성과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있어야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옹호론은 장기적인 고려 사항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늘날의 실업자는 그의 개인적 운명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할 것이고. 오늘날의 정치가는 그의 개인적 야먕을 내던져야 할 것이다.


  일반 대중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단기적인 견해이다. 루이 15세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내가 죽은 다음에도 대홍수가 발생해도 알 게 뭐야." 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런 개인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느끼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다.



  셋째



  적대적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회 질서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구조상 이러한 애착을 안겨주는 게 불가능한 제도이다.


  당연시되는 생활의 개선과 강하게 느껴지는 개인적 불안전성의 결합은 사회적 불안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배경이다.



  

  C. 지식인들의 사회학




  이런 적개심의 분위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부추기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일반 대중은 자발적으로 어떤 확정적인 의견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때그때 나타나는 집단 리더십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것 뿐이다.


  무쇠 공작 웰링턴 경의 정의를 따른다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실제로 말과 글의 위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지식인들)이 실제적인 업무에 대하여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지식인들이 구경꾼 또는 국외자라는 것이다. 그들의 비판적 태도는 구경꾼 국외자라는 입장에서 나오고 자기주장을 적극 펼 수 있는 주된 기회는 실제적 혹은 가상적 훼방꾼 역활에서 나온다. 4,5세기의 소피스트,철학자,수사학자, 는 모두 한통속이다.


  동시에 유럽 국가들에는 자본주의 발전이 침체했으며 더 값싸진 책, 값산 신문과 탬플릿, 대중 독서층의 확충 등으로 인해 그런 지식인의 활동이 커진 것이다. 즉, 지식인을 집단적으로 지원해주는 부르주아 대중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볼테르나 루소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860년이나 1827년 이 시기 동안 거의 모든 유럽 정부들이 지식인들을 굴북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루이 필리프 1773-1850같이 순수 부르주아 정치 체계에서는 지식인을 검거할 수 없었고. 검거하더라도 곧 풀어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르주아 계층이 그들 편을 들고 나섰다. (속으로는 지식인들의 소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우에도 이렇게 했다.)


  부르주아 계층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자유를 깨트리면 그들이 좋게 생각하는 자유 또한 깨트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질서는 지식인 부문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의욕이나 능력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본주의 과정에 의해 형성된 제도의 틀 내에서 능력 없음은 다른 방법(비 부르주아적 방법)말고는 지식인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공개적 논의의 자유는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을 갉아먹는 자유가 된다.


  또한 지식인 집단은 계속 갉아먹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판으로 먹고살고 그들의 지위는 남에게 고통을 주는 비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성스럽게 봐주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과 시사에 대한 비판은 곧 자본주의 계급과 제도에 대한 비판이 된다.


  이제 붓질만 더하면 현대의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대중의 수입이 증가하면서,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여가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지식인들이 비위를 맞추고 봉사해야 하는 집단 후원자의 구성을 바꾸어 놓았고, 또 현재도 바꾸고 있다. 책,신문, 대규모 신문사의 가격이 점점 싸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라디오까지 있다. 제약의 완전 제거 쪽으로 흐름이 진행되고 있고. 단기적인 저항 시도를 꾸준히 무력화시키고 있다.


  특히 고등 교육의 장치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고등 교육이 이처럼 전문직 혹은 준 전문직 서비스를 계속 공급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첫째 결국에는 모든 "화이트칼라" 인력이 비용-이윤 고려 사항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증대될 것이다. 이 부문의 실업이라는 중대한 사례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 그런 실업과 함깨 고용의 불만족스러운 조건들이 형성된다. 이 경우 수준 이하의 일을 하거나, 높은 봉급을 받는 육체노동자에 비하여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해야 한다.



  셋째 아주 난처한 유형의 실업을 만들어낸다. 대학을 졸업한 자는 반드시 전문직에 고용되는 것도 아니면서 육체노동은 못한다는 정신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지식인 집단은 자신의 비판을 사회 비판이라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계급,제도 (특히 합리적이고 공리적인 문명의)에 대한 전형적인 구경꾼 지식인의 태도인 것이다.


  이는 단지 지식인들의 소행 탓만이 아니라, 독립된 원천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원천 중 일부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이 둘 사이에는 주고 받기의 관계가 성립되는데, 그것을 파헤치자면 너무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지식인 집단의 임무는 이 원재료를 자극,격려, 표명,활성화하는 것이고 그들은 2차적으로만 그 재료에 뭔가를 덧붙일 뿐이다.


  노동계는 지식인의 리더쉽을 동경한 적이 없지만 지식인들은 노동 정치학에 침투하여 중요한 기여를 했다. 


  노동자를 붙잡기 위하여 지식인들은 비지식인 지도자들이 볼 때 전혀 불필요한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진정한 권위가 없는데다 당신 일이나 신경 쓰라는 노골적인 비난을 받을 위험이 늘 있음으로, 좌익과 인상쓰는 소수파들에게 늘 아첨하고, 약속하고, 격려하고, 두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 자신이 언제나 대중에게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지식인들이 노동 운동을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운동을 상당히 육성했다.


  개인 정치가가 정당이 어떤 계급의 옹호자라 말할 때, 우리는 기껏해야 진실의 절반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변하는' 이해관계의 요소들이 지식인 계급에 의해 통제된다. 어떤 이해관계의 대의는 높이 들어올리고, 또 어떤 이해관계의 대의는 묵묵히 퇴출시켜버리는 한 한 시대의 도덕적 코드를 지식인이 통제하는 것이다. (가치판단)


  관료제는 유사한 교육 환경을 통하여 지식인 그룹과 많은 사항을 공유하고 있고. 과거에 장벽 노릇을 해왔던 상류 계급 의식은 지난 몇십 년 동안 현대 공무원 사회에서 희석되어 왔다. 더욱이 공공 행정의 영역이 급격히 확대되는 시기에는 필요한 추가 인원들을 상당수 지식인 집단에서 직접 채용할 수 밖에 없었다.



  D.문화적 자본주의의 해체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예전의 패턴에서 본질적이었던 내용을 많은 부부가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향은 모든 계급으로 확산되고 있고. 지식인 계층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이것은 생활 속의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는 경향 탓으로 돌릴 수 있는데 이런 합리화는 자본주의 진화가 가져온 효과들 중 하나이다.


  남녀가 공리적 교훈을 배우고 사회 환경이 만들어준 전통적 제도를 거부하는 순간 그리고 그들이 어떤 행동 노선의 개별적 장단점을 따져보는 습관을 갖는 순간ㅡ혹은 개인 생활의 비용 계산이라는 은밀한 방식을 도입하는 순간ㅡ그들은 부모 역활이 부과하는 과중한 개인적 희생을 의식하게 된다. 또한 기업형 농민과 소농들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어린아이는 경제적 자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외에 안락함의 상실,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상실, 점점 매력적이고 다양해지는 대체 기회들의 상실 등을 포함한다. 이런 대체 기회들은 부모 역활의 즐거움과 비교하면서 점점 더 늘어나는 부담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된다.


  현대인들의 합리적인 탐조등은 개인 생활이든 공적 생활이든 즉시 효용을 가져다주는 측정 가능한 세부 사항에만 집중할 뿐, 인간성이나 사회적 유기체에는 어떤 감추어진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즉시 비웃어버린다.

  그것은 많은 예비 부모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우리 야망을 죽이고, 우리의 생활을 가난하게 만들고서, 왜 나중에 나이 들어 아이들로부터 모욕과 멸시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 과정의 전형적 결과들이고, 결혼에 반대하는 이유를 크게 강화시킨다.


  우리는 전혀 다른 경제적 인간을 우리 앞에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개인주의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옛날 타입의 행동은 아주 불합리한 것이다. 


  그는 비非낭먼적이고 비非영웅적인 자본주의 문명에 남아 있던 자본주의 문명에 남아있던 유일한 종류의 로맨스와 영웅심을 잃어버렸다. 


  과거에 그 윤리는 자기 자신이 어떤 수익을 거두어들일 것인지 따지지 말고, 장래를 위해서 일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이것은 파괴라는 용어보다는 변모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개인감상/ 도발적인 책이고. 1984년에 쓴 책이라 놀랐고. 그 시기부터 예견되던 문제를 정치인들과 관료들 기업인들이 겨우겨우 꿰메서 지금까지 버텨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출산에 대한 표현은 정곡을 찔리는 듯하다. 사회주의 승리 혹은 우세 예측을 빼면 큰 그림에서는 이 사람 말대로 흘러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