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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 정보
<일리아스>는 기원전 8세기 경 활동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그리스의 음유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임. 소재는 당대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일종의 전설처럼 알려져 있었던 기원전 1200년 무렵의 ‘트로이 전쟁’이랑 그리스 신화. 이 사건을 다룬 서사시는 잘 알려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외에도 총 7권에 달한다고 한다. 미친.. 근데 기록에 따르면 <일리아스>가 분량 면에서는 킹왕짱이었다고. 나님이 읽은 건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의 판본이었다.
2. 왜 이걸 읽어야 하나?
그리스어에 능통한 게 아니라면 '6각운'이나 그리스어 알파벳에 맞춘 각 장의 제목 등 원전이 가진 엄격한 정형시로서의 재미는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근데 솔까 이걸 빼면 이 고전의 가치가 얼마나 되려나 싶다.
하지만.. 서양 고전 읽다보면 일리아스 속의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 존나 많이 나온다. 단테가 호메로스 빠돌이였던 건 유명한 사실이라 <신곡>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긴 함. 그 외에도 먹물 티내는 작가들은 본인 작품 속에 존나 당연하다는 듯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 속 이야기들을 써먹는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를 이해하는데도 존나 도움이 된다고 본다. 대충만 알고 있는 신들 사이의 권력 관계나 스토리들이 꽤나 비중있고 자세하게 나오거덩.
3. 근데 왜 읽기 힘든가?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나?
일단 존나 두껍다. 700페이지가 넘으니까. 존나 덩치 돼지라서 왠만한 책은 누워서 한 손으로 들고 읽는 나에게도 좀 버거운 두께다. 근데 알아야 할 건, 원래 이 정도 분량이 나올 텍스트가 아니라는 거다. 서사시 형식를 유지하기 위해 행과 연을 원전처럼 나누는 바람에 길어졌을 뿐, 만약 보통의 산문처럼 편집을 했다면 적어도 1/3은 줄어들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책을 집어들기 전, 보이는 그대로의 분량에 압박당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생경한 인명, 지명을 포함한 고유명사들을 모두 각주를 읽어가면서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일단 불가능하고, 솔직히 여기 나오는 수천 개의 인명 중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인간은 1/100도 안된다고 본다. 내용 자체가 트로이 전쟁이다. 수천수만의 군사들이 서로 엉겨 붙어 싸우고 싸우다 죽는 내용이 핵심이다. 전쟁 영화 볼 때 엑스트라들을 모두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반복해서 등장하지 않는 쫄병들의 이름까지 알고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관(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 디오메데스, 아킬레우스, 네스토르, 프로테실라오스, 아이아스)랑 트로이쪽 지휘관(프리아모스, 헥토르, 파리스, 아이네이아스, 사르페돈, 폴리도로스, 폴리테스, 데이포보스) 정도의 이름이랑 관계만 기억하면 된다. 정 헛갈리면 내가 했던 것처럼, 책 뒤의 인물 소개표와 별도로 노트에다가 인물 설명이랑 관계도 그려가면서 봐도 좋다.
4. 줄거리는?
신들의 시기와 질투에 휩쓸리게 된 가엾은 미스 올림푸스 심사위원 파리스의 선택으로 인해 그리스 연합군과 에게해 너머의 트로이는 전쟁의 포화에 휩쓸린다. 고대 그리스의 내로라하는 왕과 영웅들인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아킬레우스는 연합군을 꾸려 헬레네를 훔쳐간 트로이의 프리아모스의 아들들과 맞서 싸운다. 그리스 연합군 뒤에는 헤라와 아테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있고, 트로이의 뒤에는 제우스와 아폴론이 있다. 기나긴 전쟁의 끝에 아가멤논과 반목하게 된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하나,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운명을 알면서도 헥토르와의 전면전에 나선다. 원한으로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으려던 아킬레우스가 제우스의 권유와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호소로 마음을 고쳐먹고 시신을 돌려준다.
5. 내가 느낀 재미 포인트들.
1) 병신 같은 그리스의 신들과 인간들.
그리스인들에게 신이란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라기보다 자신들의 창의성을 뽐내고, 삶의 교훈을 전승하거나 욕망을 대리투사하기 위한 일종의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는 내 추측이 더욱 확실해졌다. ‘아레스’는 전쟁의 한 가운데 뛰어들었다 디오메데스에 의해 큰 상처를 얻고 제우스 앞에서 엉엉 울며 치료해 줄 것을 애걸하는 찐따다. 애초 미모를 겨루겠다는 유치한 이유로 이 사단의 단초를 마련해놓고, 끝까지 질투와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 채 전쟁에 간섭하고 고집을 부리는 헤라를 비롯한 여러 신의 모습 또한 얼마나 유치하던지.
그리고 존나 간지 쩔게 묘사되는 장군들이 긴박한 순간에서 보이는 찌질함도 웃기다. 이를 테면, 혈혈단신으로 트로이 성에 들어선 아킬레우스랑 싸우겠다고 혼자 나선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는 아킬레우스를 대면하곤 쫄아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왕과 자신의 아내, 자식들이 모두 내려다보는 상황에서 핵토르는 ‘무릎을 잽싸게 움직이며’ ‘프리아모스의 도시를 세 바퀴나 빠른 걸음으로 돌’아 도망치는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2) 청동기 시대 인간들의 생활상
청동기 시대의 물질적 가치관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온다. 아가멤논이 존나 삐진 아킬레우스와의 화해를 제안하며 열거하는 선물 1위는 ‘아직 불이 닿지 않은 세발솥 7개’이다. 그다음이 금 250kg, 한참 후가 미케네의 일곱 도시이니, 현대인의 눈으로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리스트다. 헥토르의 죽음 후 그리스군 진영에서 열리는 운동경기 상품에도 이 ‘세발솥’이 들어있어, 내로라하는 그리스의 영웅들이 솥을 얻기 위해 땀을 뻘뻘 쏟고 피를 흘리며 경쟁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를 테면 이런 식. “그러나 그들은 튼튼하게 만든 세발솥을 차지하려고 / 승리를 위해 쉬지 않고 힘껏 싸웠다.” 아마도 음식을 가열할 정도의 불에도 상하지 않는 솥을 만드는 제련술이 대중적으로 퍼지지 못했던 시기라, 뜨거운 불을 견딜 수 있는 솥의 가치가 도시보다 컸겠지.
3) 그리스인들의 운명론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신들이 미리 정해놓은 운명이라는 대본을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운명의 내용을 모두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예정된 죽음과 고통을 피하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얼핏 꼭두각시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 가련하고 우습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 비극의 정도가 커질수록 생각은 조금씩 달라지더라. 필멸의 인간을 비웃으며 불멸하면서도 여전히 사사로운 욕망과 감정을 이기지 못해 애먼 인간사에 개입하고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어리석은 신과, 막장 드라마나 다를 바 없는 가혹한 운명을 알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까지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와 이상, 목표를 위해 돌진하는 인간 중 누가 더 위대한 존재일까?
아무리 막장드라마라고 해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을 펼치는 배우는 비웃기 어렵듯, 모순투성이의 삶 속에서도 긍지와 치열함을 잃지 않은 채 치열하게 살고 싸우다 죽는 인물들은 병신같지만 멋있었음. 이를테면 이런 문장에 드러나는 운명론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정신.
친구여! 만일 우리가 이 싸움을 피함으로써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운명이라면,
나 자신도 선두대열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또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로 그대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오.
허나 인간으로서는 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무수한 죽음의 운명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우리가 적에게 명성을 주든
아니면 적이 우리에게 명성을 주든 자, 나갑시다!
-12권 321행, 사르페돈의 말”
간지 폭발...
6. 결론
일단 난 요약본이나 해석본을 거의 경멸하는 주의인데, 위에서 말했듯 이 작품을 원전의 내용을 완역한 판본으로 읽을 이유는 별로 없다고 본다. 차라리, 읽기 쉬운 문장과 다양한 배경설명, 시각 자료들이 많은 좋은 요약판을 찾아 읽어라!
그리고 사실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양놈들이 가진 운명관과 인생관임. 주요 지휘관들은 트로이전쟁의 결말은 물론, 본인들 인생의 결말이 뭔지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라 열심히들 쟁투하고 아득바득 살아간단 말이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만날 수 밖에 없는 제약이나 부조리들을 동양권의 고전들은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인 반면, 양놈들은 기원 전의 시대부터, 똑같이 비합리적이고 이해가 불가능한 운명을 인식했으되, 이를 극복하고 저항하는 인간형을 영웅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양 문화권이 그려냈던 절대자나 신의 모습을 대조해보아도 이런 차이점은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닥추
맨위에 단테를 괴테라고 오타냈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아이네이스 다 읽었는데 거의 잊고 살았는데 ㅎㅎ 감상 보니 좋네
ㄴ오타가 아니라 무식한 거임ㅋㅋ 내 무식을 반성할 수 있는 표증임으로 고치지 않겠노라...
재미있었어. 나도 천병희 번역으로 숲에서 나온거 샀는데, 안봤는데, 이후기를 보니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개추 눌러준 갤러들 감사합니다. 주소를 남겨주시면 '불이 닿지 않은 세발솥'을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와 리뷰 대다나닼ㅋㅋㅋ개추드림
잘 읽었음. 추천.
캬~
이거 몰입해서 읽기가 쉽지 않은데 ㅋㅋ 좋은 리뷰 잘 봤음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