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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이하 지생수)를 읽고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주인공 존나 패고싶다'



왜 패고싶은걸까? 지금부터 지생수 주인공을 존나 패고싶은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1부, 1부에서 지껄이는 장광설을 이해하면 2부에서 주인공이 헛짓거리하고 자빠진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할 순 있다.



인간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자연적 법칙을 따르는 인간과 자연적 법칙을 거스르는 인간.



자연적 법칙을 따르는 인간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장벽을 만나면 주저앉고 포기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안티테제들은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다 해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인식은 하고있다. 결국 자연법칙을 이해할 순 없지만 그것을 거슬러나갈 수 없다는데서 무력감을 느끼며 자연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는 자기굴욕감에서 묘한 쾌감을 느낀다.



이 자기굴욕감에서 권태가 생성된다. 권태에 빠지는 이유는, 행동에 나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사람들은 주어진 운명에 따라 실천한다. 반면,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인간들에 대한 안티테제들은 근본적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파고들며 실행에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권태가 그들의 몸을 감싸고, 삶이 따분한 자들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마치 악령의 스타브로긴처럼. 어떤 감정에 빠져보려고 '노력'한다.(자연법칙에 어긋난 인간이기에 이들은 사랑과 같은 감정마저도 노력해야한다.)  그리고 진심아닌 감정에 빠짐으로써 자기기만을 행하고, 기만한데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경멸한다.
  


과학에 따르면 최고의 효율에 따른 합리성으로 자연의 법칙에 따라 모든 행동들을 규율한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 따위는 필요없다. 자유의지가 없으니 책임질 일도 돌발상황도 없다. 모든 것이 계산한 결과 내에서 움직이고 미리 준비된 답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합리성에 반하는, 인간들의 체계를 방해하고 때려부수는 이익이 있다면? 세상을 방해하는 이익말이다. 권태에 빠진 인간이라면 자연법칙에 몸을 맡기지 않고 바보같은 행동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그렇게 하고싶을 때가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개인이 의욕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다고 보는 합리성에 기반한 결정론이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나 최적의 길만을 택하지 않는 변덕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보존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에 따른 무사안일이 아닌 고통을 사랑한다.



요컨대, 결국 자연과 합리성을 거스르는 인간이야말로 자유의지가 있으며, 개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2부 내내 지생수의 주인공은 의욕하지만 의지박약이다. 그 왜 그런장치 있지 않은가? 허리띠에 고무줄이 달려있고 그 고무줄은 매여있어 일정 수준까진 그 힘에 반해 갈 수 있지만 일정 수준에 달하면 자빠져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장치. 결정론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삐죽 튀어나가려하지만 튀어나오지 못하는 느낌.
  


결국은 상대방의 발 밑에 쓰러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10센티미터 가량 남긴 거리에서 그만 기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내 몸을 밟고 가버리고 나는 공처럼 옆으로 뒹굴었다.(문예 p83)



'자, 지금이야말로 놈들에게 술병을 집어던져야 할 때다.' 하고 나는 생각하면서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ᆢᆢᆢ 내 잔에다 가득 술을 따랐다.(p116)




잠시 생각한 후 나는 미치광이처럼 외투를 걸치고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려나갔다. ᆢ 그러나 내가 집에서 달려나갈 때 결국은 도중에 되돌아오고 말 것이라는 걸 나 자신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p190 ~ 191)



도스토옙스키는 결정론에 맞서는 자유의지, 하지만 자유의지는 곧 사그라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뀌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유의지의 무능함과 결국 인간은 결정론에 종속된다는 결과를 말하고 싶었던걸까? 주인공이 너무 찐이다보니 이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해석이 적절한 것일까? 보상과 처벌을 위해서는 그 근거로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자유의지에 의해 어떤 행위를 실행했을 때라야 그 사람에게 보상 또는 처벌이 가능한 주체의 책임이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유의지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천국에 가고 믿지 않음으로써 지옥에 간다. 하지만 이 믿음 자체는 하느님이 결정해주는 사항은 아니다. 모든 운명은 하느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왜 이 믿음의 행위에만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몫이 돌아간다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믿음을 가질지 말지 선택할 수 있어야만 그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훌륭한 명분이 비로소 생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어떠한 종교적 색채가 없는 글이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독실한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자유의지회의론자들처럼 자유의지를 당연히 부정하거나 자유의지의 존재를 살살 돌려 없는 것으로 만들었을 것 같지 않았을 거 같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 해석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지생수의 주인공이 일컫는 자유의지에 대해 다시 살펴본다. 합리적 이성에 따른 행위를 거부하며 합리성을 따르지 않는 독특한 사고를 하고 행동함으로써(비록 생각한대로 행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고로 인해 합리적 행동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남들과 차이를 짓는 독특한 개성을 형성하며 고유한 인격을 형성하는 이 기괴함을 자유의지라 칭한다.
  


비록 자유의지의 존재로 인한 어떤 생각이 실행에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운명에 따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자유의지는 설령 상황에 맞는, 가장 합리적이고 적확한 행동을 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두뇌에 부유하면서 인생에 분명 영향을 미친다. 위의 행동들에서도 비록 결과로 나아가진 못했지만 의욕하려했던 그때 그순간의 생각들이 그를 형성한다.



지생수의 주인공은 비록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경애하는 우상적인 인물 타입과는 다르다. 다만, 잡념들이 잡탕처럼 더미로 쌓인 남자, 합리성의 거대한 장벽을 허무려고 의욕하지만 결국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이 찐따같은 남자. 하지만 반골같은 모습을 포기하지 않으며 합리적인 것을 따르지 않고 본인만의 고유한 개성을 형성하는 그를 보고  외부에서 지생수라는 작품 안의 주인공을 관찰함으로써 사실은 우리의 객관적인 모습을, 우리는 그가 우리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생수의 주인공과 별 차이없는 찐따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우리는 그를 보고 단순히 웃어제끼거나 적대시할 순 없다. 찐따면 뭐 어떻단 말이야? 그를 옹호하고 싶기도 한 한편 그를 여전히 패버리고 싶기도하다. 그것은 자기변호 내지 자기경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찐따라는 사실을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진다는 사실이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합리적 부분을 존중한다. 그리고 지생수의 주인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합리적인 부분을 존중한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개성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는 사회가 빚어낸 양산형 인간들 중에서 개인을 구분하게 해주는 고귀한 개성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개성이라지만, 비합리적인 결과를 불러오는게 틀림없는 그 빌어먹을 개성때문에 인생이 꼬인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빌어먹을 지난 날의 이불킥할 과거의 수많은 행동들 때문에 나는 지생수의 주인공을 존나 패고싶다. 아니 사실은 지난날의 나를 패고 싶은거겠지. 하지만, 좀 더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나를 타인과 구별하게 하는 이 개성만큼 고귀한 것은 드물다.



합리성에 반하는 개성을 발휘한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자기가 모신 주군보다 위대한 대접을 받는 관성대제 관우의 경우가 있다. 서주의 함락 후 조조 휘하의 무장으로 들어갔으면 필히 귀한대접을 받았을 것이나 아무 기반없는 유비에게 돌아간다면 고생길이 훤한 것은 누가봐도 이견이 없는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는 이성에 따른 합리성보단 합리성에 반하는 도전을, 의리를 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만의 고유한 개성이며, 후대의 후손들에게 그의 개성이 영원불멸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된 것이다.



개성은 위로만 자라려는 획일적인 합리성의 추구에 반해 여러갈래로 옆으로 새는 나무가지들이 자라는 것이다. 과도한 가지는 때로는 성장을 방해하지만 위로만 자라는 것보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한다. 물론 살다보면 무진장 가지 쳐버리고 싶은 날도 많지만, 이 개성이라는 것들이 언젠가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