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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문이당, 2002. 도서관에서 대출.>


한 사람의 작은 생에 대하여 듣는 것은 언제나 신비로운 일이다. 우리는 이따금 아무도 모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가 무작정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선택과 분별을 거친 정제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앉히고 자신의 삶의 아무것이나 떠들라면 그것은 조금 지리멸렬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생의 이면』은 또 다른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것의 당사자를 근원지로 하면서도, 결과적으론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투과된다.

그리하여 예쁘게 접시에 담긴 이 이야기를 우리는 또 나름의 방식으로 시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소설가들이 흔히 쓰는 대접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부길 씨의 이야기를 어떻게 맛보면 좋을까.


사실 나는 한 사람의 전기를 해제(解題)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주로 이야기를 관망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면 끝난 뒤에 내 감상은 대체로 이렇다.


"세상엔 이런 인생도 있구나."


나는 대체로 이런 스탠스다.


박부길. 이름도 투박한 이 사내의 이름을 완전히 기억한 뒤에도, 나는 그 말만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그 이야기에 단 하나의 감정도 싣지 못했던 건 아니다.

박부길의 생이 나에게 흘러간 감정을 다시금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스탠스는 일종의 도피 방식일 수도 있겠다.

박부길의 태도에 대하여 종종 주먹이 마려웠던 것도 그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나의 오랜 시선들을 다시금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그건 박부길 씨의 서술된 생처럼, 이젠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마냥 그런 식으로만 이런 소설을 읽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PTSD가 쎄게 오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생각에, 중요한 건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런 이야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어떤 사람의 이야기도 분명 우리 근처에 있었음을.


우리는 우리가 만난 사람의 모든 면을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런저런 풍파로 다져진 '지금의 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이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그들의 오랜 이야기가 우리에게 닿을 때,

우리는 그들의 생이 부근에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생의 '지금 면'이란 게 여기 있게 되었구나, 하고.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언젠가, 호남선을 타다가 저 멀리 산언저리가 시야에 닿으면 나는 또 박부길 씨의 이야기가 기억날 것이다.

그래, 그런 인생도 있었지.

또 뻔한 말을 중얼거리며.


그날은 되도록 날이 습하고, 바람이 잔잔하면 좋겠다.

그의 불이 아무쪼록 번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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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