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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고전적 해석에 대한 고찰
-1부와 2부의 동향성(同向性)을 중심으로-
글을 이해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을 강조하겠다. 주체로서 『파우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악의 기준으로부터 탈피하여야한다. 이는 제 2부의 텍스트를 제 1부에 의한 선행기반으로부터 떼어내어, 제 2부만을 자율적인 형태로 해석하는 견해와 서독의 종교적 해석의 견해를 부정하는 시도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을 부정하는 방향성은 『파우스트』의 제 1부와 제 2부를 하나의 동향성으로 묶어내려는 시도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작품을 통일성을 가지고 이해하는 행위가 『파우스트』 해석의 고전적인 방식을 취한다. 즉 『파우스트』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가치를 긍정적으로 양립시키려는 시도이며, 제 1부의 <파우스트적인 것>과 제 2부의 <여성적인 것>의 상반적 가치 통합이다. 따라서 제 1부의 <파우스트적인 것>을 파멸적 존재라는 점에 기초하여 악으로 규정짓고 철저하게 작품 내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는 작품의 통일성을 결여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초하여 우리는 『파우스트』를 선악의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해석을 과감하게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는 천상의 서곡에서 괴테가 주(主)를 통해서 대화상의 서술로 풀어내고 있는 지점이며, 제 1부와 제 2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써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를 우리는 구출할 수 있습니다.”라는 표어는 작품 속에서 괴테가 <파우스트적인 것>을 하나의 가치로써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지점으로써 여실히 존재한다. 또한 <파우스트적인 것>의 면모는 제 1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는 하나, 제 2부에서도 <여성적인 것>과의 통합적 시도를 바탕으로 작품이 막을 내릴 때 까지 계속하여 등장한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는 제 2부로 구성되며, 제 1부에서는 <파우스트적인 것>의 형용사로써 파멸을 향하여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파우스트象을 강조하고 있으며, 제 2부는 상징적인 유형으로서 <여성적인 것>과의 합치를 통하여 하나의 영원한 불멸의 체계로써의 파우스트象을 강조하고 있다. 언뜻 보면 제 1부의 파멸적 존재로서의 파우스트를 부정적인 견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작품 내에서 괴테는 이러한 <파우스트적인 것>의 가치를 절대적 부인(否認)으로 배제시키지 않는다. 이는 <파우스트적인 것>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파멸적 존재로부터의 탈피 과정―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탈피―을 통하여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파우스트가 <여성적인 것>과의 합치로써 새로운 파우스트象을 탄생시킨다는 점에 기인한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누구보다 <파우스트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신과 그 행위에 대해 비판적 고찰을 통하여 변증법적 시도를 작품 내에서 고뇌함으로써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며, 그로써 자신만의 영원불멸한 방식을 절차적이고 합의 지향적인 방식으로 이끌어내려고 한다.
슈베르테 (Hans Ernst Schneider)는 그의 저서 『파우스트와 파우스트적인 것』에서 <파우스트적인 것> <파우스트적 인간>이라 통용되는 이념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1870년 이후 갑자기 도입된 파우스트의 이데올로기적 고양은 발전, 쉼 없는 활동, 낙관주의적 확신,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구원의 상징으로써 독일 국민적 자아의식, 이데올로기적 자기 위안과 자기찬양의 주도어가 되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적인 것>의 속성을 여러 가지 인물들에게 부여하였는데 이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그들의 급진적인 움직임이 파멸을 향해 동작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제 2부 2막의 호문쿨로스의 죽음과 제 2부 3막의 오이포리온의 추락이 이 지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으며, 제 2부의 가장무도회에서 나타난 로마황제의 열망으로 인한 불길 속 그들의 몰락이 이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파우스트적 상징인 인물들의 대사에서 그들의 파멸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제 2부에서는 <파우스트적인 것>과 상반되는 하나의 가치가 새롭게 등장한다. 괴테는 헬레네와 어머니들을 통하여 모든 존재에 대한 절대적 원형을 상징적으로 의인화 하고 있으며, 이 <여성적인 것>의 절대적 원형으로부터 출발하는 비현실성에서 도출된 형상을 통해 진리를 이룩하고자 한다. 엠리히(Wilhelm Emrich)는 1960년에 발표된 논문 『파우스트 제 2부의 수수께끼, 하나의 해결의 시도』(Das Rätsel der Faust Ⅱ Dichtung. Versuch einer Lösung)에서 이를 강조한다. “개인 파우스트는 침몰한다. 그의 자리에 초개인적, 초시간적, 세계를 숙고하는, 객관적 유형의 인간이 솟아오른다. (...) 더 나아가서 그는 모든 주관적인 것, 편협한 것, 개인적인 것을 상실한다. 그는 유형이 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절대정신(絶對精神)의 추구, 그 끝에 불멸의 영원한 절대적 존재가 있다. 더 이상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는 하나의 유기체(有機體)가 된다. 전 지구적 차원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에서 하나의 절대적 권력을 추구하는 진리(眞理)의 추구,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하여 영원(永遠)한 것을 추구한다.
괴테는 그의 작품에서 <파우스트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결합을 추구한다. 괴테는 작품 전반에 있어서 이 둘의 결합에 관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며 이를 섬세한 과정으로 극복하여 진리를 풀어내려고 한다. <파우스트적인 것: 대지의 영, 파우스트, 로마황제, 분노, 마부소년, 파리스, 호문쿨로스, 오이포리온, 아낙사고라스>과 <여성적인 것: 학사, 그레트헨, 희망, 어머니들, 헬레네, 탈레스, 바다의 영, 마리아>의 상반되는 가치는 유기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리며 지혜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결속된 존재로서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 물론 상반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합의될 수 없는 부분은 필연적으로 존재―<여성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가치로써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것>―한다.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여성적인 것>을 혐오하고, 반대로 여성들이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것>을 본능적으로 혐오하는 것은 이 지점을 잘 보여준다.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것>은 <파우스트적인 것>에 도움을 주지만, <여성적인 것>과는 필연적으로 결합이 불가하다. 그것은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것>이 모든 영원한 것을 부정하는―물론 메피스토펠레스도 여성적인 것에 끌리는듯한 면모를 작품 내에서 보인다. 사실 그는 모든 영원한 유형들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반항만을 목적으로 하는 영으로서 니체의 영원회귀(永劫回歸)사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기존의 체계를 파멸로 이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파멸을 향하여 동작하는 <파우스트적인 것>과 매우 유사한 관계를 가진다. 루카치(Georg Lukacs)는 『파우스트 연구』(Faust Studien, 1940)에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를 변증법적 관계로 해석하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동하는 활동>을 작품의 중심적 테마로 선언하고 있다. 굳이 이 둘의 차이를 나눈다면 <파우스트적인 것>이 하나의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자폐성을 지닌 유형이라는 점,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것>이 영원회귀 사상을 바탕으로 어떠한 유형도 인정하지 않는―혹은 모든 유형을 인정하는―자폐성 그 자체라는 점이다. 그 외의 모든 지점에서 이 둘은 통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파우스트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상반되는 가치가 과연 결합이 가능한 영원불멸하는 존재적 가치를 위한 작용으로써 완전무결(完全無缺)함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즉 <여성적인 것>과 필연적으로 결합이 불가한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것>의 동질적 가치를 가진 <파우스트적인 것>이 과연 <여성적인 것>과 합치가 가능한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이 절차적이고 합의 지향적인 매우 섬세한 방식의 추구가 『파우스트』를 관통하는 괴테의 이상(理想)이다. 그 이상을 향한 과정이야말로 작품 『파우스트』다. 『파우스트』에서는 이 양자 간의 균형의 문제가 끊임없이 강조된다. 대표적인 예로 호문쿨로스와 오이포리온은 이 둘의 가치 속에서 <파우스트적인 것>에 치우친 존재이며, 스스로의 상징 속에서 멈춰버린 학사는 <여성적인 것>에 치우친 존재로서 작품 내에서 등장한다. 언뜻 보면 양립 불가해보이는 두 가지 가치가 하나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지점, 이 지점이야말로 인류가 이루어야할 궁극의 과제임을 괴테는 말한다. 끝임 없이 나은 것을 추구하는 그의 파우스트象, 오색찬란한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인 여성적인 것의 추구, 그는 이 두 가지 안티테제를 하나로 융합시키려는 노력을 『파우스트』에서 보여준다.
『파우스트』 제 5막은 절대적 영원불멸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 밖에 없는 비극에 관하여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 이는 비극을 부정하는 종교적 해석의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이는 파우스트의 죄의 문제가 역사적 한계로써 필연적으로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포되어질 수 밖에 없는, 비극과의 무연의 필연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하는, 지도적·모범적 모델로서의 파우스트象이라 하는 긍정적 이미지를 내포하는 해석이다. 여기서 세 가지 상징 유형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가 과거의 상징유형으로서 두 번째 유형인 필레몬 부부에 의해서 무너진 하나의 신념체제이다. 그 과정에서 나그네는 구해진다. 세 번째로 파우스트가 필레몬 부부와 동일하게 과거의 상징유형(필레몬 부부)을 무너트리고 그 위에 하나의 신념체제로서 새로이 등장한다. 이 이야기의 흐름은 역사적 사건의 중간에 위치한 필레몬 부부를 대변하는 나그네의 시각에서 서술되어진다. 이로써 파우스트와 다를 것이 없는 필레몬 부부의 행위가 정당화 되고, 그와 다를 것이 없는 파우스트의 행위가 악에 해당하는 입장으로써 해석되어지고 있다. 작품은 이러한 이중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어떤 사상이든 누군가―기존 체제의 입장―에게는 비극으로 작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신만의 사상 체제가 가지는 비극의 필연성에 대하여 보여주는 부분이며, 이는 근심이라는 존재가 상징적 유형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영원한 것을 갈망하기에 그는 근심한다. 파우스트는 필레몬 부부의 비극을 느끼고 그로 인하여 근심과 하나가 된다. 영원한 것을 추구한 결과 나타난 비극의 필연성이 그에게 근심이라는 필연적 존재를 선물한다. 결국 파우스트는 근심에 의하여 눈이 멀고 필레몬 부부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상징적 유형에 갇혀서 메피스토펠레스에 의하여 무덤에 눕게 된다. 파우스트는 그 과정을 자신의 사업을 완수하는 종착지로 상상한 채 완성된 무덤에 눕는다. 여기서 근심은 비극에 의하여 탄생한 존재이며, 근심이 거듭된 결과는 눈이 멀어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된 상징적 체계에 갇힌 파우스트를 의미한다. 눈이 먼 파우스트는 더 이상 비극에 의한 근심을 느끼지 아니한다.―필레몬 부부 역시 이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 비극에 대한 근심을 전혀 느끼지 아니한 채 눈이 멀어 자신만의 반항과 외고집으로 상징 속에 머물러 평온한 삶을 살다 그와 같은 존재에 의해서 파멸된다―다만 작품은 이러한 스스로의 상징적 유형에 갇혀진 파우스트를 구원의 손길로 구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의 해석상 『파우스트』에 내포되어지는 파우스트라는 영원불멸한 상징적 유형에 대한 회의(懷疑)가 존재할 것이다. 과연 그가 절대정신으로써 성공하여 구원 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 회의의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더 나은 형태를 추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지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영원한 절대정신이 있다. 과연 그것이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야 말로 절대정신에 가까워지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될 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자연의 굴레 속에서 자연과 같이 되려한다. 괴테가 바라는 지점은 이것이다. 그는 주인공 파우스트의 종착점을 영원불멸한 절대정신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목적은 파우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속성>이며 파우스트의 변증법적 사고 방식이다. 1823년 11월 4일 괴테는 역사적인 것과 생산적인 것을 결부시키면서 뮐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되돌아 그리워할 과거사는 아무것도 없다. 과거의 확장된 요소들에서 형성되는 영원히 새로운 것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움이란 언제나 생산적이어야만 하며, 하나의 보다 더 휼륭한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만 한다.”『파우스트』에서 구체화된 그의 정신이야말로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모든 무상(無常)한 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
도달할 수 없는 것,
여기서 실현되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
여기서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가도다.
참고 논문: 박환덕 서울대 교수 ㅡ 괴테의 『파우스트』연구 <비신화화 과정의 작품 수용을 중심으로>
최근 한 달 동안 을유문화사(장희창), 길(전영애), 범우사(박환덕) 이 세 가지 번역본을 중심으로 10번 회독했다. 그냥 눈으로 읽기도 하고 소리 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기도 하면서 내용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함. 느낀 점은 괴테가 천재라는 점, 파우스트라는 작품이 엄청 과소평가당하고 있다는 점이었음. 작품 추천은 별로 안 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한 번만 읽고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깊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 괜히 개인적 사견만 들어가고 작품을 통일성 있게 읽어낼 수 없다. 여러 번 회독해야만 단어들 사이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징적 의의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고 세부적이면서도 전체 망라적으로 파우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도전한다면 한문장 한문장 곱씹어서 읽어봐라. 놓칠 문장이 없다.
개인적으로 내가 읽어본 문학 작품 중에서 단연코 1등이다. 괜히 천재가 60년을 두고 써낸 작품이 아님.
그래서 어디 번역본 추천?
박환덕
민음사는?
민음사는 안읽어봄
파우스트를 다회독 한 이유는 뭡니까
원래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여러번 회독함
읽으면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도전한거
괴테를 좋아함? 파우스트 말고 뭐 읽음?
나는 한번 읽구 넘 안맞더라고 ㅠ - dc App
근대적 인간의 정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한계를 탐구한 대작
웬 논문이..
1.2 다 읽었는데 결말이 기억안나
내가 읽기엔 아직 먼 것 같다.. 내공을 쌓고 나중에 천천히 읽어봐야지
이정도면 이 새끼가 파우스트임
5년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달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안남 - dc App
3회독도 힘들던데 덕후님.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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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합일'이 '어떠한 유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배제시킨 해석 자체가 무의미 함을 뜻합니다. 어느 쪽으로 치우칠 수는 있습니다만, 배제시키려는 태도는 극단으로 치우친 해석에 불과하죠.
다만 이 둘의 치우침의 문제에 있어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하는가? 에 대한 해답에 있어서 저는 선행 기반을 다지고 있는 <파우스트적인 것>의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여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해석은 필연적으로 선행 기반을 소홀히 함으로써 목적 만으로 해답이 기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선행 기반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둘은 필히 같이 합니다. 이게 전제입니다. "어느 쪽에 치우치더라도 반드시 다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2. 또한 <파우스트적인 것>과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것> 사이의 간극은 '작품의 진행 상 표현 방식'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둘의 대화는 마치 동일 인물인 것 마냥 서술ㅡ변증법적 서술ㅡ됩니다. 작품 속에서 이 둘은 확고한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자신들의 역할로서 한 가지 가치만을 관철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서술로서 파우스트는 양자 간의 가치에서 흔들리고 있을 뿐이죠.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차이가 있다면 누가 좀 더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가>의 사소한 차이일 뿐이죠. "그런 사소한 차이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나뉘었으니, 괴테가 의도한 것은 구원에 가까운 파우스트다."라고 말씀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답은 "그 말이 타당합니다."입니다.
다만 아셔야 할 점은,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인물 자체를 자신의 종착점으로서 명확 시 하고 있지 않다는 지점입니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이 그의 <영원한 방식>에 메피스토펠레스보다 '가까울 수는' 있어도, '그러한 점에 기초하여' 파우스트라는 인물이 <진리>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추구한 '영원함'이란, 파우스트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속성>입니다. 이것을 주목 하셔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중요한 것은 파우스트가 아니라 <파우스트의 변증법적 사고 자체>라는 것이죠.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에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포함되는 것이고요.
<누구는 누구다. 누구는 누구이기에. 어느 것이 맞다.>라는 일반적 문제들을 관심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우스트상>은 포괄적인 종교적, 철학적 혹은 도덕적 교의들에 의거하지 않으려는 시도이며, 그 <절차적이고 합의 지향적인 그의 성격 자체>가 <파우스트상>으로써 작품 내에서 원초적으로 주목을 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3. 이둘이 어떤 식으로 융화가 가능한지에 대하여서는 괴테가 명확하게 기준을 정해서 설파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작품 전체가 이 둘의 융화를 '시도하는 과정'으로 <양자간에 치우침 정도>를 계속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등장인물로서 파우스트, 오이포리온, 호문쿨로스, 헬레나, 그레트헨 학사와 같은 작품 속 주연들에게만 해당하지 않으며, 스핑크스, 그라이프, 세이렌, 키론, 만토와 같은 작품 속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고 있는 주연들까지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양자간의 치우침 정도>와 그에 따른 <올바른 균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모든 서술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세심한 영역이며, 함부로 그 기준을 '정의' 내릴 수 없죠. 다만 그 "섬세한 조화의 방향성" 그 자체가 괴테가 추구하는 '영원의 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 파우스트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괴테의 위와 같은 이상이 현세대의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닮았다. 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네요. 절차적이고 합의지향적인ㅡ목적보다는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ㅡ사상적 체제를 말입니다. 괴테는 칸트를 존경한다고 했었는데요,, 칸트로부터 이어진 롤즈의 정의론이 괴테와 닮은 것도 자연스러운 양태가 아닐까 싶네요.
다시 한번 강조 하자면. "합의 가능하다. 다만 그렇게 합의된 존재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ㅡ가깝다고는 할 수 있음ㅡ합의 지향적인 사상 자체가 영원한 진리이다. 그리고 그러한 괴테의 이상이 하나의 영원을 추구한다는 점에 기초한다면 형이상학적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진리를 합의로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점에 기초하여,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셈이니. 그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형이상학이라고는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