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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시학에 따르면, 비극은 태양이 1회전하는 기간(하루) 안에 끝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오랜 세월에 걸쳐 희석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 내에 긴장감 있게 진행하는 것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인상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도 그러한 극적 효과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개츠비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으며 어떤 마음으로 5년의 세월을 지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저택에서 보낸 단 3개월의 여름 한 철로 우리는 그의 야망과 추락 사이의 서늘한 고도차를 체험할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데는 하나의 뜨거운 야망을 향해 불꽃처럼 살다 간 개츠비의 치명적인 매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반한,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든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화려한 동시에 허무했던 한여름의 파티들과, 진실했던 동시에 허구였던 그의 언행 등 모든 행적이 개츠비라는 인물을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화룡점정은 그의 죽음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걸 확인한 후 태양이 채 1회전하기 전에 찾아온 죽음.

시원스러운 전개 속도에 걸맞은 시원스러운 죽음.

나머지 삶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라는 듯 과감한 죽음.


무엇보다 그의 죽음에 전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츠비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개츠비이기 때문이다.



그를 죽인 첫 번째 개츠비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신이다.

그는 너무 위험한 질주를 했다. 스포츠카도 아니면서, 정해진 트랙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스포츠카를 따라잡기 위해 달려나간 불법 개조 대포차의 결말이야 뻔하지 않은가?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개츠비 사후 그의 저택에서 닉 캐러웨이가 전화로 들었듯, 불법에 너무 깊게 손을 댄 그에게는 데이지를 쟁취한 후 누릴 만한 밝은 미래가 없었다.

과거에 젖어 모든 걸 바친 그에겐 미래는커녕 그의 현재조차도, 과거를 극복한 현재가 아닌 과거의 끊임없는 연장이었다는 점이 그의 첫 번째 사인이다.



그를 죽인 두 번째 개츠비는 조지 윌슨이라는 개츠비다.

조지 윌슨에게는 개츠비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 다 전통적인 부유층이 아니라는 점인데, 부유층이 아니라는 것쯤은 현실에선 너도나도 공유하는 부분이지만 이 소설에선 부유층이 아닌 주요 인물이 더 적고, 오로지 그 적은 인물들끼리만 모조리 죽고 죽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의 말미에 닉 캐러웨이가 톰을 보고 느꼈듯이, 소설 속 부유층이란 그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는 다른 사람들이 치우게 하는 사람들이다.

겪어본 적 없는 물질 문명의 폭주 속에서 방황하던 1920년대의 미국, 개츠비와 톰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의 결함을 갖고 있었지만, 그 결함들이 만든 모든 상처와 고통은 빈자의 몫이었다.


남편의 가난에 질색하며 톰과 바람을 피운 머틀,

그런 머틀을 노란색 롤스로이스로 죽인 개츠비,

그리고 처음엔 톰을 죽이러 갔다가 (명쾌하게 의심이 풀린 것도 아닐 텐데) 뒤돌아 개츠비를 죽이러 온 윌슨.


세 사람의 참극엔 물질에 대한 숭배와 그를 볼모로 삼은 강자의 희롱이라는 바탕이 있다.

윌슨 부부는 개츠비만큼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들 또한 물질에게 희롱 당하며 비극으로 걸어갔다는 점에서는 가난한 개츠비라 불러도 될 것이다.


한여름 내내 파티를 주관하느라 본인 저택에 있는 풀장 한 번 가지 못한 개츠비는, 무더위도 꺾인 늦여름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영을 채 즐기지 못하고 가난한 개츠비에게 죽고 만다. 그에겐 단 한 번의 유흥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듯이.

황금을 넘어서는 고고한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었던 것, 그것이 개츠비의 두 번째 사인이다.




흔히 고전은 인간 보편을 다루기 때문에 후세에도 널리 읽힌다고 한다.

우리는 개츠비를 죽인 개츠비를 보면서 하나의 욕망 앞에서 모든 것을 내던진 인간의 추함과 고결함 모두를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개츠비의 인생은 1920년대의 미국이라는 구체적인 시대가 있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비춰진다.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인간을 둘러싼 시대에 대한 이해에까지 번졌기 때문일 것이다.

글자를 통해 인간을 배우고 세상을 알며 과거와 소통하는 것, 이것이 고전이 가진 매력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츠비를 죽인 세 번째 개츠비는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자신이다.

피츠제럴드는 자신과 주변 인물들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이 투영된 개츠비를 총살한 건, 다른 누구보다 작가 그 자신이다. 무엇보다 심플한 세 번째 사인은, 아마 죽이고 싶어서일 것이다.


작가의 인생은 개츠비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가난을 이유로 첫 번째 애인과 헤어진 후 돈과 허영에 집착하게 돼, 마찬가지로 돈과 허영을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사치와 방탕 속에서 전전하던 중 문학가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이 대작 위대한 개츠비를 지었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짓기 위해 해외에서 체류한 몇 개월 속에서도 부인의 사치와 방탕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다고 하니, 이 소설을 짓는 중에 시대에 대한 혐오가 더 깊어젔을지도 모르겠다.


피츠제럴드는 자기 자신을 투영한 개츠비를 죽임으로써,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부활하고 싶지 않았을까 한다.

모든 사치스런 파티를 끝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심장을 향해 자기 자신의 손으로... !

작가를 만나,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세상을 만나고 돌아와 다시 작가를 마주하는 것. 이것도 고전이 주는 하나의 재미인 것 같다.

소설의 마지막 문구를 인용하자면...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읽으며) 계속 뒤를 향하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미래로 떠밀려가면서도.















시대가 어쩌고 작가가 어쩌고 한 부분은

대한민국 지식의 보고 나무위키를 참조한 것이라 딱히 안 맞을 수도 있다 ㅋㅋ

이상하게 적었으면 지적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