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는 이유.


그것은 정신적인 고양, 지적인 허영, 자유로운 표현, 간결한 언어 방식, 다양한 어휘력, 브레인스토밍과 유사한 지식 수집, 구체적인 역지사지 수단, 시대적 흐름 읽기, 학교에서 숙제로 독후감을 내야 하기 때문에, 재미를 위해,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시선을 의식해서, 윤리 의식, 직업적인 성공, 특출난 말재간 등, 여기까지 나열한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다. 나열한 것들 각자를 위한 것이라면 더 효율적인 전략이나 수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것들을 얻고 싶어본 적이 없어서 정말 이 수단이 비합리적인 것인지, 비합리적인 것이라면 무엇이 가장 군더더기 없는 방식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하면서 궁금한 녀석들을 위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 그것은 현실이 너무 피폐한 전쟁터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어떻게 죽여야 잔인한지 궁리하고 있고, 어떻게든 이득을 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어서다.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이 행복이라는 것은 정말 웃긴 게,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선 다른 사람들의 자잘한 불행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형 마트에서 90% 할인 행사를 해서 너도 나도 샴푸, 휴지, 막 이런 것들을 구매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손님들 입장에선 행복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대형마트는 곧 파산하고, 그곳의 사장은 거리에 나앉아 불행을 맞이한다. 

자, 다른 상황. 

방금 개념글에서 피카소 글을 읽고 왔으니 그런 비유를 적어보자면, 피카소는 어려서부터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미술계에서 입지 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의 어렸을 적 시점으로 회귀하여 유명한 작가가 되어 성공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행복은 정말 누군가의 불행을 포함하지 않는 건가 의문이 든다. 내 말은 아마도 포함할 거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분명 그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알릴 기회를 놓쳤을 것이고, 그 때문에 가려져 빛을 받을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마치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서 채광에 불만을 가진 어느 입주민처럼. 

 다른 예시가 있다. 기부나 이런 것으로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이타적인 봉사 활동. 

혹자는 그런 것으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기부나 이런 봉사활동이 행복을 준다고.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파렴치한에 반사회적 기질이 다분한 인간이라 잘 모르겠다. 그런 것에 행복을 느끼는 인간이 되고 싶기도 하다. 그것은 타인의 불행을 수반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라 이런 비관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에 대해선 그다지 반박 거리를 찾을 수 없다. 애초에 거기에 행복을 느낀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 굳이 억까하자면, 그런 기부를 한다고 했을 때 기부받은 마을의 옆 마을 중 어딘가는 기부를 받지 못했을 거다. 그러면 그 마을의 주민들은 상대적인 불행을 느낄 수 있다. 혹은 기부받은 마을 사람들 중 나와 같은 인간이 섞여 있다면 이런 주장이 한 번쯤 튀어나올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윤택한 삶을, 뛰어난 삶을 살고 있길래 우리를 도와줬을까? 그들이 얼마나 잘났다고. 아니, 그들과 나의 인생의 출발점이 왜 이리 다른 거지? 똑같은 정자 경쟁에서 우승했는데 누구는 한화에서 출발하고 누구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들어갔네?


그래서 소설을 읽는 이유가 정확히 뭐냐? 라고 여전히 물어보고 싶은, 본문의 흐름을 정확히 따라가고선 나의 가스라이팅에 휘둘리지 않는 명석한 인간들이 있을 것이기에 다시 흐름을 확실히 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이유가 뭐냐면, 이제부터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위의 쓰레기 같은 문단을 왜 읽었는지 모르겠다며 돌멩이를 던지는 부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꽤 긴장되지만 묵묵히 적어보자면(이 또한 아이러니한 경우다. 나는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이곳에 글을 게시하는데 네 녀석들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왜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이 암흑으로 도배된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일하게 보장된 빛을 가진 장소가 어느 한 인간이 창조한 소설 속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은 완벽한 세상, 서로가 헐뜯지 않는 세상, 행복이 불행을 수반하지 않는 세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모든 소설이 탱탱한 피부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쓰레기 같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지 같은 세상의 어느 단면보다는 떼깔 좋고 자유롭고, 적법한 논리를 가지고 있을 것임에 확신한다. 하다 못해 82년생 김지영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런 애미 없는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이런 논리를 계속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애초에 그런 여성 중심적인 소설을 쓴 것이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성별이 겪는 고충을 상상으로 만들어내어 자신이 이 세계의 피해자라는 것을 여럿에게 공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연극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와 동일한 원리로 그런 개조된 상황을 옆에서 간접적으로 지켜봄으로써 정신적으로 고무되어, 현실에서 손상받은 멘탈을 케어받는다는 것이다. 비록 남자는 그러지 못하겠지만. 아니 씨부럴 내가 왜 이런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었지? 갑자기 문맥을 잃어버렸다. 미안하지만 내가 무슨 전문적인 글을 쓰려 이곳에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 기법을 어느 정도 용인해주길 바란다. 어느 정도라 함은 끔찍한 갑질하더라도 참아달라는 것이다. 사실 글만큼 갑질하기 좋은 수단도 없다. 아무튼 더이상 질질 끌지 않겠다. 더 그러면, 그래서 소설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라고 물어보고 싶은 인간들이 아무래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댓글에 욕설을 써놓고 도망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전에 소설을 읽는 이유를 발설한 것만 같다. 왠지 조현병에 걸린 것도 같다. 뭐 그렇게 나쁜 경우는 아닐 것이다. 내가 조현병에 걸렸다는 것이 아니라, 아까 전에 이유를 발설한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엔 글을 대충 읽어보고 마지막 문장만 읽고 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문의 요지를 숨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반박시 니말이 무조건 틀리고 내 말도 무조건 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